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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현이란 무엇인가?굿맨은 “어떤 그림이 재현하기 위해서는,그 그림은 대상에 대한 상징이며,그 대상을 대리하고(stand for)지칭(referto)해야 한 다.”라고 말한다.120)이에 따르면 재현의 핵심은 자신이 아닌 다른 어떤 것 을 가리키는 데 있다.회화적 재현에 대한 많은 이론들은 회화적 재현 역시

“재현”혹은 “지시”라는 점에 초점을 두고,회화적 재현을 이러한 기능 내 에서 정의하고자 한다.그러나 과연 회화적 재현이 대상에 대한 지시로서 설명될 수 있는가?언어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지시는 그 본질을 이룬다.

“사과”라는 말은 단지 외부의 사물인 사과 혹은 사과라는 개념을 가리키는 기호일 뿐이며 언어에서 그 지시 기능을 빼고 나면 아무 것도 남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 역시 그러한가?본고는 회화적 재현이 지시한다는 사실에 대해

120)Goodman,LanguagesofArt,p.5.

서 반론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회화적 재현이 지시 내에서 완전히 설명될 수 없음을 주장하고자 한다.

로페스는 “그림은 본질적으로 정보의 저장,조작,소통을 위한 매체이다.

...그림은 세계와 그에 대한 우리의 사고를 재현하는 데 있어서 언어의 짐 을 나눠가진다.”라고 말한다.121)이러한 주장은 그림을 근본적으로 언어와 같은 의사소통을 위한 지시의 매체로서 정의하고자 하는 입장을 잘 보여준 다.그림과 언어의 본질적인 기능은 대상을 지시하는 것이며 그림은 그 기 능을 하기 위해서 인간의 지각적 능력을 발휘하도록 한다는 점에서 언어와 다를 뿐이다.그러나 이러한 입장에 의문을 제기하는 이론가들이 있다.먼 저,재현을 그림의 수많은 “사용”방식들 중의 하나로서 이해하고자 하는 노비츠의 시도를 살펴보자.

노비츠122)는 그림은 굿맨이 말하듯이 일차적으로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어떤 것을 지시한다는 것은 그것을 대리하고 대표한다는 것이며 그러기 위해서는 대상이 존재해야 한다.그러나 그림의 대상이 반드시 존재 해야 할 필요는 없다.그는 굿맨이 든 검은 말 사진의 예를 든다.멀리서 달 려오는 검은 말을 카메라로 찍었으나 사진에서 그 말이 단지 밝은 점으로 나타난다고 해보자.그 그림은 검은 말을 지시할 뿐 검은 말을 검은 말로서 재현하지는 않는다.굿맨에 따르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그림은 검은 말을 재현하는 그림으로 간주될 수 있고,따라서 검은 말의 그림으로 간주될 수 있다.123)그러나 노비츠는 이 사진이 검은 말을 지시하는 것은 그것이 그림 이기 때문이 아니라 검은 말과 인과적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한다.만약 어떤 것이 사진에 나타난다면 그에 인과적으로 책임이 있는 하나의 개별적인 존재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그러나 손으로 그린 그림은 이러한 존재적,인과적 요구를 함축하지 않는다.검은 말 그림은 검은 말 사 진과 달리 어떤 하나의 검은 말을 지시할 필요가 없으며 검은 말이 존재하

121)Lopes,UnderstandingPictures,p.7.

122)David Novitz,Pictures and their Use in Communication(The Hague:Martinus Nijhoff,1977),pp.4-5.

123)Goodman,LanguagesofArt,p.29.

기를 요구하지도 않는다.노비츠는 그림에서 우선적인 것은 그림의 지시가 아니라 그림의 종류라고 주장한다.개를 그린 그림은 단지 개-그림일 뿐 반 드시 어떤 개를 지시해야 할 필요가 없다.124)노비츠는 그림이 상징하는 데

“사용되지”않고도 대상을 상징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어떤 것의 그림이라 는 말 자체에는 그 대상을 상징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지 않다.일반적 으로 인공물들은 다른 것들을 상징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서는 상징하지 않 는다.만년필,전기 난방기,사전 등은 일상적으로 무엇인가를 상징하지 않 지만,어떤 상황,게임,맥락 안에서는 보병,군대 막사,전차 등을 상징할 수 있다.그림 역시 마찬가지가 아니라고 생각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그 림 <모나리자>는 어떤 지역을 상징하기 위해 사용될 수도 있고,구혼 연습 의 상대로 사용될 수도 있으며,이탈리아 정신의 상징으로 사용될 수도 있 다.그러나 그 그림이 그림의 모델이 된 여인의 모습을 상징하는 데 사용된 다면,그것은 그림 그려진 대상을 회화적으로 재현하는 데 사용되는 것이다. 어떤 것을 회화적으로 재현한다는 것은 그림 그려진 바에 대한 정보를 소통 하는 데 그림을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그림을 이용한 이러한 의사소통 행위들은 비-언어적인 언표내적 행위로서 이해될 수 있다.125)즉 회화적 재 현은 그림이 무엇인가를 상징하는 데 사용되는 다양한 방식들 중 하나일 뿐,그림 자체와는 구분된다.노비츠의 주장은 그림이 상징을 위해 만들어지 는 것이 아니며 따라서 일차적으로 존재하는 어떤 대상을 재현하기 위한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그는 그림을 언어와 같은 기호의 한 종류로 바라보기 보다는 그저 인공물의 한 종류로서 바라보고자 한다.

월튼 역시 재현의 개념에 대상은 본질적인 요소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 재현이 그 대상과의 어떤 의미론적 관계,말하자면 지시로서 설명되는 데에 반대한다.월튼의 재현 이론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 고,우선은 월튼의 이론이 재현을 대상과의 관계로서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어떤 활동-“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사용되는 기능으로서 정의한다는

124)노비츠는 어떤 그림의 종류를 결정하는 것은 “닮음”이라고 보고 있지만,닮음에 대 해서는 본 논문 Ⅰ장에서 다룬 바 있으므로 다시 논하지 않기로 하겠다.

125)Novitz,op.cit.,pp.6-8.

파울 클레 <학자>(1933)

데 주목하기로 하자.126)월튼의 주장은 재현하 기 위해서 반드시 어떤 대상을 지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예를 들어 파울 클레의 <학 자>라는 그림은 실제로 존재하는 그 어떤 학 자도 지시하지 않는다.재현되는 학자는 단지 그 그림 속에 존재하며,그의 속성은 오로지 그림 속에 재현된 바에 의존한다.그렇게 묘사 되지 않았다면 그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러한 특징을 가지지도 않았을 것이기 때문 이다.이러한 점에서 재현은 언어적 지시와 대 조를 이룬다.“나폴레옹”,“그렌델”과 같은 이 름들이나 “에베레스트 산을 오른 첫 번째 사

람”등의 언어적 지시 표현들은 그 지시하는 역할로서 이해되며,실제로는 아무 것도 지시하지 않더라도 근본적으로 “지시적”이라는 데에는 변함이 없 다.그러나 재현은 이러한 의미에서 지시적일 필요가 없다.월튼은 다음과 같은 사고실험을 제안한다.예술가들이 동물과 사람들의 그림을 만들어내기 는 하지만 실재하는 동물과 사람들을 그리지는 않는 사회를 상상해 보자.

이러한 사회에서 그림은 지시하지 않으며,지시하고자 하지도,혹은 지시하 는 척 하지도 않는다.들소를 그리는 것은 상상적인 들소를 창조해내거나 만들어내는 것으로 여겨지지,이미 존재하는 들소를 상징하거나 지시하는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다.그러한 사회에서 그림은 절대로 지시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그림들은 재현적이다.127)월튼은 허구적 대상은 그들을 재현하는 작품과 독립적이지 않다는 점에 주목한다.반면 존 재하는 재현의 대상은 그들을 재현하는 작품과 독립적이다.그리고 이러한 사실은 재현을 원칙적으로 지시적인 언어를 기반으로 하여 이해하는 것을

126)노비츠와 월튼 모두 회화적 재현이 본질적으로 지시라는 것을 거부하지만,노비츠 가 재현 자체와 재현의 (지시적)사용을 구분하는 데 비해,월튼은 재현 자체를 어떤 (비지시적)사용으로서 설명한다는 데서 차이가 있다.

127)Walton,MimesisasMake-Believe,pp.122-125.

망설이게 한다.월튼의 제안은 이러하다.우리는 작품이 대상을 만들고 또 지시한다고 말할 필요가 없다.작품이 대상을 만들어냈다고 말하고 나면,작 품이 그것을 지시한다고 덧붙이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128)

비록 월튼과 노비츠는 무엇이 그림을 구성하는지에 대해서는 서로 다른 입장을 취하지만,그림에서 지시는 근본적인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점 에 있어서는 같은 노선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이들의 공통되는 주장은, 회화적 재현의 이론은 언어 이론과 유비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나 많은 이론가들은 회화적 재현의 이론 역시 언어 이론만큼의 체계를 갖추기를 바 라면서 재현을 언어에 유비시키기 위해 애쓴다.월튼에 대한 로페스의 반론 을 살펴보자.

로페스는 월튼의 주장은 모든 그림을 불교에서 신성시하는 불상 이미지와 같은 “대체물(substitute)”로서 간주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로페스의 주된 비판은,그림의 뜻(sense)은 월튼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림의 대체물로서의 사용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이다.앞서 월튼이 제안한 사고실험을 다시 한 번 상기해 보자.로페스는 사람들이 피아자(Piazza)광장의 그림,비둘기 그 림,오페라 스타 그림 등을 만들어내지만 실제 피아자 광장이나 비둘기나 오페라 스타를 지시하는 데 사용되는 그림을 만들어내지는 않는 사회를 월 튼의 이름을 따서 “월토피아(Waltopia)”라고 이름 붙인다.로페스가 월튼의 주장에 대해 들고 있는 반례는 두 가지이다.첫째,언어가 지시하지 않는 세 계(언어적 월토피아)를 상상 가능하다는 것,둘째,그림이 항상 지시하는 세 계(회화적 반-월토피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이다.언어적 월토피아에서 모든 이름들은 대체물로서만 간주되고,언어적 수단은 대상과 속성들을 기 술하기 위해서 사용되는 것이 아니라 대상들과 속성들을 환기시키기 위해서 만 사용된다.로페스는 첫째,이러한 사회에서 언어는 지시하는 데 사용되지 않기 때문에 그 뜻이 지시적 사용에 의존하지 않는다고 말한다.그러나 둘 째,그렇다고 해서 언어의 “진지한”사용과 뜻이 필연적으로 대체물로서의 사용으로부터 이끌어내어진다고 결론내리는 것은 성급하며,월튼이 그림의

128)Ibid.,p.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