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하에서는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의사의 관점에서 구분하여 제시한 로버 트 비취(Robert M. Veatch)의 논의를 소개하고자 한다. 비취는 환자와 관계 맺 는 의사가 어떻게 행위할 수 있는가의 관점에서 네 가지 모델을 제시하고 있 다.275)
첫째, ‘기술자 모델(the engineering model)’이다. 이 모델은 “기술자가 기계를 조작 가능한 대상으로 여기듯이 의사는 환자를 생명연장, 행동 통제, 유전자 조작, 장기 이식이 가능한 대상으로 여긴다.”는 점에 착안하여 의사와 환자의 관계 모형을 설정한다. 따라서 이 기술자 모델에 따르면 의료행위에서 인공임신중절, 안락사 등이 가치문제를 야기하더라도 그러한 가치 요소들에 대한 내용적 판단은 배제하고 환자의 의사에 따라 행위 한다.
둘째, ‘성직자 모델(the priestly model)’이다. 이 모델에 의하면 의사와 환자의 관계는 성직자와 신도의 관계와 유사하다. 즉 “성직자는 항상 연약하 고 미숙한 신자들을 유익한 길로 인도해야 하며, 신자들은 성직자들의 인도에 순종해야 하듯이, 이러한 역할의 의사는 전문적인 지식과 경험이 부족한 환자 를 위해 의료에 관련된 모든 결정을 대신 내리는” 방식으로 설계된다. 이때 의 의사의 대리 판단은 선행의 원리에 의해 근거 지워지며 의사결정의 주체로 서 환자를 위한 최선의 이익을 대신하여 판단한다. 전통적인 의료 후견주의 입장으로 볼 수 있다.
셋째, ‘협조자 모델(the collegial model)’이다. 이 모델은 “의사와 환자 는 환자의 질병을 치유하고 건강을 증진한다는 공동의 목표를 가지며, 이러한 공통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의사와 환자는 협력 관계에 있다”고 본다. 즉 이 모델은 의사와 환자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상호 동등한 입장을 전제한다. 앞서 성직자 모델의 의사가 온건하지만 결정의 주체로서 전면에 나서는 권위적인 후견적 개입 방식을 택하는데 비해, 협조자 모델은 의료결정 과정에 의사와 275) R. M. Veatch, "Models for Ethical Medicine in a Revolutional Age", T. A. Mapps & J.
S. Zembaty, Biomedical Ethics, MCGraw-Hill, 1996, 55-58면: 류재한·목광수, “생명의료윤 리에서의 자율성에 대한 재조명: 다형적 모델을 중심으로”, 「학제적 생명윤리학에서 자 율성 존중의 이념과 실제」,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심포지움, 2013, 42-45면에 서 재인용.
환자의 협력이 요구되지만 최종적 결정 주체는 환자에게 둔다는 점에서 중요 한 차이가 있다.
넷째, ‘계약자 모델(the contractual model)’이다. 이 모델은 “환자에게 제공하는 의학적 대처는 일종의 서비스와 같기 때문에 의료 서비스는 의사와 환자의 계약으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의사와 환자는 당사 자 간 의료계약에 근거한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표준적인 자유주의적 개인주 의 관념에 의하면 대체로 계약자 모델을 취한다고 볼 수 있다.
위에서 소개한 모델들을 의사의 관점에서 볼 때 각 모델은 사안에 따라 중 첩되거나 구별될 수 있다. 위의 네 가지 모형 중에서 필자가 제안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은 세 번째 협조자 모델에 가장 가까울 것으로 생각된다. 의사와 환 자는 상호 협력 관계에 있으며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최종적인 결정권은 환자에게 있다고 보아야 한다. 다만 치료와 관련한 제반 사정을 설명하는 과 정에서 의사가 어떠한 방식으로 환자에게 정보를 제공하는지는 의료적 의사결 정과정에서 중요한 질적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아울러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은 반드시 의사와 환자 쌍방 간의 문제로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의사와 환자 양측을 지원할 수 있는 공적 지원 방식이 개발될 필요가 있다. 이때의 공적 지원 방식 역시 선행의 원리를 통한 후견적 판단의 형태가 아니라 최종적으로 환자 스스로 결정을 내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자율성 역량의 증진을 목표로 접근되어야 한다.
제 3 절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자율성 역량 모델의 의의
자율성 역량 모델을 시작하면서 필자는 자율성 역량 개념과 자율성 능력 개념을 구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은 두 개념이 별개의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 아니라 자율성 능력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복합적 요인들을 함께 고려 하는 보다 넓은 의미의 자율성 역량 개념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그리고 필자 의 비판에 따르면 자율성 능력 모델은 자율성 담론을 자기결정권의 배타적인 처분권으로 그 범위를 축소시켜버리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자율성 논의 는 구체적인 사안에서 실질적인 자기결정권의 행사를 담보할 수 없다. 반면에 자율성 역량 모델은 개인의 자율성 역량을 향상시키고 장애요소들을 제거하는 보다 적극적인 공적 개입을 통해 자기결정권의 실질적 보장 방안에 주목한다.
더욱이 우리나라의 자율성 내지 권리 담론은 오랜 시간 동안의 시민들의 투쟁을 통해 획득된 것이 아니라 주로 학계를 통해 외국의 논의들을 들여와 전개되다 보니 현실과 괴리된 채 추상적으로 논의되는 측면이 없지 않다. 개 인의 자율성 역량과 권리 신장은 현대 시민사회의 중요한 덕목이라고 볼 때, 이러한 덕목이 형식적인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제 개인 의식 및 공동체 문화 속에 자리 잡도록 해야한다. 이런 배경에서 프라이버시권으로 이해되는 자율 성 능력 모델은 자율성에 대한 담론을 시작하는 현재 상황에서 급진적으로 해 석될 여지마저 있다.
필자가 제안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은 자율성에 대한 자유권적 담론과 사회 권적 담론을 연결하는 사다리 역할을 할 수 있다. 우리 사회에 자율성 논의가 제대로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그것의 주장 이전에 자율성의 실행을 가능하게 하는 사회적·환경적 측면의 고려가 선행될 필요가 있다. 개인의 역량 향상 없이는 개인이 어떠한 선택을 내리고 책임을 지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이런 차원에서 자율성 역량 모델은 자율성 논의를 위한 기초 작업 으로서 중요한 기능을 담당한다.
한편 자율성 담론을 재구성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반드시 개인적 자율성에 만 천착할 필요는 없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가족 공동체성이 강한 편이다.
오늘날 핵가족화와 근대화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습이 많이 변화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가족 문화의 강조는 서구의 문화보다 훨씬 중요하게 고려된다. 개인 간의 관계를 권리 의무관계로 읽어내는 근대법은 권리의 주체와 권리의 보호 영역 내의 행위와 권리자가 속해있는 공동체의 심사나 평가 이해로부터 단절 시키는 전략을 취함으로써 권리자를 보호한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권리자 를 보호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권리를 행사하는 사람의 이야기, 내면적 동기, 이유, 필요에 대한 논의를 누락시키게 된다.276) 권리를 행사하는 구체적인 이 유와 권리 부여를 연결시키지 않는 자유주의 권리담론은 분명 인간의 자유를 확대시키고 심화시키는데 기여한바 있더라도 대부분의 행위를 위한 결정에서 의 도덕적 의미를 놓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러한 배경 하에 자율성 및 자기결정권의 새로운 구성은 그동안 상대적으 로 관심을 두지 않아왔던 부분들에 주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다. 이 런 점에서 ‘후원적 자율성(supported autonomy)’ 개념은 새로운 시도이다.
개인의 삶에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개인에게 최종적인 선택권한을 주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도, 사회는 개인이 자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조성 할 의무가 있다. 개인의 선택과 책임의 몫을 벗어나는 기본적 생존의 문제들 에 대한 보장은 사회적 차원의 책무이다. 자율성과 역량 이론을 교량하는 자 율성 역량 모델이 자율성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는 지점에서 유용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276) R. West, “The Supreme Court 1989 Term, Foreword: Taking Freedom seriously”, Harvard Law Review 43, 1990, 81면.
제5장 자율성 역량 모델의 법적 적용: 연명의료 결정을 중심으로
제 1 절 삶의 말기 의료적 의사결정으로서 연명의료 결정
현대 의학 기술의 발달은 인간이 숙명으로 받아들여 온 질병의 문제로부 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발견하고 그 영역을 확대해 오고 있다. 특히 인공호 흡기 등과 같은 생명연장 기술은 과거라면 이미 죽었을 사람의 생명을 인위적 으로 연장시키는 것까지도 가능하게 한다. 현대인들에게 의료적 의사결정은 마치 시장에서 다양한 물건들을 서로 비교해서 고르는 것과도 같이 일상적인 행위로 자리 잡은 듯하다. 심지어 생명의 탄생을 기다리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장소로서 본래 삶의 터전인 집보다도 병원을 더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현상 만 보아도 이제 의료는 현대인에게 삶의 일부가 된듯하다. 이러한 의료적 의 사결정이 일상화되고 크고 작은 의료적 결정의 빈도가 증가하였다 하더라도 매 순간 결정을 내려야하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결정을 위한 혹은 결정에 따르 는 부담이 함께 줄었다고 볼 수는 없다. 오히려 의료적 의사결정을 내려야 하 는 영역이 확대되는 것은 그저 자연스럽게 결과를 받아들이는 경우보다 훨씬 더 환자에게 선택 노이로제 상황을 좌초할 수 있다.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서 오는 긴장과 부담을 해소할 수 있는 방법의 개발은 매우 필요하며 이러한 측 면에서 자율성 역량 모델은 그 하나의 시도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본 장에서 자율성 역량 모델을 연명의료 결정 문제에 적용해보고 자 한다. 연명의료 결정은 인위적인 생명연장장치를 중단하거나 유보할 것인 가에 대한 환자의 결정이 허용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다투는 것이므로 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통상적인 의료적 의사결정과는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자율성 역 량 모델이 의료적 의사결정의 문제를 바라보는 관점은 단지 의학적 관점에 제 한되지 않으며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 직면한 환자의 전반적인 삶의 복지적 측면을 함께 고려할 것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연명의료중단 사안에 자율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