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어서 종래의 자율성 능력 모델로부터 자율성 역량 모델로의 전환과도 같은 중요한 계기를 가진다고 평가한다. 이러한 필자의 관점은 성년후견제도의 입 법취지 및 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관련하여 개정전 행위무능력자제도의 문 제점, 개정된 성년후견제도의 차이점 그리고 이러한 변화과정에서의 쟁점들을 중심으로 살펴본다.
(1) 성년후견제도의 도입배경
우리나라는 의료 기술의 발달 등에 힘입어 평균 수명은 점차 늘어나고 있 는 반면 출산율은 매우 낮아지는 고령화 사회로 돌입했으며252) 이러한 변화에 따라 다양한 사회문제들이 대두될 것으로 예측된다. 특히 노인층의 증가와 함 께 치매(癡呆) 내지 인식감퇴증(認識減退症)253)으로 고통 받는 환자수도 급증하 고 있으며 이들에 대한 법적 보호는 점점 시급한 현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우리나라 개정전 민법은 심신상실 상태의, 곧 의사능력을 상실한 자를 금 치산자로, 심신미약이나 낭비자를 한정치산자로 정하고 후견인을 두어 동의를 통해 법률행위를 보호하는 행위무능력자제도를 두었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노 화의 증상으로 서서히 판단능력을 상실해 가는 고령자나 인식감퇴 초기증상의 환자들은 경미한 판단능력의 부족상태로 행위무능력자제도의 두 유형에 속한 다고 보기 어려워 법적 보호 조치를 받을 수 없었다.254) 다가올 고령화 사회에 대비해 종전의 행위무능력자제도에 대한 개정 필요성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252) 고령화사회(aging society)란 65세 이상의 인구가 전체 인구의 7% 이상을 차지하는 사회
를 말하는데 우리나라는 이미 2000년 7월 65세 이상 인구가 7.1%에 달하는 고령화사회로 돌입했으며, 2018년에 위 노령 인구가 14%, 2026년에 20%에 이를 것으로 예상되는 등 OECD 국가 중에서도 고령화 속도가 매우 빠른 편이다. 구상엽, “개정민법상 성년후견제 도에 대한 연구 –입법배경, 입법자의 의사 및 향후 과제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법학 박사학위논문, 2012, 10면.
253) 위 논문(각주261)에서는 ‘치매(癡呆)’의 한자의미가 ‘어리석다’는 점에서 용어사용의 부적절함을 지적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2004년 후생노동성의 용어 검토회에서 치매 대신
‘인지증(認知症)’ 용어 사용을 제안한 이후 고령자 개호 분야부터 용어 환원이 시작되어 2007년에 이르러 의학계 전반으로 확대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 아직 ‘인지증’
이 잘 사용되지 않으며 그 어감상 확실히 능력의 감퇴라는 특성이 드러나지 않으므로
‘인식감퇴증(認識減退症)’ 용어사용을 제안하고 있다. 구상엽, 위의 논문, 11면. 필자 역 시 이러한 지적을 따라 이하에서는 ‘인식감퇴증’ 용어를 사용하도록 한다.
254) 박태신, “성년후견과 관련한 개정 민법 및 외국의 법률 등에 관한 연구”, 「홍익법
학」제13권 제4호, 2012, 384면.
한편 행위무능력자제도는 그 주요 보호 대상으로서의 지적 장애인, 정신장 애자 등에 대해서도 적법한 법적 보호가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려웠다. 대체로 정신장애인들은 사회적 약자에 속하기 때문에 마땅한 법적 보호 없이는 쉽게 학대와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행위무능력자제도는 활 성화되지 않았다.
요약하자면 행위무능력자제도 전반에 대해서는 긍정적 인식보다 부정적 인 식이 더 많은 것으로 보인다. 금치산(禁治産)이나 한정치산(限定治産)과 같은 부정적인 용어를 통한 낙인효과, 피후견인에 대해 과도한 행위능력 제한, 실제 로 재산 다툼에서 행위무능력자제도는 재산권 박탈을 위한 악의적 수단에 이 용되기도 하는 등, 여러 원인들로 인하여 행위무능력자제도의 활용도는 매우 저조한 편이었다.255)
더욱이 정신장애인 및 고령자 등에 대한 후견적 보호는 국가의 사무이기 보다는 가족의 일이라는 인식이 강하였기 때문에 대체로 공적 관여는 소극적 형태에 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오늘날 가족 형태는 점차 핵가족화되고 있으며 1인가구나 독거노인의 빠른 증가 등으로 의사결정능력상의 장애인들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보호 필요성은 점차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서 복지국가에 대한 요청은 단순히 국가의 시혜조치가 아닌 다양한 복지서비 스의 제공이라는 복지 패러다임의 변화로 이어지면서, 행위무능력자에 대한 재검토를 통해 새로운 제도로서 성년후견제가 도입되었다.
(2) 성년후견제도의 이념
민법 개정을 통해 행위무능력자제도에서 성년후견제도로의 변화는 필자의 구분에 따를 때 자율성 능력 모델에서 자율성 역량 모델로의 전환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은 성년후견제도의 이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외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성년후견제도의 이념을 필요성 원칙, 보충성 원칙, 정상화 (normalization) 원칙으로 설명한다.256) 필요성 원칙은 피후견인의 필요에 한하
255) 구상엽, 위의 논문, 10-12면.
256) 외국의 성년후견제도의 이념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백승홈, 「외국 성년후견제도의 실 태 – 독일과 일본을 중심으로」, 법무부 연구용역, 2009; 송호열, “성년후견법제화의 기본 원칙과 방향”, 「동아법학」제33호, 2003.
여 후견이 행해져야 한다는 원칙이다. 따라서 피후견인이 필요로 하는 이상으 로 후견인이 간섭해서는 안 되고 피후견인의 가족 등 주변인의 필요에 의해 후견이 이용되어서도 안 된다.257) 보충성의 원칙은 피후견인의 사적 자치를 강 조하는 것으로 본인이 주도할 수 있는 임의후견이나 위임을 우선적으로 활용 하고 보호가 미흡한 경우에만 법적후견이 발동된다는 것이다.258) 이러한 두 원 칙은 종래의 자기결정권의 존중을 반영하는 자율성 능력 모델의 이상과도 일 치한다.
반면에 성년후견제도의 도입의 핵심적 배경에 해당하는 정상화 원칙은 피 후견인을 보호가 필요한 사회적 약자로 간주하는 시각에서 벗어나 제도의 이 용자가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과 대등하고 조화롭게 살 수 있도록 설계하는 것 을 의미한다.259) 이러한 정상화 원칙은 사적 자치라는 민법 근본 원리보다는 헌법적 차원의 행복추구권 및 생존권과 직결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보 호가 필요한 자의 현재 남아있는 능력, 잔존능력 혹은 현존능력을 최대한 활 용하여 그의 복리를 극대화하는 것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잔존 능력을 존중한 다는 점에서 유동적인 의사결정능력을 기준으로 하며, 복리를 극대화한다는 결과지향적 관점을 취한다는 점에서 필자가 제안하는 자율성 역량 모델과 직 접적으로 연결된다. 즉 성년후견제도는 민법상 제도이자 동시에 헌법상 인권 론을 구체화하는 기능으로도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정상화 원칙은 엄밀히 말하자면 권리능력 및 사적 자치에 기반하는
257) 구상엽, 위의 논문, 8면. 프랑스 민법 제428조 제2항에서 개인 능력이 부족한 정도에 비
례하여 개별적으로 보호조치를 하도록 하는 조항, 독일 민법 제1896조 제2항에서 후견이 필요한 임무에 한해 성년후견인이 선임될 수 있도록 한 조항들은 필요성의 원칙을 반영한 다.
258) 구상엽, 위의 논문, 9면. 프랑스 민법 제428조 제1항에서 성년자에 대한 재판상 보호조
치는 임의대리, 장래보호 위임계약 등 본인이 주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수단에 의한 보 호가 충분하지 않은 경우에만 이용할 수 있다고 규정하며, 독일 민법 제1896조 제2항에서 법정대리인이 아닌 사람이 성년후견인과 마찬가지로 사무를 처리할 수 있는 경우에는 성 년후견이 필요하지 않다고 규정함으로서 보충성의 원리를 반영한다.
259) 성년후견제도연구회, 「성년 후견제도 연구」, 사법연구지원재단, 2007, 9-12면. 노멀라 이제이션(normalization)은 1950년대 북유럽에서 발생한 지적 장애자의 처우개선을 출발점 으로 하는 사회운동이다. 이러한 사상 기저에는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존중되어야 하며 설령 장애나 질병과 같은 어려움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도 건강한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이고 모든 사람들이 통상의 삶을 영위하기 위하여 사회제도나 생활환 경의 조건을 개선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윤일구, “성년후견제도의 도입에 따른 문제점 과 과제”, 「전남대학교 법학논집」제32권 제2호, 2012, 175면.
민법적 도그마틱에 정면으로 위배하는 것으로 비춰질 여지도 있다. 다시 말해 서 법적 능력이 부족하다고 평가되는 개인들을 어떤 방식으로든 원조하는 제 도들의 본질은 법에서의 인(人)의 지위를 일원적으로 보지 않는 것으로부터, 즉 법적으로 능력 있는 자와 없는 자를 구별하는 이원적 파악이 타당하다고 입장에서는 정상화 원칙의 민법적 수용 자체를 거부할 수 있다. 이 이념은 의 사결정능력이 정상에 이르지 못하는 자라도 정상의 범주에서 배제시키지 않는 것으로 설명하겠다는 취지인데,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의사결정능력을 가지지 않아도 의사결정능력을 가지는 것으로 인정하겠다는 것이며 이러한 해석은 사 법 도그마틱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행위능력제도의 안정성, 명확성을 희생시 키는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260)
이러한 비판에 대하여 사적 자치 원칙이 대등한 당사자 간의 행위를 규율 하기 위한 것이라는 전제로 돌아가서, 성년후견제도는 오히려 진정한 사적 자 치의 원리를 구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응대할 수 있겠다. 과거의 행위무능력자 제도가 대등한 관계로 인정되지 못하는 요보호자들을 권리능력의 대상에서 단 순히 제외시킴으로써 확보할 수 있는 제도적 안정성 내지 명확성은 그야말로 부분적이고 형식적일 뿐이며, 오로지 건강하고 정상적인 판단능력을 가진 사 람만이 권리능력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인간의 전체 인생의 관점에서 볼 때 매우 오만하고 편협한 생각일 수 있다. 현재의 내가 온전한 의사결정능력 을 가졌을지라도 장래에 후견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때를 대비한다는 측면에서 보면 성년후견제도를 도입하려는 취지를 이해 못할 바 아니며, 이러 한 정상화 원칙이라는 새로운 아젠다를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러한 제도를 통 해 행위능력의 전면 제한 공식이라는 민법적 도그마를 실질적으로 유연화하고 탄력화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260) 성중모, “신설 성년후견제도 및 동의 대행과 법에서의 자율성”, 「영산법률논총」 제
10권 제1호, 2013, 23-24면 특히 이러한 논의 전개는 만약 피성년후견인이 설령 의사능력 을 회복했다면 성년후견인의 능력이 그 순간 소멸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복된 의사결 정의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의사결정 주체가 중복된다는 법해석학적으로 거의 불가해 한 어려운 문제가 발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