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페스는 재현이 상징이라는 전제는 받아들이면서도 회화적 상징체계가 어떤 대상을 지시하고 속성을 부여하는 원칙들은 지각적 메커니즘에 의존한 다고 주장한다.그에 따르면 그림이 대상을 지시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그 림의 내용을 통해서 지시 대상을 재인하기 때문이다.따라서 그림의 지시는 그림의 내용에 의존적이다.로페스는 굿맨의 이론이 회화적 재현이 그림의 내용에 대한 지각에 의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일관적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이러한 양보는 사실상 굿맨의 이론에 상당한 변형을 가지 고 오게 된다.그림의 지시가 그림의 내용에 의존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
은 굿맨의 주장과 달리 그림의 지시와 그림의 종류가 독립적이지 않음을 인 정하는 것이다.또한,회화적 재현의 “뿌리”에 지각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회화적 상징체계는 굿맨의 주장과 달리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이라는 형식적 속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각적 속성에 의해 언어적 상징체계와 구분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로 페스가 굿맨의 상징 이론을 공공연하게 지지하는 이유는,굿맨의 이론이 회 화적 재현의 체계상대성을 잘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애초에 회화적 재 현이 철학적 문제로 새로이 부상하게 된 계기가 되었던 곰브리치의 『예술 과 환영』이 근본적으로 묻고 있는 질문은,그림이 닮음이나 지각에 의존하 는 것이라면 왜 그렇게 다양한 양식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로페스는 회화적 재현은 상징으로서 체계에 상대적이라는 사실을 기본적으 로 전제함으로써 다양한 체계를 수용할 수 있었으며,회화적 재현의 지시 대상을 파악하는 우리의 재인 능력이 다양한 체계가 보여주는 국면들의 차 이 속에서도 동일한 대상을 파악할 수 있을 만큼 역동적이라는 점을 지적함 으로써 지각과 체계상대성을 성공적으로 결합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필자는 로페스의 이론이 회화적 재현에 대한 굿맨의 주장의 핵심 을 담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우선,굿맨이 파악하는 재현의 상대성이 국면의 상대성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인가에 대 한 의문이다.굿맨이 말하는 재현의 체계상대성은 그림이 상징으로 사용될 때의 체계의존성이지 그림이 그려지는 방식의 체계의존성이 아니다.그러나 로페스의 국면 재인 이론은 체계에 따라 다르게 그려지는 이유를 국면의 차 이에서 찾는다.이는 굿맨이 그림의 지시와 그림의 종류를 독립적으로 본 것에 비해 로페스는 그림의 지시가 그림의 종류에 의존한다고 생각하는 것 과도 관련된다.즉 로페스에 따르면 같은 종류의 국면을 제시하는 그림들은 같은 체계에 속하고 그러한 체계 내에서 우리는 그러한 국면들에 의존해 그 림의 지시 대상을 알 수 있다.그러나 굿맨의 주장이 과연 이러한 주장으로 수렴될 수 있는가?굿맨은 하나의 체계가 어떻게 결정되는지에는 관심이 없 다.그가 주장하는 것은 그림이 지시하는 바는 그림에 그려진 국면들과 독 립적으로,체계에 따라 결정된다는 것이다.즉 굿맨은 그림의 내용과 독립적
인 지시의 체계상대성을 주장하는 데 비해 로페스는 그림의 지시를 결정하 는 그림의 내용의 체계상대성을 주장한다.둘째,로페스는 회화적 재현이 재 인에 의존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굿맨이 이야기하는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 만성이라는 특징을 무시할 수 있었다.그러나 필자는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회화적 재현의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여전히 필요조건이라는 점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한다.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회화성의 조건 이기 때문이다.문제는 로페스가 말하는 재인이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 성을 지지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로페스는 그림은 아날로그 매체이기 때문에,아날로그적인 지각 경험의 내용을 전달하기에 적합하다고 주장한 다.91)그러나 로페스의 이론이 과연 그림의 아날로그성을 함축하고 있는가?
우선,재인은 회화 경험의 충분조건이 아니라는 점을 들 수 있다.로페스는 우리가 그림의 대상을 재인한다고는 하지만 재인이 지각 경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재인은 지각 경험처럼 반드시 의식적일 필요가 없는 전의식적 인 과정이다.따라서 재인만으로는 그림이 반드시 아날로그적 내용을 가진 다는 것을 보장할 수 없다.92)그러나 로페스의 이론이 그림의 아날로그성을 함축할 수 없는 더 큰 이유는,재인이 그림 자체에 대한 지각이 아니라 그 림이 재현하는 실제 대상에 대한 지각을 가리킨다는 데 있다.로페스에게 있어 그림은 그 자체가 지각 경험의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외부 대상을 재 인하는 수단일 뿐이다.재인의 기반은 공통된 부분이고,그렇지 않은 부분은 재인에 필요 없는 것으로 배제된다.우리가 그림의 지시 대상을 재인함으로 써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회화적 재현의 필요조건이지만 반드시 그림 안에
91)DominicLopes,“FromLanguagesofArttoArtinMind”,p.230.
92)그림에서 대상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한 재인을 함축하지만,재인이 반드 시 의식적인 경험을 발생시키지는 않는다.재인과 경험의 불일치가 일어나는 가장 대 표적인 예로는 맹시(blindsight)를 들 수 있다.맹시란 시각 자극 처리에 대한 의식적 경험은 없지만 무의식적으로 자극을 처리하는 현상을 말한다.맹시를 앓고 있는 환자 는 움직이는 물체를 의식적으로 지각하지는 못하지만 그 물체가 있는 곳을 가리키거 나 잡을 수 있다.맹시 환자가 그림을 이해할 수 있는지,또는 “무의식적 시각 경험”
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지 등에 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Lopes, Understanding Pictures,pp.176-177;MichaelNewall,WhatisaPicture?:Depiction, Realism,Abstraction(PalgraveMacmillan,2011),pp.22-23,pp.45-51.
서 보이는 대상을 지각적으로 경험할 필요가 없다면,아날로그성이 회화적 재현의 필요조건이라고 말할 수 없게 된다.셋째,로페스와 굿맨이 갈라지는 또 하나의 지점은,로페스는 그림과 대상의 의미론적 관계가 회화적인 것의 본성을 밝히지 못한다는 굿맨의 생각을 간과한다는 점이다.로페스는 모든 그림은 상징이라는 기본 전제에 따라,그림의 대상이 존재하든 존재하지 않 든 재현은 재인에 의한 지시 혹은 속성 부여로서 간주될 수 있다고 생각한 다.그러나 굿맨이 밝히고자 한 것은 회화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는 지시로 서의 회화적 재현이었다.로페스는 모든 재현은 상징이라는 굿맨의 기본적 전제를 충실히 따랐지만,사실상 굿맨의 이론에서 회화성은 상징성에 우선 한다.굿맨이 그림에서의 지각성을 거부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그는 그림 과 그것이 상징하는 대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우리가 어떤 의미 있는 것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거부한다.따라서 만약 굿맨의 이론에 어떤 지 각성이 보충되어야 한다면,그것은 상징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지각성이 라기보다는 상징 이전의 지각성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