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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자율성 능력 모델 관점에서 자율성 이론 검토

1. 전통적 자율성 이론 검토

전통적인 자율성 이론은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와 존 스튜어트 밀 (John Stuart Mill)의 자율성론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두 철학자의 자율성 이론 은 자율성 능력 모델의 철학적 원형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칸트의 이론에서 윤리적 인격성은 오늘날 자기결정권의 정당화에서, 밀의 자유론에서 제시된 해악원리는 자기결정권 행사와 그 한계 문제에서 여전히 영향력을 가진다. 이 하에서는 이 두 부분을 중심으로 검토한다.

칸트의 자율성은 일종의 도덕적 행위 가능성의 문제로서 개인적인 상황이 나 경험, 주관적 선호와는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보편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 법칙에 따라 자신의 행위준칙을 세우고 그에 따르는 ‘자기입법성’을 의미한 다. 따라서 자기입법성으로서의 자율성은 애초에 인간의 실천이성54)의 발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스스로 보편적인 도덕법칙을 세우고 그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인간의 능력은 오로지 이성 능력으로서55) 도덕법칙의 자기부여라는 54) 이때 ‘실천이성’은 현대적 의미에서의 실천이성과는 구분된다. 오늘날 실천이성은 행위

주체의 동기나 결과가치들을 배제하지 않는 이성 능력인 반면에, 칸트의 실천이성은 선의 지로부터 추동되며 결과에 상관없이 이성에 따라 오로지 옳다는 이유에서 행위를 결정하 는 것을 의미한다. 결과에 상관없이 무조건 옳다는 이유에서 ‘무제약적인’ 선의지는 절 대선의 의욕이며, 행위 주체의 구체적 행위 동기나 행동에 따른 결과로 평가될 수 있는 내용을 가지지 않는 오로지 이성에 따라 옳은 행위를 하고자 하는 의욕(意慾) 그 자체를 의미한다. Immanuel Kant, 이원봉 역,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 책세상, 2005, 27면.

55) 인간은 감성적 존재이자 이성적 존재이며 경험적 능력과 더불어 선험적 능력을 가진다.

칸트의 표현을 빌리면 “감성계에 속하면서도 지성계에 속하는” 인간은 도덕적 자율성을 통해 이성적 존재로서 계몽(啓蒙, Aufklärung)된다. 즉 인간은 동물적·본능적 존재로 태어 나지만 살아가면서 인간화 과정을 거쳐 도덕적·이성적 존재로 만들어져간다. 칸트는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에서 계몽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 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칸트에게서 미성년 상태란 다른 사람의 지도

성격을 가지므로 ‘자율성 능력 모델’이 의미하는 의사결정능력보다 극도로 제한된 의미를 가진다. 오늘날 자율성 이론가들도 이렇게 엄격한 칸트의 도덕 적 자율성 개념에 더 이상 근거하지 않는다. 다만 칸트의 실천이성을 통해 표 상되는 자율적 주체로서 윤리적 인격성 관념은 비록 형식적인 합법칙성이지만 그래서 보편적일 수 있는 인간 존엄의 규범적 토대를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자 율성 능력 모델의 정당화에 연관된다. 사실 자율성 능력 모델이 전제하는 평 등에의 신념은 각 개인이 독립된 윤리적 인격이라는 점을 동등하게 존중하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56)

그러나 이러한 칸트의 윤리적 인격성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실천적 한계 이다. 칸트의 윤리적 인격성은 현실과의 엄격한 분리를 통해 보편성을 획득하 고 도덕의 확실성 나아가 인간 존엄의 당위적 근거를 마련하였지만,57) 고도의 추상성은 경험적 차원에서 문제되는 자기결정권의 구체적인 행사 혹은 결정의 내용과 관련된 논의 자체를 포괄할 수 없게 만든다. 윤리적 인격성은 오직 자 기결정권의 형식적 보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결국 실천적 논의로의 진행 은 제약을 받는다.

둘째, 상호주관성의 제약이다. 칸트의 도덕적 자율성론에서 주체의 이성적 본성은 자기창조의 능력으로까지 승격되는데 이 과정에서 인간의 ‘비사회적 사회성(ungesellige Geselligkeit)’58)이 인류의 소질을 계발시키는 중요한 수단

없이는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를 의미하며 미성년 상태의 책임을 마땅히 스 스로 져야 하는 것은 그것이 이성의 결핍에 의해 초래되는 것이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지 도 없이도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의 결핍에서 초래되는 경우이다. 따라서

“너 자신의 이성을 사용할 용기를 가져라!”라고 말한다. Immanuel Kant,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2009.

56) 칸트의 윤리적 인격성을 자유주의적 법치국가의 규범성으로 해석하여, 동등한 존중과 배 려라는 공준을 제시하는 대표적인 견해로는 Ronald Dworkin, Sovereign Virtue, Harvard University Press, 2000: 염수균 역, 「자유주의적 평등」, 한길사, 2005. 칸트의 실천철학 기획을 인격에 대한 존중 원칙으로 집약하는 견해로는 Stanley L. Benn, “The Principle of Respect for Person”, A Theory of Freedom, 1988, 103면.

57) 임미원 교수는 “칸트의 형식적인 보편법칙 역시 개인이 자신의 행위준칙이 보편법칙이 될 수 있는가를 따져보지 않아서 부도덕한 행위가 된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현실 상황이 너무나 복합하고 다층적이어서 그런 보편성 기준에 맞춰볼 여지가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 이 더 상식적일 수 있다”고 지적한다. 임미원, “선의지와 정언명령”, 「한국법철학회 2001년도 추계학술대회 자료집」, 70면.

58) 타인들과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려고 하면서도 타인들에 대립해서 자신의 의도대로만 행 동하려는 소질을 의미한다. 칸트, 위의 책(주54), 194면.

이라고 본다. 칸트가 생각하는 상호주관성은 인간의 협력이기보다는 경쟁에 가깝고, 칸트가 그리는 목적의 왕국은 고립된 자율적 존재들의 이합집산일 뿐 이다. 이렇게 이성적 존재들의 초월적이고 자기 독백적인 자기완성 능력만으 로는 공동체 안의 갈등과 반목, 봉합과 조화의 다이내믹을 결코 설명해 낼 수 없다.59)

밀의 자율성론60)은 정치·경제 공동체 안에서 타인과의 관계를 인정하면서 도 타인에게 방해받지 않는 독립된 개인의 고유성을 보호하는 문제에 주목한 다는 점에서 칸트의 자율성론의 초월적 보편성 및 자기 독백성을 극복한다.

밀은 인간은 동물적인 본능과 달리 고양된 본성(faculties)을 가지며 일단 그것 을 자각한 후에는 그 본성을 충족시키지 않고는 행복할 수 없다61)고 보는데 이러한 ‘개별성의 개발(development of individuality)’62)이 곧 자율성을 의미 한다. 이러한 자율성은 인간성의 완성이라는 본질적 가치이며63) 동시에 개성 의 발현을 통한 사회적 효용의 증가라는 수단적 가치를 가진다.

밀의 이러한 설명을 자율성의 정당화라는 측면에서 두 가지로 구분해 볼 59) 특히 칸트의 추상적인 윤리적 인격성이나 목적 원리로는 친구나 가족 관계의 강한 유대

감을 설명할 수 없다. 우리가 타인에 대해 느끼는 감정의 강도는 바로 우리의 인격적

‘관계’에 의존한다. David Daiches Raphael, Moral Philosophy, Oxford Univeristy Press, 1981: 김영철·김우영 역, 「현대도덕철학」, 서광사, 1987, 124면.

60) 밀의 자율성론은 그의 저서「자유론」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밀은 정작 자율성이란 말을 사용한 적이 없으며 다른 문헌을 통해 이 책의 중요한 원칙이 개인의 자 율성에 대한 원칙임을 밝힌 바 있다. “Letter to Emile Acollas”, in The Later Letters, Collected Works XVII: 1831~1831.

61) John S. Mill, Utilitarianism, in Everyman’s Library edition (1993), 8면.

62) John S. Mill, 위의 책, 125면. 이때 ‘개별성(individuality)’이란 저마다 개인에게 독특한 개성을 의미하며 이러한 각자의 내면적 힘의 발전을 자율성의 성취로 이해한다. 이러한 개별성의 개발은 밀이 인간 본성을 나무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것으로 잘 표현된다. “인 간 본성은 주어진 일을 정확하게 해내도록 모형에 따라 설계된 기계가 아니라, 자신을 생 명체로 만드는 내면적 힘의 성향에 따라 모든 방향으로 발달하고 성장하는 나무와 같 다.” John S. Mill, On Liberty, in Everyman’s Library edition (1993), 1859, 127면.

63) 개별성의 개발이 본질적이라는 생각은 칸트의 이성의 계발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칸트 에게서 이성의 계발은 개인적 차원이 아닌 유(類)적 차원을 가진다. 칸트에게서 이성의 완 전한 계발은 오랜 기간을 필요로 하며 한 개인의 일생 동안 그것에 도달하기 어려운 것으 로 이해된다. 비록 개인이 그 잠재력을 가지지만 최고의 도덕적 선은 그 자신의 도덕적 완성을 지향하는 개인의 노력에 의해서 성취될 수는 없다. 최고의 도덕적 선은 그런 개인 들이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는 전체로 통합되어야 하며 그런 통합 속에서만 최고의 도덕적 선은 성취될 수 있다. Immanuel Kant, "Die Religion innerhalb der Grenzen der blossen Vernunft", Kants Werke VI, hrsg. E. Cassirer, 214면: 이한구 편역, 「칸트의 역사철학」, 서광사, 2009, 189면에서 재인용.

수 있다. 첫째, 개별성의 개발에 본질적 가치를 부여함으로서 자율성의 권리를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당화방식은 자율성 능력 모델의 표준적인 규범적 이해와도 맞닿아 있다. 즉 개인은 자기 자신에 대해 자신의 육체와 정신의 주 권자라는 점이다. 둘째, 자율성은 개인의 행복 혹은 복리(well-being)의 증대라 는 결과론적 측면에서 정당화된다. 밀은 자율성 개념을 경험적 토대 위에서 개인의 욕구, 성향, 생활양식 등의 표현 그 자체로 이해하며, 숙고, 판단, 지식, 개인적 경험, 선택의 결과 등에 의해 지속적으로 발달해나가는 과정에서 발휘 되는 것으로 이해한다.64) 그리고 이러한 개인의 자율성을 보호하는 것이 결국 장기적으로 사회 전체의 효용을 증진한다는 공리주의 사상과 접목시킨다.65)

밀의 자유의 원칙은 다음과 같다.66)

(i) 자유의 원칙(the liberty principle): 자기 관련 행위의 자유, 자기 인생 설계에 따라 행동할 자유 는 보호되어야 한다.

(ii) 단서조항(the harm principle): 자기의 행동으로 인해 직접적이고 명백한 해(harm)가 타인에게 미치지 않는 한 자유의 원칙은 보호된다.

(iii) 예외조항: 자유의 원칙은 성인과 문명사회의 성원에게만 적용된다. (어린이나 야만인은 예외)

이렇게 타인에게 미치는 해악을 기준으로 자유를 제한하는 밀의 논의는 자 유의 가치를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재해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러한 밀의 시도는 의무론적 자유주의 진영 내에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특히 자율에 기초한 주장과 결과론적 주장을 혼합하는 밀의 시도는 정면으로 반박 되기도 하는데,67) 자기에 대한 해악을 발생시키는 행위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 가를 두고 벌어지는 후견주의 논쟁은 여전히 오늘날에도 뜨거운 이슈이다.68)

해악원리는 개인의 자율성 행사의 한계를 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활용될

64) John S. Mill, 위의 책(61), 144.

65) Richard Arneson, “Paternalism”, Crig, E. (ed.), Routledge Encyclopedia of Philosophy 7, Routledge, 1998, 250-252면.

66) Mill, J. S., 위의 책(주62), 13면. 참고로 밀은 자유의 개념을 지성의 자유와 행위의 자유로 구분하고, 다시 행위의 자유를 ‘자기관련 행위(self-regarding action)’와 ‘타인관련 행 위(other-regarding action)’로 구분한다.

67) 대표적으로 Ronald Dworkin, “What is Equality? Part I: Equality of Welfare”, Philosophy and Public Affairs 10, 1981a, 185-246면.

68) 오늘날 자유주의에서는 개인의 선택 내용에 대한 중립 여부를 두고 연성 후견주의(Soft paternalism)와 경성 후견주의(Hard paternalism)로 양분된다. 이러한 후견주의 논쟁은 후술 하도록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