II. 연성 후견주의와 경성 후견주의 논쟁
1. 파인버그의 연성 후견주의 전략
필자는 연성 후견주의가 자유주의 내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는 이유는 이미 법체계 속에 존재하는 강한 후견적 조항들이 본질적으로 자유주의 모델과 충 돌할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갈등에 대한 납득할 만한 논리적 설명을 제시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이러한 설명은 (i) 타인으로부터 절대 간섭받지 않을 개인의
181) 가령 의사결정능력을 보유한 성인이 자살을 선택하더라도 권리론적 접근방식은 당사자 가 어떠한 왜곡된 상황에 처하지 않았으며 자발적으로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이라면 제3 자는 그러한 당사자의 결정에 간섭하지 않는다. 그러나 결과론적 접근방식은 당사자가 비 록 자발적인 결정이라 할지라도 자살할 권리와 생명 이익의 비교형량을 통해 간섭을 허용 한다.
182) 사실 파인버그가 Harm to Self에서 펼치는 연성 후견주의 전략은 진정한 후견주의가 아 니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특히 Tom L Beauchamp, “Paternalism and Biobehavioral Control”, The Monist 60(1), 1976, 67면에서 파인버그의 연성후견주의는 일종의 해악 원리 의 다른 버전일 뿐이라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후견주의의 핵심을 본인의 자유로운 선택이 본인에게 해악을 미치지 않도록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파인버그의 논의는 외부적 요소에 의해 자발성이 영향을 받는 것에 초점을 두기 때문에 그러한 자발적이지 않은 개인의 결정은 곧 자유로운 결정이 될 수 없으며, 이로 인한 결과에 대한 간섭을 허 용한다는 논리는 결국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유를 보호하기 위한 것에 해 당하기 때문이다. 파인버그 이러한 비판에 대응하여 경성 후견주의만을 후견주의로 부르 고, 자신의 연성 후견주의는 연성 반후견주의(soft anti-paternalism)라고 부를 것을 제안하 기도 한다. Joel Feinberg, “Paternalism”, Borchert D. (ed.), Encyclopedia of Philosophy 7, Detroit: Thomson Gale, 2006, 137-140면.
자기결정권 영역을 확보해두는 것, (ii) 후견주의적 법조항이 실제로 공적인 개 입에서 만들어진 것이기보다는 타인에 대한 해악, 가령 타인에게 경제적, 심리 적 비용을 초래할 수 있다는 관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면, 그러한 법조항이 외견상 후견주의적으로 보일 지라도 실제로는 개인 행위자의 자율성을 침해하 지 않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다.183)
이러한 두 가지 설명에서 파인버그가 중요하게 사용하는 기준은 ‘자발성 (voluntariness)’ 이다. 자발성 기준을 살펴보기 전에 중요한 개념 지표 두 가 지를 짚고 넘어가도록 한다. 첫째, 파인버그는 의사결정과정에서 ‘합리성 (rationality)’과 ‘상당성(reasonableness)’의 개념을 구분하고,184) 전자의
‘합리성(rationality)’에 의존하여 자발성 기준을 세운다. 파인버그가 사용하 는 자발성 기준에서 ‘합리성(rationality)’은 핵심적으로 의사결정자의 ‘의사 결정능력(competency)’을 보유한 상태로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결정의 내용 적 판단에는 제3자의 주관적 판단이 개입될 여지가 있기 때문에 자기결정영역 에 대하여 제3자에 의한 일체의 내용적 판단을 봉쇄하는 것이 더 객관적이고 안정적이라고 간주하는 듯하다. 따라서 파인버그의 자발성 기준은 의사결정능 력 유무를 통해 자기결정권 개념과 연결 짓는 전형적인 자율성 능력 모델의 실용적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의사결정능력이 있는 성인에게는 자기결정
183) (i)의 설명에는 대체로 권리론적 모델을 택하는 경우 대체로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불가 침의 자기결정영역은 결국 사회 공동체의 합의를 통해 결정되는 것이라는 전제에 의하면, 이러한 사적인 자기결정영역을 어떻게 한정할 것인지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다. (ii)의 설명방식은 파인버그의 특징적인 연성 후견주의자적 전략에 해당하는데 이와 관련하여 더 검토해보도록 한다.
184) 파인버그의 논의에서 합리성(rationality)과 상당성(reasonableness) 구별은 중요하다. 일상 적으로 두 용어는 구분되지 않고 혼용되며 ‘합리성’으로 통칭되곤 한다. 그러나 특히 의사결정능력의 유무를 결정하는 의미로서 합리성(rationality)이 사용되는 경우에는 ‘인지 능력’으로, 즉 ‘합리적인(rational)’은 ‘인지능력을 가진’, ‘비합리적인(irrational)’은
‘인지능력이 결여된’으로 번역하고, 의사결정의 현명함의 정도를 가리키는 의미로 의사 결정에서의 가치판단을 반영하는 것을 암시하는 상당성(reasonableness)이 사용되는 경우 에는 종종 어감에 따라 합리성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상당한(reasonable)’은 ‘합 리적인(혹은 지혜로운)’으로 그 반대의 경우는 ‘비합리적인(혹은 지혜롭지 못한)(un- reasonable)’으로 구분하여 사용한다. 파인버그는 인지능력을 중심으로 인지능력의 결여 상태와 비합리적인(즉 현명하지 못한) 상태를 구분한다. 이러한 용어 구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Joel Feinberg, 위의 책(주24), 108면 이하 참조. rationality는 ‘합리성’ 혹은 ‘이 성’ 보다 의사결정에서 인지능력의 보유를 의미하는 것으로 축소하여 논의하는 것이 파 인버그의 논의에 더 적절하다는 견해도 제시된다. 변문숙, “간섭주의의 정당화에 관한 연 구 - 파인버그의 온건 간섭주의를 중심으로 -”,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35-37면.
을 내리게 하고, 의사결정능력이 결여된 성인이나 미성년자에게는 제3자의 후 견적 판단에 의존하도록 이원화하는 방식이다.
둘째, 또 다른 중요한 개념 지표는 자발성과 비자발성의 구분이다. 파인버 그는 의사결정능력의 ‘전부 혹은 전무(all or nothing)’식의 구분과 달리 자 발성과 비자발성은 명확히 구분할 수 없으며 완전한 자발성의 단계에서부터 자발성의 결여 상태까지의 다양한 정도차이를 고려하고 있다.185) 파인버그는 이상적으로 완전한 자발적 선택 모형을 제시하기는 하지만186), 현실에서는 완 전한 자발성의 상태에 다다르기 어렵기 때문에 다양한 정도차를 가진 자발성 을 판별할 수 있는 가변적 기준들(variable standards for voluntariness)을 제시 한다. 이때 고려되는 가변적 기준들의 지표들은 “(i) 위험의 상당성(the rea- sonableness of the risk) (ii) 해악으로부터의 회복가능성 (iii) 특수한 상황적 고 려 (iv) 비자발성의 추정(the presumption of nonvoluntariness) ”등이다.187)
사실 이러한 가변적 기준들은 경성 후견주의가 자기결정권과 결과 가치를 비교 형량하는 과정에서 사용되는 기준들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188) 다만 파인버그가 이러한 기준들을 활용하는 방식은 오직 행위자의 선택에서 자발성 이 의심되는 경우에, 곧바로 제3자의 후견적 개입을 허용하기 보다는 의사결 정자의 자발성을 확인하기 위한 심사 과정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경성 후견주 185) 파인버그는 정도차가 존재하는 자발성의 기준을 고려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자 발적 행위(voluntary action) ’개념과 ‘숙고된 선택(deliberate choice)’ 개념에 의거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발성 개념은 아리스토텔레스, 강상진·김재홍·이창우 옮김, 「니코마 코스윤리학」, 도서출판 길, 2013. 파인버그의 초기 아이디어(Joel Feinberg, “Legal Paternalism”, Canadian Journal of Philosophy 1, 1971)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숙고된 선택 개 념에 의거하지만 이후 지나치게 높은 기준이라는 비판을 받은 바 있다. Donald VanDeveer, “Autonomy Respecting Paternalism”, Social Theory and Practice 6(2), 1980, 199-202면; Donald VanDeveer, Paternalistic Intervention,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86, 81-86면.
186) 파인버그가 제시하는 완전한 자발성 모형은 “(i) 의사결정능력을 가질 것, (ii) 강제나 구
속이 없을 것, (iii) 미묘한 조작(최면이나 수면 중 암시)이 없을 것, (iv) 무지나 오류가 없 을 것, (v) 일시적 왜곡상황이 아닐 것(일시적 왜곡을 유발하는 상황의 예; 신체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들- 가령 피곤함, 생리적 흥분, 우울증, 약물에 의한 정신혼미, 심한 두통 등 의 고통, 심리적 안정을 저해하는 요소들 – 과도한 열정, 충동, 심리적 동요, 흥분, 심각한 시간의 압박 등) 의 요건을 충족한 경우”라고 설명한다. Joel Feinberg, 위의 책(주24), 115-116면.
187) Joel Feinberg, 위의 책(주24), 118면 이하.
188) 적어도 어떠한 고려들도 의사결정능력과 위험의 형량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Govert Den Hartogh, 위의 논문, 76면.
의나 연성 후견주의가 유사한 기준을 가지고 결정에 관한 실체 판단을 내리고 그 결과가 동일하게 판명 나더라도, 파인버그의 설명에 의하면 이러한 실체 판단은 결정자의 입장에서 일시적으로 결정자의 자발성을 심사하는 과정이라 고 설명하는 점에서만 차이가 난다.
파인버그가 이러한 설명방식을 고집하는 이유는 아마도 제3자의 판단 개입 이 객관적이지 못하고 주관적 이유에 의해 휘둘릴 수 있음을 경계하는 것일 것이다.189) 그러나 앞서 제시된 (i) 위험의 상당성 (ii) 해악으로부터의 회복가능 성 (iii) 특수한 상황적 고려 (iv) 비자발성의 추정 등의 실용적 기준들은 실제 로 행위 당사자의 자발성을 가리는 기준들이기보다는 감수하게 되는 위험의 심각성과 확실성의 증거를 통해 행위자에게 부과되는 경제적·심리적·신체적 부담을 최소화하는 선에서 여러 조치를 취하는 것이며 결국 파생적 가치들에 대한 비교형량의 성격에 가깝다.
또한 이러한 기준들은 제3자의 주관적인 평가를 반영하거나 다양한 가치들 에 대한 위계적 판단을 수반하는 것이기보다는 오히려 상당히 객관적으로 보 이는 (혹은 상식적인) 지표들을 통한 비교형량에 근거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 다면 애초에 파인버그가 우려하는 제3자에 의한 주관적 왜곡 가능성의 여지는 크게 줄어든다. 연성 후견주의를 취하든 경성 후견주의를 취하든 구체적인 실 체적 판단의 기준이 유사하고 그로인한 판단 결과도 동일할 수 있다면, 파인 버그의 연성 후견주의에서 자발성 기준을 고집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사실 이러한 파인버그의 연성 후견주의 전략에 대하여 대니 스코시아 (Danny Scoccia)가 제기하는 반론은 필자가 제기하는 자율성 능력 모델에 대한 비판적 관점과 일맥상통한다. 스코시아에 의하면 “자율성의 근거가 추상적인 개인의 자기결정권이나 인격적 존엄이고 표현의 자유, 종교의 자유, 신체의 자 유와 같은 다른 구체적인 권리가 아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즉 “이 구 체적인 권리들이 자기결정권에서 도출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권리들을 묶 어서 자기결정권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즉 실제로 존재하며 효력을 발하는 것은 구체적인 권리들이고 추상적인 자기결정권은 그것들을 포괄해서 지칭하
189) 비슷한 의견을 취하는 제랄드 드워킨의 초기 입장(1972)도 강한 후견주의는 선관념에 대 한 실질적 평가를 수반할 수밖에 없는데 다양한 선관념들에 대한 객관적 가치 평가는 실 질적으로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한 바 있다. Gerald Dworkin, 위의 논문, 29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