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계적 자율성이란 용어는 일관되게 단일한 개념으로 환원될 수 없으며 단 지 자율성을 관계적으로 접근하는 모든 시도들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88) 종래의 자율성 논의들이 독립적인 자기결정이나 자기 지 배를 이상으로 하는 근대적 자율성 관념에 뿌리를 두기 때문에 자율성의 고려 에서 관계성은 오히려 주체의 독립성을 위협하는 외부적 요인이거나 이성적 판단능력을 저해하는 방해요소로 치부되곤 하였다. 따라서 자율성 논의에 관 계성을 적극적으로 고려해보려는 시도는 출발부터 종래의 자율성 이론들과 정 면으로 배치된다고 볼 수 있다.
자율성을 관계적으로 고려한다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차원으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 구성적인 관점에서 관계적 고려를 시도하는 것으로서, 가령 자율 88) 관계적 자율성 이론가들도 스스로 관계적 자율성이란 용어를 자율성과 연관된 여러 영역
을 망라하는 일종의 ‘포괄적인 범주 용어(umbrella term)’로 설명한다.
적 주체의 사회적 속성을 밝히거나 자율성 능력이 사회적으로 영향을 받고 구 성된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인과적 관점에서 관계적 고려를 시도하는 것으로서, 관계성을 주체나 자율성 개념 자체의 본성이거나 구성요 소라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규명하기보다는 관계적 요소들이 인간의 본성이나 자율성 능력에 끼치는 인과적 요인들을 밝히는 것을 의미한다.89)
필자는 제1절에서 새로운 자율성 이해의 시도들로서 자율성에 대한 공동체 주의적 접근법과 관계적 접근법 양자를 이미 언급한 바 있다.90) 두 접근법의 공통점은 구성적 자아관념을 통해 자율성의 표준 모델에 반영되어 있는 자유 주의적 개인주의 인간관을 겨냥하여 비판하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두 접근 법에서 공통적으로 시도되는 자유주의적 개인주의의 원자론적 자아관념에 대 한 비판은 중요한 고찰이다.91)
특히 관계적 자율성 논의는 은폐되어 있는 행위주체의 관계적 속성을 드러 내는 방식으로 자율적 주체의 재구성을 시도한다. 비판의 핵심은 종래의 원자 론적 자아관념이 타자와의 분리를 통해 개인의 정체성을 인식하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으며, 결국 이러한 개인주의에 대한 형이상학 적 인식론은 하나의 철학적 가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92) 더 중요하게는
89)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서문 참조.
90) 관계적 자율성 이론의 주요 참고 문헌은 여성주의 윤리학자 캐트리오나 맥캔지(Catriona Mackenzie)와 나탈리 스톨자(Natalie Stoljar)가 공동 편집한 저서 Relational Autonomy – Feminist Perspectives on Autonomy, Agency, and the Social Self에 의존한다.
91) 자유주의적 인간관을 비판하고 공동체주의적 인간관을 제시하는 시도는 정치철학의 중요 한 주제이기도 하다. 특히 공동체주의적 자아관념을 생명의료윤리 맥락에서 자세히 다루 고 있는 국내 연구로는 유수정, “자유주의적 생명윤리에 대한 비판과 공동체주의 접근법 고찰”,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윤리정책협동과정 박사학위 논문, 2016, 제3장 참조.
92) Catriona Mackenzie·Natalie Stoljar (ed.), 위의 책(주73), 5-12면. 이 책의 저자들은 개인 주의라는 용어를 이해하는 네 가지 방식에 따라 개인주의 관념을 소개하고 비판한다. i)행 위주체는 인과적으로 타인과 분리된다. ii)행위주체가 스스로에 대해 인식하는 것은 그가 속한 가족 및 공동체 관계로부터 독립된다. iii)행위주체의 본질적 속성 특히 형이상학적인 정체성은 본래적이며 그가 속한 사회적 관계에 의해서 부분적으로도 구성되지 않는다. iv) 행위주체는 형이상학적으로 분리된 개인이다. 이러한 네 가지 개인주의 관념을 구성적 자 아관념에 기초하여 검토해 보면 개인이 본래적으로 또는 인과적으로 분리되어 있다거나(i), 개인이 속한 공동체와 분리된 자아인식이 있다는 식의 이해(ii, iii)는 애초부터 오류이다.
결국 고려할만한 개인주의는 사회적 관계가 개인의 본질적 속성 임에도 논리적인 이유에 서 인간존재를 사회적 맥락 밖에 가정하는 유형(iv)이며 이것은 곧 공격되어야 할 개인주 의 관념으로 ‘형이상학적 자아관념’에 해당한다. 위의 책, 7-8면의 여성주의의 형이상학 적 비판 부분 참조.
이러한 자아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 태도가 인간의 상호의존성93), 실존적 취 약성 등을 등한시 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계적 자아관념은 협소한 주관성 인식을 구체적 상황 안에서 재구성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관계적 자아관념은 관계적 자율성 논의의 중요한 한 축에 해당하지만 본 논문 에서 본격적으로 다루지 않는다.94)
필자가 관계적 자율성 논의에서 보다 주목하는 점은 의료 영역에서 자율성 능력 모델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가에 있다. 앞서 여러 차례 지적한 대로 의료윤리 상황에서 환자는 질병으로 인해 건강한 삶이 제한된 개인, 신체적 고통과 심리적 불안, 두려움을 수반하는 연약한 개인이다. 개인의 합리적 의사 결정능력만을 기준으로 삼는 자율성 능력 모델은 환자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보다는 의사결정능력이 발휘되는 의사결정 메카니즘에 더 관심을 기울인다.
필자는 관계적 자율성 이론가들은 이러한 의사결정 메카니즘에 대하여 새로운
93) '상호의존성(interdependency)'은 복합적인 의미를 지니는데 일차적으로는 대인관계에서 의 상호의존성을 떠올리게 된다. 개인은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정체성을 형성하고 친밀한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Baumann Holger. “Reconsidering relational autonomy:
Personal autonomy for socially embedded and temporally extended selves”, Analyse und
Kritik 30, 2008, 455면. 그러나 상호의존성은 대인관계를 넘어 제도적 구성, 문화적 유형,
정치적 요소와 같은 다양한 사회적 요소들까지 아우르는 포괄적인 범위로 볼 경우 ‘맥락 적으로 연관됨’을 의미할 수 있다. “타자는 ‘나’에 대비되는 ‘너’만을 한정하지 않 는다. 타자는 외부환경이건 내부적 성격이건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자아와 대비되는 모 든 것을 지칭한다.” 김선희, 「자아와 행위, 관계적 자아의 자율성」, 철학과 현실사, 1998, 15면.
94) 다만 자율적 주체의 재구성과 관련하여 필자의 흥미를 끌었던 두 가지 시도들을 간략히 소개한다. 자아관념을 현상학적으로 설명하는 모델은 자아관념에서 중요하게 고려되는 것 은 자신의 욕망, 믿음, 정동, 가치에 관한 분명한 느낌에서 나오는 ‘자기충실감(a sense of integrity)’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자기충실감은 단순히 물을 마시고 싶다거나 여행을 하는 등의 경험과는 확연히 다른 즉 단순한 원함과는 다른 차원의 경험적 질이며, 형이상 학적 모델은 이러한 차원의 자아감을 설명해내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허라금, “관계 적 자율성에 대한 철학적 연구 –절차적 자율성과 실질적 자율성 논쟁을 중심으로-”,
「철학」 제120집, 2014년 8월, 110-111면. 또 다른 시도로서 역동적인 자아 모델관도 흥 미롭다. 개인의 자아관념에는 객체와 주체라는 두 가지 국면이 공존하는데, 객체란 우리가 자신을 대상화시키거나 외부의 규범을 내면화함으로써 나오는 태도로서 ‘일반화된 타 자’ 내지 ‘조직화된 목적격 나’이며 주체란 ‘주격 나’로서 일반화된 타자를 내면화 하는 동시에 활성화되는 반작용을 의미한다. 이렇게 볼 때 ‘주격 나’는 ‘목적격 나’
와 역동적 상호작용 과정을 겪는다. 이 모델은 독립된 개체 안에도 시간적 추이에 따라 동일한 정체성으로 간주할 수 없는 모종의 ‘타자성’이 존재하며 형이상학적 자아관념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역동적 정체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는 점을 비판한다. 이현재, 「여성주 의적 정체성 개념」, 도서출판 여이연, 2005, 62-70면.
시각을 제시하고 차별화된 논의를 시도하는가에 주목하고자 한다. 본론으로 넘어가기 전 전반적인 문제제기와 관련된 관계적 자율성의 여성주의적 관점을 간단히 언급하도록 한다.
여성주의적 관점이란 본래 하나의 이론적 정향을 가지지 않으며 ‘구체적 인 것과 관련된 변화가능성’을 중심으로 한 다양한 접근법들을 포괄하여 지 칭한다.95) 여성주의자들은 대개 개념이나 이론에 대한 추상적 논의를 지양하 고 구체적인 개별 경험들에 주목한다. 가령 여성주의자들이 구체적 경험을 논 의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서사는 당사자의 구체적 상황을 섬세 하게 인식·공감할 수 있게 한다. 물론 이러한 서사적 기법은 너무 비체계적 인 편이어서 하나의 학적 연구방법으로서 객관성을 확보하기 어렵다. 그러나 여성주의적 관점은 적어도 개념 분석이나 이론의 체계를 구성하는 학적 연구 방식도 실제 사안과 괴리된 형식론에 치우칠 수 있음을 예리하게 비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