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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I. 역량 접근법과 후견주의

3. 소결

정리하자면 역량 접근법은 결과적 가치 고려와 자율권의 비교 형량을 허용 하기 때문에 결과적 가치를 전면적으로 배제하는 연성 후견주의와 달리 경성 후견주의를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파인버그의 연성 후

209) Rutger Claassen, 위의 논문, 67면.

210) Rutger Claassen, 위의 논문, 70-72면.

견주의도 자발성 여부를 판단함에 있어 여러 실용적 기준을 사용하지만, 이때 고려되는 이익이나 해악과 같은 결과 가치들의 고려는 주체의 자발성 심사 범 위 내에 국한된다. 이렇게 보면 연성 후견주의가 고려하는 결과 가치는 결국 주관적 합리성의 논리적 일관성을 검토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반면에 역량 접근법은 결과 가치 판단을 권리론 안에 포섭하는 논의라는 점에서 경성 후견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다만 결과적 가치 판단을 언제나 포함한다고 보기보다는 자기결정권과 결과적 고려가 일치 하지 않을 때 양자를 비교 형량하여 더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것을 수용하는 방식을 취하기 때문에, 경성 후견주의의 수용 여부는 개별적으로 판단된다고 말할 수 있다.

자율성론이 경성 후견주의를 배척할 것인가 수용할 것인가에 대한 입장은 이익의 관점에서도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다. 결과적 가치 판단에서 핵심적인 기준은 바로 ‘이익’의 고려라고 볼 수 있다. 필자는 로날드 드워킨이 「생 명의 지배영역(Life’s Dominion)211)에서 제시한 비판적 이익과 향유적 이익의 구분212)을 소개하고 설명에 활용하고자 한다.

드워킨은 앞서 살펴본 파인버그와 같이 연성 후견주의자로 분류될 수 있 다. 왜냐하면 드워킨은 자기결정권을 본인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경우에도 존중되어야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자기결정권을 설명하는 두 가 지 관점을 구분하여 설명한다.

첫째, 증거론적(evidentiary) 관점에 의하면 “사람들은 자신에 대한 결정에 서 최선의 이익이 무엇인지를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기에 관 한 결정은 스스로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입장이다. 이러한 관점에 따르면 심지어 명백히 실수로 보이는 판단이라도 그 사람의 장기적인 인생의 측면에 서 필요한 것일 수 있기 때문에 자기 관련 결정에 대해서는 외부적 시각에서 판단하여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사실 이런 관점은 일반적으로 표준화된 자율성 개념으로 이러한 관점을 취할 경우 자기에 관한 결정에 대하

211) Ronald Dworkin, Life’s Dominion. An Argument About Abortion, Euthanasia, and Individual Freedom, First Vintage Books Edition, 1992; 박경신·김지미 역, 「생명의 지배영 역, 낙태, 안락사, 그리고 개인의 자유」, 이화여자대학교 생명의료법연구소, 2007.

212) Ronald Dworkin, 위의 책, 237-244면.

여는 제3자의 개입은 불필요한 것이 될 뿐이다.

반면에 둘째, 통합적 관점에 의하면 “자기결정권은 자신의 가치, 신념, 사 명감과 같은 비판적 이익(critical interests)과 우리가 흔히 경험적으로 얻어지 는 만족과 같은 향유적 이익(experiential interests)을 포함하여 자신의 개성을 삶을 통해 표현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때 ‘비판적 이익’이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하나의 일관된 주제를 가진 소설처럼 평가되기를 바라는 차원 으로서 “자기 삶에 대한 인테그리티(integrity)”를 가지고 추구하는 것, 자신 의 좋음에 대한 ‘믿음’의 이익이라고 말할 수 있다. 드워킨은 “이러한 비 판적 이익에는 자존감이나 시간적 자기정체성 등이 중요하게 고려된다”고 말 한다.213) 반면에 ‘향유적 이익’이란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즐거움이나 좋음 과 같이 경험적으로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말한다. 이러한 구분을 통해 드워킨 은 자기결정권이 궁극적으로 비판적 이익을 의미하는 것으로 본다.

필자는 이러한 드워킨의 통합적 관점에서 자기결정권을 비판적 이익의 추 구라고 말하는 것에 동의한다. 다만 이러한 자기결정권 논의는 단계적으로 구 분될 필요가 있다. 즉 비판적 이익과 향유적 이익 양자를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비판적 이익은 생존의 문제보다는 자기 삶의 목적이나 개 인 신념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고도로 추상화된 욕구에 해당한다. 따라서 개인 의 비판적 이익을 추구하고 보장하기 위해서는 결국 인간에게 최소한의 기본 적인 생존과 관련된 향유적 이익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역량 접근법에서 말하는 인간의 핵심 역량은 바로 인간의 자유를 위해 이 러한 향유적 이익의 필요불가결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즉 각자의 자기결정권 의 진정한 행사를 위해서는 각자 삶에서 기초적인 향유적 이익의 보장이 전제 되어야 한다. 결국 역량 접근법이 경성 후견주의를 정당화하는 이유는 곧 자 기결정권의 구체적인 실행을 목표로 두기 때문이다.

213) Ronald Dworkin, 위의 책, 214-218면.

제 3 절 자율성 역량 모델의 정당화 근거로서 역량 접근법의 함의

이상에서와 같이 필자는 역량 접근법의 주요 내용 및 쟁점들을 검토하였 다. 본 절에서는 역량 접근법을 검토한 후 자율성 역량 모델에 활용하고자 하 는 의의를 간단히 정리해보고자 한다.

앞서 제2장을 통해 필자는 종래의 자율성 능력 모델의 관점이 의료적 의사 결정과정에 적용될 경우 생길 수 있는 문제점을 지적하였다. 의사결정과정의 복합적인 요소들은 의료영역에서 환자의 자율성 논의를 단순히 개인의 독립적 인 자기결정에 한정지을 것이 아니라 자율성 개념을 좀 더 풍성하게 논의할 필요성을 제기한다. 이러한 시도의 일환으로 관계적 자율성 이론들은 종래의 자율성에 대한 비판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면서도 그 다양한 이론적 스펙트럼으로 인하여 대안적 자율성 논의를 위한 이론으로서 기능하기 에는 한계를 지닌다.

필자는 이러한 관계성 요소들을 자율성 개념 안에 적극적으로 포함하기 위 해 자율성 역량 개념을 도입한다. 이때 자율성 역량 개념은 역량 접근법에서

‘역량’ 개념이 가지는 역동성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핵심적으로 “역량의 발전 가능성”은 역량 접근법의 중요한 규범적 성찰로서 자율성 역량 모델은 이를 자율성 역량 개념에 활용하고자 한다. 이와 관련하여 “자율성 역량 개 념의 역동성”은 제4장을 통해 자세히 설명한다.

역량 접근법의 검토를 통해 얻을 수 있는 또 다른 성과는 바로 후견주의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기존의 자율성 논의는 후견주의와 긴장상태에 있다고 판단하고 의도적으로 후견적 개입을 배척하는 태도를 취하는데, 이러한 원인 은 아마도 자유주의자들 대부분이 후견적 개입을 신뢰하기 보다는 부정적 억 압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역량 접근법은 자 유주의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경성 후견주의의 수용가능성을 보여준다는 점에 서 특기할만하다.

역량 접근법의 후견주의적 성격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공동체는 개 인 스스로가 자신의 역량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데 필요한 지원을 제공할 의

무를 진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의 공적 개입이나 지원은 단순히 개인 의 성장을 방해하는 요소가 아니라 오히려 개인의 발전을 촉진하는 요소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사실 역량 접근법이 후견주의를 수용하는 태도는 이론적 차 원에서보다 실제적 차원에서 더 진가를 발휘할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역량 접근법이 경성 후견주의를 정당화할 수 있다는 점은 이론적으로 가능하나 이와 관련하여 구체적인 논의는 미비한 편이다. 역량 접근법이 공적 개입을 위한 구체적인 기준이나 방식을 제시하는 것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실천적 차원에서 공적 지원 방식을 정하는 것은 매우 섬세한 주의를 기울이게 만든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받 는 도움이나 지원은 자칫하면 도움을 받는 사람들을 의존적 상태에 놓이도록 만들 수 있는 위험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율성 역량의 증진을 목적으로 허용되는 공적 개입이나 지원의 구 체적 방식을 논의하는데 있어서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적어도 구성원들의 인간다운 기본 생존을 보장해주고 각자의 역량의 발전을 위한 기 회를 제공하는 것은 자율성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율성을 보장하고 실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데 합의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리고 이 러한 실천적 관심은 개인의 자율성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증진하기 위한 것 에 그 목적이 있다 하겠다.

4 장 자율성 역량 모델의 제안과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의 대입

제 1 절 자율성 역량 모델의 제안

본고 제2장에서는 자율성 능력 모델이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 그대로 적용 될 경우 ‘환자’라는 특수한 속성과 ‘의료적 의사결정’이라는 구체적 상황 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을 확인하였다. 특히 자율성 능력 모델의 관점에서 이해된 환자의 자율성 개념은 “독립적인 자기결정능력을 가진 주체 가 비판적인 숙고 과정을 통해 자신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결정을 스스로 내 리는 자기결정권리”로 이해되며, 이러한 자율성 개념은 환자가 필수적으로 의사결정능력을 구비할 것을 전제한다. 즉 자율성 능력 모델은 의사결정능력 을 가진 환자만이 비로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반면에 의사결정능 력이 없는 환자는 후견적 대리판단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고 본다. 이러한 이 원화 전략은 의료적 의사결정과정에서 환자의 자율성 보장을 위한 접근 방식 으로서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접근 방식은 환자를 추상적인 규범적 인격과 동일하게 간주하는데 이러한 가정은 개별적인 환자마다 다르게 나타나 는 양상들과 구체적 사정들을 전혀 고려할 수 없게 만들기 때문이다. 몸이 아 픈 환자가 직면한 복잡한 상황들에도 불구하고 냉정하게 스스로 의사결정 할 것으로 기대하기보다는 타인으로부터 치료와 돌봄을 필수로 하는 상황에서 주 변의 지원과 협력을 통해 환자의 의사결정을 돕는 것이 더 적절하다.

이러한 인식은 의료에 대한 전통적인 후견주의 태도로 회귀하지 않으면서 도 환자의 자율성 개념을 새롭게 인식하고 도모할 수 있는 접근 방식을 구상 할 시도로 이어질 수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필자는 자율성 역량 모델을 의료 적 의사결정과정에 보다 적합한 환자의 자율성 개념 및 논의 방식으로 제안한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