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굿맨은 그림은 상징이라는 점에서 인공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하다.덧붙여,그림이 되기 위해서는 그림으로서 해석되는 체계 에 속해야 한다고 말한다.그러나 이는 체계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림 이 먼저 있고 그에 합당한 체계가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어 느 쪽이든 굿맨은 답할 필요가 없다.그림의 기원은 그의 관심사가 아니다.

어쨌든 그림은 인공적이고,그림 체계에 속해야 하고,그에 합당한 해석을 당해야 그림이다.굿맨은 상징 이전의 그림에는 관심이 없다.그러나 그렇다 고 해서 굿맨이 상징 이전의 그림의 지각성을 부정한다고 보아야 할 이유는 없다.굿맨의 상징 이론은 그림의 인공성과 체계의존성을 밝힐 뿐,그림과 그 대상 사이에 아무런 자연적 연관관계도 없다는,따라서 순전히 자의적으 로 연결된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렐은 지시에 예시를 덧붙임으로써 재현의 지각성을 살리고자 하였지만,

이러한 기획은 성공할 수 없다.무엇보다도 굿맨의 예시 개념에 비추어 보 았을 때 그림 자체가 그것이 재현하는 대상의 속성을 예시한다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재현적 그림이 무엇인가를 지칭한다면,그것은 예시로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지시로서이다.그러나 우리가 아렐의 제안에서 고려해 볼 부분은,그림이 속성을 가진다는 데에 주목한 점이다.아렐이 지적하는 대로,그림은 단지 지시하는 상징으로서의 속성만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어 떤 대상이 속성을 가지는 것처럼 속성을 가진다.그러나 어떤 속성인가?그 것은 아마도 형태와 색 등의 시각적 속성일 것이다.그러나 필자가 지적하 였듯이,재현적 그림의 경우 그림이 가지는 형태와 색은 그림 자체에게 귀 속되는 형태와 색이라기보다는 그림 그려진 대상에게 귀속되는 형태와 색으 로 보아야 한다.그림에서 보이는 속성은 단지 갈색,곡선이 아니라 이를테 면 재현된 테이블의 갈색과 그 테이블의 윤곽의 곡선이다.

그림을 언어와 같은 상징으로서만 바라보려는 굿맨의 이론에서,이 “속 성”들은 모두 지시하는 상징으로서 간주된다.대신,그림에서 나타난 형태와 색 등은 모두 아날로그적이고 상대적으로 충만한 상징을 이룬다.이는 그림 에서 보이는 어떤 시각적 차이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 을 의미한다.그러나 과연 그러한가?실제로 재현적 그림의 어떤 시각적 차 이도 그것이 지시하는 바의 차이를 낳는가?그림의 윤곽선의 미세한 차이나 붓 자국 등의 매체의 질감은 그림의 지시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있다.내 가 내 친구의 얼굴을 그린다고 해보자.내 친구의 얼굴을 연필로 그린다고 해서,펜으로 그린 그림과 지시하는 바가 달라지는가?또는,친구의 얼굴을 그린 선의 굵기가 0.1밀리미터 굵어진다고 해서,그것이 지시하는 바가 달라 지는가?달라지는 바가 있다면,그것은 그림이 지시하는 내 친구의 모습이 아니라 그림 “안에서 보이는”사람의 모습이다.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그림과 대상 사이의 관계,즉 의미론과 관 련된 것이 아니라 그림 자체,그림의 형식적인 특징이다.64)굿맨은 회화적

64)아날로그성은 구문론적,의미론적 조밀성을 의미한다.그러나 의미론적 조밀성 역시 상징과 그것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상징의 차이가 의미의 차이를 낳는다는 것만을 말할 뿐이므로,결국 상

재현의 핵심이 지시라고 말하지만,회화적 재현의 특징은 그 지시 관계,즉 그림과 그림이 지시하는 대상 사이에 어떤 관계가 성립하는지에 있다기보다 는 지시하는 기호로서 가지는 성격에 의존한다.이는 그림이 무엇을 지시하 는가를 말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것이 “그림”이라는 것이 결정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다시 말해서 회화적 재현은 재현함으로써 회화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기 전에 이미 회화이어야 한다.굿맨이 말하는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상징의 상대적으로 많은 국면들에 대해서 그 어떤 미세한 차이라도 의미 있는 차이로 간주되는 것,상징의 변화 하나하나가 모두 등 록되는 것을 의미한다.그것은 결국 그림 자체에 대한 주목,그림에 대한 지 각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회화성의 특징을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 으로써 성격화하는 것은 그림의 예술성과도 관련된다.굿맨이 말하듯이,아 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구별에 대한 최대한의 민감성과 함께 상징 자 체에 대한 끊임없는 주의를 요구한다.65)그림을 단지 지시하는 상징으로서 만 본다면,사실상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지시의 정확성과 효율성 을 방해하는 요소일 뿐이다.그러나 그림을 뚫고 단지 그것이 지시하는 바 를 보는 것이 아니라 지시하는 그림 그 자체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은 그 그 림을 예술로서 보게 될 가능성을 높인다.66)

그러나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이라는 구문론적 특징으로부터 그림 안에서 대상이 보인다는 의미의 지각성이 도출되지는 않는다.추상화 역시 그것이 그림인 한 아날로그적이고 충만하기 때문이다.굿맨이 말하는 아날

징 자체의 형식적 특징에 대한 성격화라고 볼 수 있다.

65)NelsonGoodman,LanguagesofArt,p.252.

66)NelsonGoodman,WaysofWorldmaking(Indianapolis:Hackett,1978),p.69.굿맨은 구문론적 조밀성,의미론적 조밀성,상대적 충만성,예시,다중의 복합적인 지칭을 미 적인 것의 다섯 가지 징후로서 꼽는다.이러한 징후들은 미적인 것의 정의를 제공하 는 조건들이라기보다는 단지 미적인 것의 단서일 뿐이다.굿맨은 이 징후들을 더 많 이 나타낼수록 더 미적인 것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경고한다.시는 구문론적 조 밀성을 가지지 않으나,그렇다고 해서 네 가지 징후를 가진 회화보다 “덜”예술인 것 은 아니다.Ibid.,p.68n.그러나 필자가 생각하기에 적어도 언어와 회화를 비교할 때 회화가 미적인 것의 징후를 더 많이 가진다는 사실은 회화의 예술성에 대해 어떤 함 축을 가진다고 여겨진다.

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회화적 재현의 특징이라기보다는 회화성의 특징 일 뿐이다.그렇다면,이제 회화적인 것으로 분류된 것들 중에서도 그것이 어떤 속성을 예시한다기보다는 어떤 대상을 지시한다면 재현이 된다고 하 자.왜 그 그림은 예시가 아니라 지시가 되는가?캔버스에 그려진 붉은 사 각형이 “붉음”과 “사각형”이라는 속성을 예시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세계의 붉은 사각형을 재현하는 것이라면,그 이유는 무엇인가?단지 우리가 그 그 림을 외부의 붉은 사각형을 지시하는 데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으로는 충 분치 않다.재현의 관계는 무작정 자의적일 수 없다.굿맨이 인정하듯이,그 림의 상징들은 서로 효과적으로 차별화되지 않는다.즉 그림에는 어휘나 문 법과 같은 규칙이 적용될 수 없다.따라서 엘긴은 “그림을 이해하는 것은 그것을 구성하는 상징들의 동일시와 조작을 결정하는 보편적인 규칙을 적용 시키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67)그러나 만약 그림을 이해하는 것이 어떤 규칙 때문인 것이 아니라면 과연 무엇 때문인가?어쨌든,우리 모두는 별 불편함이 없이 상호간에 그림을 이해하고 사용하고 있지 않은가?우리는 그림 속 대상을 지각함으로써 이해한다.따라서 그것은 규칙이 필요 없을 정도로 우리에게 내재한 능력,어떤 자연적인 지각 능력 때문이 아닐까?물 론 굿맨의 이론 내에서 그 이유를 닮음에서 찾는 방안은 철저히 거부된다.

그러나 그림과 그 대상 사이의 보다 근본적인 지각적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 에는 닮음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굿맨이 그림은 그 대상을 닮기 때문에 재현한다는 주장을 거부하는 이유 중 하나는,닮음은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그림을 설명할 수 없다는 점 때문 이다.“유니콘-그림”은 유니콘을 닮았기 때문에 유니콘을 재현하는 그림이 아니다.유니콘-그림이 닮을 유니콘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그렇다면 도대체 왜,어떤 이유 때문에 우리는 유니콘-그림을 유니콘의 그림으로 분류 할 수 있는 것인가?유니콘-그림을 유니콘을 재현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관례에 의한 것이라면,우리는 매번 서로 다른 유니콘-그림들을 볼 때마다 새로운 관례에 따라야 할 것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유니콘-그림과 유

67)Reconceptions,p.110.

니콘의 관계를 설명하는 개념은 그림을 알아보는 우리의 자연적인 지각 능 력을 인정하면서도 “닮음”과 같이 존재일반화를 요구하지는 않는 개념이어 야 할 것이다.볼하임이 주장하듯이,“안에서-보기”는 이러한 역할을 할 수 있다.내가 어떤 것을 본다고 해서 반드시 그 대상이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듯이,내가 그림 안에서 어떤 대상을 본다는 것이 그 대상이 존재한다는 함축을 가지지는 않기 때문이다.68)

굿맨의 재현 이론의 가장 큰 성과는,그림이 세계의 자연적 복제물이 아 니라 인간이 만들어내고 사용하는 상대적이고 변화 가능한 상징이라는 점을 깨닫게 해 준다는 점이다.그림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것이 상징하는 바를 이해하는 것이다.그리고 그림이 상징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림이 상징하는 데 사용되어온 관례,역사,그 밖의 많은 맥락들에 대한 고려가 반 드시 필요하다.상징으로서의 그림은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을 반영 하기도 하지만,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굿맨이 지적하는 대로,화가는 신선하고 의미 있는 관계를 포 착하고 그것을 그림으로 나타냄으로써 우리가 종종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쳤 던 유사성을 깨닫게 해주고,새로운 연상을 가능케 하며,어떤 의미에서는

“우리의 세계를 다시 만든다.”69)

그러나 그림에 대한 우리의 지각이 관례나 교육,혹은 예술에 의해 영향 을 받는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해서 그림이 재현하는 바를 알아보는 데에 어 떤 자연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부정할 필요는 없다.굿맨 역시 이 점을 부정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그러나 굿맨의 이론이 회화적 재현의 본 질에 대한 설명이 되고자 한다면,자연적 지각 능력은 단지 부정되지 않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설명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어야 한다.굿맨이 말하는 아날로그성과 상대적 충만성은 회화적 재현에서의 대상 지각을 함축하지 않 는다.회화적 재현의 본질에 그 대상에 대한 지각이 필수적인 부분이라면, 굿맨의 이론이 회화적 재현의 본질에 대한 완전한 설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

68) Richard Wollheim, “Nelson Goodman’s Languages of Art”,The Journal of Philosophy67,no.16(Ag.1970),p.537.

69)LanguagesofArt,p.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