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자율성 역량 모델의 관점에서 본 동 법률의 의의
2. 자율성 역량 모델의 관점에서 본 연명의료계획서의 의의
연명의료계획서는 사전연명의료지향서가 환자 본인이 직접적이고 자발적 인 결정을 핵심으로 하는 것과 달리, 환자 본인 뿐 아니라 가족과 협의한 후 결정된 구체적 계획에 대한 의사의 의료적 결정으로서 사전의료지시제도보다 덜 표준화되고 더 융통성 있는 의사소통적 접근법의 일종이다. 이 제도는 미 국의 Physicians Orders for Life-Sustaining Treatment(POLST)를 모델로 하고 있는데 작성의 주체가 환자 본인이 아닌 의사의 지시라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 가 있다. 미국에서 POLST는 1990년대 초반 오레곤(Oregon) 주에서 사전의료 지시의 한계를 극복하여 임종기 돌봄을 향상시키기 위해 처음 개발되었고 최 초의 양식은 1995년 시행되었다. 현재 캘리포니아, 콜로라도, 하와이, 아이다 호, 루이지애나, 매릴랜드, 뉴욕, 뉴저지, 노스 캐롤라이나, 오레곤, 테네시, 유 타, 버몬트, 워싱턴, 웨스트 버지니아 등의 주에서 시행되고 있으며 점차 시행 하는 주가 증가하는 추세이다.325)
동법이 정하는 연명의료계획서는 미국의 POLST 제도와는 몇 가지 점에서 핵심적인 차이점을 가진다. 우선, 환자의 의사결정능력을 전제로 하고 있으며 환자의 의사결정능력이 없을 때 미국과 같이 대리인 지정 제도를 도입하지 않 고 가족 2인의 진술에 의존하도록 하고 있다. 또한 본 제도는 사실상 말기환 자와 가족이 담당의사에게 연명의료계획서의 작성을 요청할 때에 한하여 담당 의사가 질병상태와 치료방법을 설명하도록 하는 소극적 방식으로 설계되어 있 다. 따라서 담당의사가 말기환자에게 더 이상 적극적인 치료가 무의미할 때 그러한 질병상태 및 예후를 설명하여 환자로 하여금 연명의료결정 등을 수행 할 수 있도록 돕는 적극적인 법적 의무를 가지지 않는다. 이러한 규정은 김재 원안326) 제8조를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서 미국의 환자자기결정법(Patient Self-Determination Act)에서 치료거부권을 명기하고 의료기관으로 하여금 말
325) 미국에서는 연방정부 차원에서 National Paradigm Task Force가 각주의 POLST 프로그 램을 보증하고 있으며 위의 주에서 모두 POST T>F의 보증을 받았다. 연세대학교 의료법 윤리연구원, 「연명의료 환자결정권 제도화 관련 인프라 구축방안」, 2013, 23-24면:
POLST 관련 안내는 http://POLST.org
326) 2015년 7월 7일 김재원 의원 등 10인에 의해 ‘호스피스·완화의료의 이용 및 임종과 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안’을 발의하였다.
기환자와의 적극적인 소통 의무를 명기한 미국의 경우보다 훨씬 소극적이 다.327) 따라서 환자가 더 이상 치료효과가 없어 말기에 처하였을 때 의료인의 설명의무를 포함하여 의료 기관에 어떠한 법적 의무도 부과하지 않고 있기 때 문에 연명의료의 중단결정은 전적으로 품위 있는 죽음에 대한 환자와 가족의 의지에 좌우된다.328)
이러한 우리의 연명의료계획서 제도는 한국의 가족 중심적 의사결정 모델 의 특징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가족 간에도 이해관계의 상충이 발생하거나 무연고자의 경우 보호받을 수 있는 방법이 보완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이러한 연명의료계획서는 환자의 상태에 대해 의료진이 환자와 적절한 방법으로 신중하게 논의하는 문화의 정착과 함께 비로소 가능하다. 이런 측면 에서 의료진의 의사소통 방법에 대한 교육, 환자들의 이해와 결정을 돕는 상 담 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과 달리 연명의료계획서는 몇 가지 장점을 가진다. 첫 째, 사전연명의료의향서가 건강한 상태에서 자신의 질병 등에 대한 상황을 예 측하여 가정적으로 내리는 숙고인 반면에, 연명의료계획서는 임종기 및 임종 이 예견되는 시점에서 작성되는 것이므로 현 상황에 적합한 의사결정이라는 점에서 환자의 구체적인 의사를 반영할 수 있다. 둘째, 연명의료계획서는 구 체적인 질병 상황 및 환자의 예후에 대하여 환자와 의사가 상의하는 과정을 필수로 전제하기 때문에 이 과정에서 환자는 의사로부터 질병에 적합한 의료 적 조언을 받을 수 있다. 셋째, 연명의료계획서는 특정 치료를 받을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기 보다는 환자의 임종기 돌봄의 질을 확보하기 위한 내용을 주 로 다룰 수 있다.
결론적으로 연명의료계획서는 현재 당면한 임종기 시점에서 환자가 어떠 한 임종기 돌봄을 받을 수 있는가에 초점이 맞추어 지다보니, 사전연명의료의
327) 서이종,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에서의 호스피스·완화의 료의 쟁점과 향후과제”, 「2016 호스피스완화의료 관련 법률 공포 후 대 토론회 자료 집」, 14-15면.
328) 담당의사가 환자의 상태에 대해 고지해야 한다는 점을 법률상 의무로 두지 않은 것은
의료인에 대한 우리사회의 불신, 의료인이 최선의 치료를 다하지 않으려고 연명의료계획 서 작성을 먼저 유도한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그 이유를 들기도 한다. 최경석, 위의 발표문, 5면.
향서가 장기적인 관점에서 자신의 죽음의 과정을 상상하여 의사를 표명하는 의사결정의 부분은 달성될 수 없다.
필자가 제안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은 본질적으로 의료적 의사결정이 환자 만의 이성적 숙고를 통한 판단에 의존할 수 없다는 인식에서 시작되었다. 질 병으로 인한 신체적, 심리적 취약성을 가진 환자는 어떠한 치료를 받을지 말 지를 결정하는데 있어서 냉정한 판단자가 되기 어렵다. 더욱이 전문적인 의학 지식 및 경험을 필수로 하는 의료에 있어서 환자가 치료와 관련한 모든 정보 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필요할 수 있다. 결국 환자의 의사 결정은 환자에게 구체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의료진, 가족 등의 보호자가 함 께 소통하여 내리는 것이 적합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다만 연명의료계획서의 작성주체가 담당의사로 단정적으로 표현되고 있는데, 비록 연명의료계획서의 주체가 의사라 하더라도 환자의 최종적 동의나 서명을 통해 의사와 환자 간의 협력에 의한 결정이라는 부분을 강조할 필요가 있겠다.
연명의료계획서 제도의 도입은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을 부여하고 결정 권 한 및 책임을 모두 전가하는 것이 아니라, 의사결정 과정에서 환자의 자율적 의사와 돌봄의 질 문제를 동시에 고려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융통성을 발휘 할 수 있다. 필자는 이러한 의사결정 모델이 보다 환자의 자율성을 실질적으 로 보장하고 지원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제4절 생의 말기의 의료적 의사결정에서 자율성 역량 모 델의 의의
연명의료 중단 사안에 대한 대법원 판결 이후 기나긴 제도화 논의를 통해 이번에 통과된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은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를 대상으 로 오직 인위적·기계적 방법에 의한 연명의료만을 중단할 수 있다고 정함으 로써 연명의료 중단과 관련한 일단의 논의 범위를 매우 제한적으로 정하고 있 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결과는 연명의료 결정 문제가 급격히 변화하는 의료 현실에도 불구하고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의료적 의사결정 문제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는 점에서 일단 수긍이 간다. 다만 연명의료 결정의 대상과 범 위를 극히 제한하는 입법은 이로서 연명의료 결정의 문제를 종료하는 것이 아 닌 비로소 시작하는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생의 말기 의료적 의사결정의 문제를 논의해야 하는 방 향을 짚어보고자 한다. 환자의 자기결정권의 성격과 범위를 정하는 문제는 환 자의 자기결정 자체만이 아니라 환자의 전반적인 삶의 복지적 측면과 같은 보 다 포괄적인 논의와 연결되어야 한다. 이러한 자율성 논의가 가능하기 위해서 는 환자의 자율성 및 자기결정권에 대하여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이때 두 가지 관점은 필자가 제안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의 핵심이 기도 하다.
첫째, 자율성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변화가능하고 복합적인 역동적 개념 이며 이에 따라 환자의 자율성 및 자기결정권 개념 역시 계속해서 검토와 수 정을 거쳐 시대적 요청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점이다.
둘째, 생의 말기의 의사결정 문제는 죽음을 맞이하는 개인의 가치관뿐만 아니라 개인을 둘러싼 총체적 상황들, 의료 환경, 문화, 제도, 가족, 개인사 등 다양한 요소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연명의료중단에 대한 결정이 환자 스스로의 독립적 결정이었는가는 중요하지만 결코 유일한 고려사항이 아 니라는 점이다.
이러한 두 가지 관점을 취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은 일종의 자유권으로 해 석되는 자기결정권 법리를 사회권적 측면에서 재구성하는 시도라고 말할 수
있다. 개인이 무엇을 선택하고 결정하는가의 문제는 실질적으로 개인이 그러 한 선택을 가능하게 만드는 선택지를 가졌는가, 그러한 선택지에 실제로 접근 할 수 있었는가의 조건들을 필수로 전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서 보다 중요하게 고려해야 할 점들 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의사결정과정에서 합리성을 고려한다고 할 때 이러한 합리성 판단은 ‘상당성(reasonableness)’을 판단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종래의 자율성 능력 모델은 비판적 숙고에서의 주관적 합리성을 중요한 기준으로 삼고 있는데 이러한 주관적 합리성의 확보는 개인이 처한 구체적인 상황이나 맥락에서 독립하여 내려지는 결정만을 전제한다. 아마도 인생에서 중요한 선택들은 모든 사회적 변수들에 휘둘릴 수 있기 때문에 그러한 상황들 로부터 거리를 두고 자유롭게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에서 의사결정의 중요성은 결정자가 어떠한 선택을 내렸는가 그 자체에 있기 보다는 그러한 선택 이후의 실제 이행과 책임의 과정에 더 무게가 실려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선택의 순간 무지의 베일을 덮어놓았더라도 선택의 이행과 책 임에서 다시금 그러한 구체적 상황들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 가 정작 관심을 가져야 할 부분은 개인이 선택을 내리는 상황과 개인에게 허 락된 선택지들에 대해서이다. 자율적 판단의 과정은 그래서 합리성 여부가 아 니라 이러한 종합적인 결과와 상황을 고려한 상당성 판단이 되어야 한다. 삶 의 말기 의료적 의사결정의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고려 없이 내려질 수 없다. 따라서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통한 의사결정의 표명은 그러한 결정에 대한 참작 사유는 될 수 있어도 정당화 사유가 되기에는 부족하다.
둘째, 자기결정권의 성격을 자유권으로만 구성할 경우 개인의 이익에 대한 판단은 논외가 돼버릴 수 있다. 자기결정권을 개인의 자유라는 추상적 고려를 통해서만 해결할 경우, 설사 그러한 판단이 잘못된 길로 이끈다는 느낌을 가 질 수는 있더라도 그에 대한 평가 기준이 없기 때문에 공적인 개입은 불가능 하다. 그러나 인간은 중요한 결정에 있어서 반드시 추상적이고 현실과 동떨어 진 자유만을 기준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결정은 생존의 문제 혹은 행복의 차 원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생존이든 행복이든 그 기준은 자유라는 추상적 의사보다는 실존적 차원의 역량의 차원과 연결된다. 연명의료 결정의 문제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