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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이어는 그림과 언어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한 굿맨에 반대하여,그림과 언어 사이에는 결정적인 차이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언어는 그 단어들 이 의미하는 바를 하나하나 배워야 하지만,그림은 한 번에 숙달된다.물론 익숙하지 않은 체계나 전통의 묘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관습 이나 규칙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기는 하지만,그림을 이해하는 능력은 언어

이해 능력과는 달리 생성력이 있다.관객이 어떤 묘사 체계에 익숙해지기만 하면 더 이상의 교육 없이도 그 체계 내의 어떤 그림이라도 이해할 수 있 다.샤이어는 “도상적인(iconic)”또는 회화적인 체계에 특징적인 점은 “누군 가가 어떤 체계 내의 임의의 한 그림을 해석하고 나면,묘사된 대상을 실제 로 재인할 수 있기만 한다면 그 체계 내의 어떤 다른 그림이라도 해석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그림의 이러한 특징이 바로 샤이어가 부르는바

“자연적 생성성”이다.70)사진을 한 번도 접해 본 적이 없는 부족에게 사진 을 보여주었더니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일화라든지 우리가 때로 익숙하 지 않은 체계의 그림을 처음 접할 때 그 그림이 무엇을 그린 것인지 쉽게 알아보지 못한다는 점이 그림 인지의 자연성을 논박하는 증거로서 여겨져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한 체계 내의 최초의 그림 인지 이후의 자연적 그림 통달 능력에 주목한 것은 그림 이해 능력이 인간의 자연적 능력임을 보여주 기 위한 영리한 착안인 것으로 보인다.

자연적 생성성은 도상적 상징을 언어적 상징으로부터 구분하는 특징이다.

자연 언어는 자연적 생성성을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예를 들어 내가 어 떤 회화 체계에서의 개 그림을 해석하는 법을 터득하고 나면,고양이를 재 인하는 능력만 있다면 나는 고양이 그림을 별다른 학습 없이도 해석할 수 있다.그러나 처음 보는 단어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매번 그 단어와 의미 사 이의 관계를 새로이 배워야 한다.영어를 배울 때 내가 “dog”이 의미하는 바를 알고 있다고 해서 “cat”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물론 우리는 때때로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문장을 해석할 수 있다.그러나 그러기 위해서는 그 문장 내의 단어를 미리 알아야 하고 또 그 문장이 구성된 문법의 규칙을 알아야 한다.이와는 달리 내가 고양이 그림을 해석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고양이를 알아보는 능력 뿐,그 전에 고

70)FlintSchier,DeeperintoPictures,CambridgeUniversityPress(1986),p.43.비록 회 화적 재현에 대한 체계적 이론을 구성하지는 않았지만,그림 지각에서의 재인 능력과 자연적 생성성을 최초로 언급한 것은 노엘 캐롤이다.NoëlCarroll,“ThePowerof movies”,Daedalus,Vol.114,No.4(Fall,1985),p.83.볼하임 역시 자연적 생성성과 유사한 것을 지적한 바 있다.그는 이 현상을 전이(transfer)라고 부른다.Richard Wollheim,PaintingasanArt(1987),p.77.

양이 그림이나 그 일부를 알아보는 법을 배울 필요가 전혀 없다.이 점이 바로 그림 해석과 언어 해석의 차이이다.이는 회화 체계에 관례적인 요소 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더라도,회화 체계가 언어 체계보다 근본적으로 덜 관례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대상 재인만으로는 어떤 그림이 그 대상을 재현한다는 것을 아는 데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예를 들어 미남과 미녀가 일란성 쌍둥이라면,나의 미녀 재인 능력만으로는 어떤 초상화가 미녀를 재현한다는 것을 확정지을 수 없다.그 초상화는 미남의 초상화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재현 대상을 확 정짓기 위해서는 재인 능력과 더불어 그림과 대상 사이의 어떤 적절한 관계 -인과나 의도-가 필요하다.그러나 샤이어가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이 관계 에 대한 지식이 그림에 대한 해석의 원인은 아니라는 것이다.우리가 어떤 그림을 해석할 때마다 그것을 그린 예술가의 의도를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 다.그것은 오히려 내 해석의 결과일 수 있다.화가의 의도란 관찰자가 재인 능력에 의해 그림의 대상을 알아보게 할 의도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우 리는 그저 대상 재인 능력에 의해 그림을 해석할 뿐,이 해석에 선행적인 지식 혹은 그림과 대상을 연결시키는 관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도상에 관계되는 관례는 그저 자연적으로 발생한 해석이 “옳은”것인지의 여부만 결정한다.샤이어는 이러한 관례를 “관례 C”라고 부른다.관례 C는 단지

“어떤 그림 S가 자연적으로 생성된 해석 p를 허용한다면,S는 p를 의미한 다.”라는 것만을 결정하는 관례이다.즉 도상적 해석에 관련되는 관례는 해 석되는 대상이 어떤 인간 행위자의 의사소통적 목적에 기여하는 기능을 하 는 대상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줄 뿐,언어 해석에 필요한 관례처럼 개별적 의미 결정에 관여하는 것이 아니다.도상에 대한 해석은 오직 재인 능력에 만 기반한다.그러나 도상적 지칭은 재인만으로는 결정되지 않을 수 있다.

샤이어는 도상성에 대한 설명과 도상적 지칭에 대한 설명을 구분한다.관례 C는 도상성을 설명할 뿐,그림의 지칭 대상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예술가의 의도나 어떤 종류의 인과성에 대한 지식이 개입되어야 한다.71)

71)FlintSchier,DeeperintoPictures,pp.96-99;pp.132-137.이러한 설명은 사실상 볼하 임의 이론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데 주목하라.볼하임 역시 재현이 성립하기 전의 지

샤이어는 그림 해석이 자연적 생성성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그림에 대 한 해석에 그 대상을 실제로 재인하는 나의 능력이 관계된다는 것을 보여준 다고 말한다.그림과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재인 능력들 사이에는 “겹침 (overlap)”이 있다.72)샤이어도 인정하듯이,이러한 주장은 어떤 의미에서는 재현에 대한 모방론으로 회귀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즉 그림과 그 대상 은 어떤 동일한 재인 능력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닮았다.”그러나 샤이 어는 그림과 대상 사이의 직접적인 모방론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입장을 취 한다.그림과 그 대상 사이에 재인 능력의 겹침이 있는 모든 경우에 있어서 그림과 그 대상이 어떤 측면에서 어느 정도로 닮았는지에 대한 단순하고 일 반적인 설명이 가능한가?모방론은 그림과 그 대상이 어떤 점에서 닮았으 며,어떤 것이 그 대상의 도상이 되기에 충분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닮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쉽지 않은 설명의 부담을 떠안을 수밖에 없다.샤이어는 자연적 생성성이 이런 문제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그림 이 그 대상을 닮은 측면이란 그림과 그 대상이 불러일으키는 재인 능력에 있어서 겹침이 있다는 것이고,내가 그림을 해석할 때 그 대상을 재인하는 능력이 관여하게 될 때에만 나의 해석은 도상적 해석이 된다.물론 유사한 재인 능력이 불러일으켜진다는 것은 대상과 그림이 가지는 유사한 속성들 때문일 수 있다.그러나 샤이어는 그림과 대상이 어떤 점에서 닮았는가,즉 그림과 그 대상이 어떤 세부적인 속성을 공통적으로 가지는가가 반드시 의 식적으로 처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림을 알아보기에 앞서 그 유사성 을 명확히 말할 수 없다고 주장한다.또한 그림을 보는 경험이 대상을 보는 경험과 유사할 필요도 없다.그림이 무엇을 그렸는지에 대한 해석을 자연적 으로 발생시킬 수만 있다면,그 그림은 대상과 충분히 닮은 것이다.샤이어

각 경험인 “안에서-보기”에 주목하고,안에서-보기에서 재현이 되기 위한 조건으로 화 가의 의도를 말한다.그러나 샤이어는 볼하임과 달리 그림에 대한 설명에는 그림 경 험의 현상적 특징보다는 그림 해석의 자연적 생성성이 근본적이라고 본다.샤이어가 말하는 자연적 생성성은 그림 해석에 관한 기능적인 설명일 뿐 그 그림을 경험한다 는 것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말해주는 바가 없다.그는 회화 경험은 회화적 재현에 관 한 적절한 이론에 의해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Ibid.,p.205.

72)Ibid.,p.187.

의 설명은 이러하다.우리의 재인 능력의 어떤 부분은 우리 앞에 있는 복숭 아 그림이 실제 복숭아라는 가설을 품는 반면 다른 부분은 평평한 표면에 표시가 되어 있는 것뿐이라는 가설을 품는다.그리고 후자의 해석이 더 나 은 근거가 있기 때문에 승리하고 “이것은 (복숭아가 아닌)복숭아의 그림이 다”라는 해석이 의식에 떠오른다.73)

이러한 샤이어의 설명은 지각의 인과 이론에 직ㆍ간접적으로 기대고 있 다.지각의 인과 이론에 따르면 대상에 대한 나의 지각은 그 대상으로부터 인과적으로 발생한 것이다.내가 만약 어떤 대상을 본다면 그 대상은 나의 지각에 인과적으로 책임이 있다.따라서 어떤 지각 표상이 어떤 개별적 대 상에 대한 것이기 위해서는 그 대상을 추적해야 한다.즉 대상이 달라진다 면 나의 지각도 달라진다.샤이어는 이와 평행한,도상적 지칭에 관한 인과 이론을 주장한다.어떤 그림이 어떤 대상의 그림이기 위해서는,대상이 그 그림에 인과적으로 책임이 있어야 한다.즉 대상의 특징이 달라진다면 그림 의 특징이 달라져야 한다.도상적 해석 역시 인과적으로 설명된다.그림이

73)Ibid.,p.192.그러나 샤이어 자신도 인지하고 있듯이 이러한 주장은 이른바 “난쟁이 가설”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판의 여지가 있다.우리의 시각 체계가 가설들을 품고 증거에 의해 그 중 어느 한 쪽의 가설을 수용하기로 결정한다는 설명은 우리 내부에서 가설을 품고 판단하는 난쟁이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것을 가정하는 듯 보 이기 때문이다.난쟁이 가설의 문제는 그것이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않는다는 것이 다.우선,난쟁이와 같은 존재는 제 3자의 관찰에 의해서나 1인칭적으로나 접근불가 능하기 때문에 경험적으로 건전하지 못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우리는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이 복숭아라는 가설을 품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한다고 가정되기 때문이 다.그러나 샤이어는 이론이 반드시 관찰 가능한 설명항만을 가질 필요는 없으며, 이론의 결과가 경험적으로 검증가능하기만 하면 경험적으로 적법하다고 주장한다. 쟁이 가설에 대한 더 큰 비판은,그것이 정확히 우리가 설명하고자 하는 바를 설명해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복숭아를 지각하는 난쟁이를 상정하는 것은 “우리가”복숭아 를 본다는 사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그러나 샤이어는 자신이 이러한 조야한 난쟁이 이론을 상정하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한다.우리가 복숭아 그림을 본다는 사실 을 설명하기 위해서 다양한 시각적 단서들을 처리하는 난쟁이를 상정한다는 것이 그 난쟁이 자신이 시각적 경험을 하기를 반드시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여기서 상정되는 난쟁이는 단지 눈으로부터 입력되는 어떤 시각적 단서들을 추적하고 어떤 프로그 램”을 사용하여 이 단서들을 처리하는 하나의 메커니즘일 뿐이다.샤이어는 묘사에 대한 이러한 주장은 결국 심적 활동에 대한 어떤 계산주의적 혹은 인지주의적 이론 을 받아들이기를 요구한다고 생각한다.Ibid.,pp.192-1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