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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관계적 자율성 이론 검토

2. 약한 실질론: 정서능력 모델

약한 실질적 자율성론으로 분류되는 접근법들은 주로 절차적 이론들의 내 용 중립성 요청을 거부한다. 그러나 강한 실질론처럼 직접적으로 가치 평가의 문제로 넘어가기 보다는 비판적 숙고라는 절차적 고려 이외에 필수적인 조건 103)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17면. 그러나 자기실현을 위한

잠재적인 연관 기술을 연마하는 것에 사회적 개입이 투입된다면, 결국은 개인의 자기실현 에 직접적인 관여는 하지 않지만 간접적인 방식으로 개입을 허용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런 측면에서 마이어스가 절차적 이론가로 명확히 분류될 수 있는가에 의문을 가진다. 더 욱이 그녀는 비판적 숙고에 필요한 인지능력 기술들 이외에, 내성 성향과 상상력, 정서적 측면들을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Diana T. Meyers, “Feminism and Women’s Autonomy: The Challenge of Female Genital Cutting”, Metaphilosophy 31, 2001, 480-485면.

104) 마이어스는 억압된 사회화에 구속된 여성들의 예를 드는데 이러한 여성들도 자신의 욕 망에 비추어 원하는 바를 결정하는 능력 혹은 특정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결정하는 능력 등의 일시적 자율성을 지닐 수 있다. 나아가 자신의 삶의 특정 부분에서의 결정들, 예컨대 배우자를 선택하는 능력 등의 단기적 전망의 자율성도 지닐 수 있다. 그러 나 중요한 삶의 문제들 가령 어머니가 될 것인가 커리어에 헌신할 것인가와 같은 선택에 서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결정하는 능력 등은 장기적 전망의 자율성을 요구하는데, 억압된 사회화에 구속된 여성들은 이러한 결정에서는 제약받거나 타협해버리는 경향이 있다.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18면.

들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 필자는 이들이 추가하고자 하는 조건이 핵 심적으로 정서능력과 관련된 조건이라고 파악한다.

폴 벤슨(Paul Benson)의 입장은 초기와 후기로 구분될 수 있는데 초기에는 강한 실질적 이론을 주장하였지만 최근 연구105)에서는 보다 완화된 형태의 실 질론을 제시하고 있다.106) 그녀는 “절차적 이론에 따라 자율성을 고려하게 되 면 개인에게 일종의 자존감(sense of self-worth)의 결여로 인한 자율성 능력의 저하를 보여줄 수 없다”고 지적한다. 이때의 자존감이란 “행동할 가치가 있 다는 느낌(a sense of worthiness to act)이나 규범적 고려에서 스스로를 자신 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을 말한다.107) 필자는 이러 한 자존감이 일종의 정서능력에 해당하며 절차적 자율성론에서 고려하는 인지 능력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서 인지능력의 발휘를 위해 필수적인 조건으로 이해한다.

유사하게 로빈 딜론(Robin Dillon)과 트루디 고비어(Trudy Govier)도 ‘자기 존중’과 ‘자기 신뢰’를 자율성의 필수적 조건으로 주장 한다.108) 고비어는

“신뢰란 오직 비판에 직면하여 스스로의 기본적인 능력과 가치를 유지할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한 것으로서 다시 말해서 우리가 스스로 책임질 수 있기 위 해서는 우리의 결정능력을 신뢰 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109) 그 녀는 강간이나 근친상간의 피해 여성들이 성적 폭력을 경험한 이후 스스로를 비난하며 자신을 비하하고 스스로의 능력이나 판단에 자신 없어 하는 경향을 보인다는 사례를 들면서, 이러한 자기신뢰의 부족이나 스스로의 능력에 대한 자신감 결여 등은 자율성을 위한 숙고 능력을 손상시킬 수 있음을 지적한 105) Paul Benson, “Free Agency and Self-Worth”, Journal of Philosophy 91, 1994.

106) 그녀는 Gaslight의 여성주의적 리메이크작을 상상해 볼 것을 제안한다. 여성 주인공은 자신에 대한 인식에서 심각한 변화를 경험 한 후 무력감과 방향감각의 상실 상태에 빠진 다. 외과의사인 남편은 흥분을 잘하고 활발한 상상력과 강한 열정을 가지며 자주 감정을 폭발시키는 여성들을 일종의 정신적 질환으로 고통 받는 환자로 간주한다. 자신의 아내 역시 ‘히스테릭’이라는 표준적 진단을 내린다. 사회적으로 동시에 과학적으로 승인된 이유들에 근거해서 미치거나 아픈 상태라는 낙인은 그녀의 자신감을 저하시키고 저항할 수 없게 만든다. Paul Benson, 위의 논문, 656면.

107)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20-21면.

108)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21면; Robin Dillon, “Toward a Feminist Conception of Self-Respect”, Hypatia 7, 1992; Trudy Govier, “Self-trust, Autonomy and Self-Esteem,” Hypatia 8, 1993.

109) Trudy Govier, 위의 논문, 103-104면.

다.110)

캐롤린 맥리오드(Carolyn McLeod)는 자율성 손상 효과의 한 측면으로 행위 주체의 자기신뢰에 대한 영향을 의료적 맥락에서 분석한다. 수잔 셔윈(Susan Sherwin)과의 공동 논문111)에서 자기신뢰에 대한 세 가지 개념을 발전시키는데 첫째, 효과적으로 선택하고 결정하는 능력에 대한 신뢰, 둘째, 자신이 내리는 결정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한 신뢰, 셋째, 자신의 판단에 대한 신 뢰이다. 이들은 억압적인 사회화로 인해 환자의 자기 불신이 자율적인 보건 의료적 선택을 내리는 능력을 손상시키는 다양한 사례들을 고려함으로써 자율 성의 손상, 억압, 자기 불신 사이의 연관들을 짚어낸다.112)

자기신뢰나 자기존중감 이외에 정서적 자기관련 태도를 통해 설명하기도 하는데, 이때 자기관련 태도란 자기에 대한 자기해석과 동시에 타인 해석의 차원의 상호 복합적 상태를 의미한다. 벤슨은 자율적 주체는 스스로를 자신의 행동에 대해 책임질 수 있음에서 자율적 권한을 가지며113) 맥캔지도 유사하게 자기지배 상태란 자신의 결정에 대한 규범적 권위를 가지며 이는 스스로 자신 을 정당한 원천으로 인정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가지는가는 오직 간주관적인 승인 관계에서만 유지될 수 있다 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관계적이라는 것이다.114) 한편 안드레아 웨스트런드 (Andrea Westlund)는 자율성은 비판적 숙고의 절차적 고려에 있다기보다 외부 의 비판적인 관점들에 대해 대응할 수 있는 행위주체의 성향(disposition)의 문 제로 이해한다.115)

110) Trudy Govier, 위의 논문, 101면.

111) Carolyn McLeod·Susan Sherwin, “Relational Autonomy, Self-Trust, and Health Care for Patients Who Are Oppressed”,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 73), 259-279면.

112) 맥리오드는 다른 문헌에서 임신 6주 만에 유산한 여성의 사례를 들어, 다른 사람들의 공

감부족 태도가 그녀의 감정 특히 능력에 대한 자신감, 자존감, 자기신뢰감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손상시키는 가를 설명한다. Carolyn McLeod, Self-Trust and Reproductive Autonomy, MA: MIT Press, 2002. 53면. 아울러 그녀는 자기신뢰를 인지능력 뿐 아니라 도덕적 인테그 리티(integrity)에 대한 긍정적 태도에 핵심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위의 책, 6면.

113) Paul Benson, “Taking Ownership. Authority and Voice in Autonomous Agency”, Joel Anderson·John Christman (ed.), Autonomy and the Challenges of Liberalism: New Essays,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5.

114) Catriona Mackenzie, “Relational Autonomy, Normative Authority and Perfectionism”, Journal of Social Philosophy 39, 2008, 512-533면.

이렇게 다양한 정서능력 모델은 공통적으로 비판적 숙고에서의 인지능력이 제대로 발휘되기 위해서는 자기존중감, 신뢰, 자신에 대한 태도, 행위주체의 성향 등과 같은 정서능력이 필수적으로 고려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 러한 정서능력은 본질적으로 간주관성을 가지기 때문에 관계적 속성을 가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