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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로페스는 우리가 그림이 제시하는 국면에서의 대상을 재인함으로써 그림을 해석하는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회화적 재인은 두 단계로 작동한 다는 점에서 일상적 재인과 다르다.그 첫 번째 단계는 “내용-재인 (content-recognition)”으로서,그림의 디자인을 그 대상의 국면을 구성하는 특징으로 재인하는 것이다.두 번째 단계는 “대상-재인(subject-recognition)” 의 단계로서,그림의 내용을 그 대상으로 재인하는 것이다.내용 재인과 대 상 재인은 완전히 독립적인 것은 아니다.한 그림의 대상은 항상 어떤 속성 들을 가진 것으로 재인되기 때문이다.또한 우리가 내용 재인을 먼저 하고 그 내용을 기반으로 하여 대상을 재인하는 식으로 내용 재인과 대상 재인이 단계적으로 일어나는 것도 아니다.내용 재인은 그와 동시적인 대상 재인의 정보에 의해 일어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85)

모든 그림의 대상이 재인만으로 식별될 수는 없지만,재인은 모든 그림들 에 기본적이다.로페스는 “기본적 초상(basic portrayal)”과 “기본적 묘사 (basicdepiction)”를 구분한다.여기서 “초상”이라는 말은 우리가 재인할 수

85)Ibid.,p.145.

있는 어떤 단일한 대상의 묘사를 가리키는 용어로서 사용된다.로페스에 따 르면 어떤 그림은 적절한 지각자가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어떤 대상이나 장 면을 재인할 수 있는,그 대상이나 장면으로부터의 국면적 정보를 구현할 때 오직 그 때만이 그 대상이나 장면에 대한 기본적 초상이 된다.그러나 어떤 단일한 대상을 재현하지 않는 그림이나 속성만을 재현하는 그림은 우 리가 그 대상을 말 그대로 재인할 수는 없으므로 초상이 아닌 묘사로 간주 된다.한 그림은 적절한 지각자가 그것을 기반으로 하여 그 그림을 어떤 속 성이나 대상의 종류인 F로서 재인할 수 있는,F들로부터 이끌어낸 국면적 정보를 구현할 때 오직 그 때만이 F를 기본적으로 묘사한다.86)이 정의에서

“적절한 지각자”란 어떤 사람을 의미하는가?우리 재인 능력의 한 가지 특 징은 그것이 역동적이라는 것이다.우리는 어떤 특징이나 대상,대상의 종류 들을 서로 다른 국면들 하에서 재인할 수 있다.예를 들어 한 대상을 다른 각도에서 본다든가 어떤 사람을 오랜 세월이 지난 다음 다시 만나더라도 알 아볼 수 있는 것은 우리 재인 능력의 역동성 때문이다.그러나 재인 능력이 역동적이라고 해서 무한정 탄성적이지는 않다.어느 정도 이상의 변형을 넘 어서면 우리는 더 이상 그 대상을 재인할 수 없다.로페스는 대상들이 변형 되더라도 우리가 재인할 수 있는 국면들의 종류를 “변형 차원(dimensions ofvariation)”이라고 부른다.재인은 변형 차원의 수에 비례해서 역동적이라 고 간주된다.기본적 초상과 기본적 묘사에서 적절한 지각자란 이런 의미에 서 적절히 역동적인 재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정의된다.

86)Ibid.,pp.151-152.모든 그림이 초상이라 할 수는 없으나,그림은 항상 그 대상이 어 떤 속성들을 가진 것으로서 재현해야 하기 때문에 모든 그림은 묘사라고 할 수 있다.

기본적 초상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다.매튼은 우리가 그림 에서 개별자를 재인할 수 있다는 데 대해 반대한다.그는 그림 지각에는 기술적 시각 (descriptivevision)만 작동할 뿐 어떤 현존하는 대상과 공간적으로 연결해주는 동작- 안내 시각(motion-guidingvision)이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에서 개별 대상을 지 적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그에 따르면 우리가 그림이나 사진 등에서 개별 인물을 재 인할 수 있다면 그것은 그림이 개별자 재인을 가능하게 하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얼굴 재인(face-recognition)능력이 인간의 사회적 필요에 의해 특수하게 발달되었기 때문 이다.Mohan Matthen,Seeing,Doing,and Knowing:A PhilosophicalTheory ofSense Perception(OxfordUniversityPress,2005),pp.319-322.

기본적 초상과 기본적 묘사에 대한 이러한 로페스의 정의에서 “회화 경 험”은 부차적인 것으로 보인다.우리가 그림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거기에 나타난 정보를 기반으로 하여 그 그림이 그 대상에 대한 것임을 알기만 하 면 되기 때문이다.이러한 접근 방식은 이른바 “경험 기반 이론들”이라고 이름붙일 수 있는 이론들과 대조를 이룬다.경험 기반 이론들은 그림의 내 용이 그 그림을 보는 사람의 시각적 경험에 의해 결정된다고 주장하며,그 림은 보는 사람에게 그 그림이 지칭하는 대상을 직접 보는 경험과 어떤 방 식으로든 관련된 시각적 경험을 일으키기 때문에 내용을 가지는 것이라고 본다.그러나 로페스는 샤이어와 마찬가지로,회화 경험은 묘사를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묘사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87)

그렇다면 로페스는 우리가 그림을 볼 때 하는 경험이 어떤 종류의 경험이 라고 생각하는가?그는 회화 경험의 문제를 그 자체로서 독특한 것으로 다 루기보다는,회화 경험을 우리의 일상적인 지각과 그 대상 사이의 인과에 의존하는 것으로서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는 월튼의 사진에 대한 사실주의88)를 그림 일반에 확장시킨다.그림을 정보전달의 수단으로 보는 로페스에게 있어서 그림은 사진과 마찬가지로 실제 세계에 대한 정보를 전 달해주는 매체이기 때문이다.이러한 주장은 즉각적인 반감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기계적으로 생산되는 사진과 달리 그림은 화가의 믿음에 의해 매개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그러나 로페스는 실제 세계와 그림 사이의 연관 에서 “믿음”의 역할을 제거한다.로페스는 첫째,그림이 무엇을 재현하는가 는 그 그림의 생산에 적절한 역할을 한 대상이나 장면에 달려 있지 화가의 믿음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한다.그 인과적 기원이 되는 대 상을 재인할 수 없는 그림은 아무리 화가가 무엇인가를 묘사하고자 의도했

87)Ibid.,p.175.

88) Kendall. L. Walton, “Transparent Pictures: On the Nature of Photographic Realism”,CriticalInquiry11(1984).월튼은 사진을 보는 것은 그 사진 찍힌 대상을 “ 는”것이기 때문에 사진이 투명하다고 주장한다.사진은 안경,거울,망원경 등과 한데 묶일 수 있는데,그것은 사진이 비록 기계적인 수단에 의해 매개되기는 하지만 대상과 의 “접촉”을 가능케 하기 때문이다.그러나 그는 손으로 그린 그림은 사진과 달리 화 가의 개입에 의해 대상에 대한 접촉이 깨어지므로 투명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다 하더라도 그것을 묘사하는 것이 아니다.둘째,로페스는 우리가 그 속성 에 대한 믿음 없이도 대상을 그릴 수 있다고 주장한다.그림을 그리기 위해 필요한 것은 단지 그 그림에 적절한 인과적인 역할을 한 대상을 재인할 수 있도록 캔버스 위에 자국을 내는 일 뿐이다.화가가 자신이 그러그러한 것 을 그리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은 그 대상의 그림이 되는 데에 필수적인 것 이 아니다.보다 중요한 것은 그림의 내용은 비개념적이라는 것이다.어떤 내용은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거나 경험하는 데 있어 그 내용이 세계가 가지 고 있는 것으로 표상하는 속성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다면 비개념적이다.예를 들어 무지개의 색에 대한 지각은,우리가 그 무지개를 이루는 색 연속체 속의 모든 색들에 대한 개념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기 때문에 비개념적이다.이는 우리의 지각 경험이 믿음 독립적이라는 것을 보 여준다.개념이 없는 것에 대해서는 믿음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만약 우 리가 비개념적 지각 내용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면,그림의 디자인 속성에 대 한 경험의 내용은 당연히 비개념적일 것이다.그러나 그림의 내용도 역시 비개념적인가?로페스는 그렇다고 주장한다.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것은 대상의 외양에 의해 인도되어 그 대상의 국면인 것으로 재인될 수 있는 국 면을 제시하는 자국들을 표면에 만들어내는 일 뿐이다.“화가는 대상을 보 고,표면에 표시를 하고,그 결과가 그 대상인 것처럼 재인될 수 있는지 확 인하고,그 대상의 재인 가능한 국면이 떠오를 때까지 수정한다....그림을 그리면서,눈과 손은 마음을,혹은 개념과 믿음과 관련된 마음의 일부를 우 회하면서 협업한다.”89)이렇게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그 그림의 내용에 대 한 개념은 불필요하며,따라서 그림의 내용은 믿음 독립적이다.물론 그림은 화가가 보고 있는 것을 그대로 복제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정도의 변형을 포함한다.그러나 로페스의 주장은,이러한 변형이 전의식적(sub-personal) 수준에서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페스의 주장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그림이 믿음 독립적이 라는 것을 인정한다면,그림과 사진의 유일한 차이로 여겨져 왔던 특징이

89)DominicLopes,UnderstandingPictures,p.186.

사라지는 것이다.즉 그림은 “투명한”매체가 된다.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그 대상을 말 그대로 보는 것이다.여기서 로페스의 이론의 놀라운 점이 드 러난다.그는 그림을 볼 때 우리가 보는 한 가지는 선과 색이 그려진 표면 이겠지만,또한 우리는 속성을 가진 것으로 재현되는 사물들도 본다고 말한 다.회화 경험은 이런 의미에서 이중적(twofold)이다.우리는 지각적 대상으 로서의 그림을 보고,또 시각을 구성하는 속성들을 가진 것으로 재현되는 대상들 또한 본다.이는 그림이 시각적 세계를 시각적 속성을 통해 재현하 는 시각적 “보조수단(prosthesis)”이기 때문이다.90)그림은 우리의 재인 능력 을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우리의 재인 능력을 일상 지각을 넘어 확장시 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