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에서 필자는 회화적 재현에서 본질적인 것은 지시가 아니라 그 지각성, 그 중에서도 볼하임이 말하는 “안에서-보기”로 성격화될 수 있는 시각적 경 험이라고 주장했다.그러나 이 말은 회화적 재현이 어떤 의미론적 관계라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우리는 그림 안에서 무엇인가를 보며,그 보이 는 바가 그림의 의미에 기여한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그러나 그림이 그 의미를 “만들어내는”메커니즘이 언어가 의미를 “전달하는”메커니즘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인정한다면,회화적 재현의 의미론적 관계를 굳이 언 어와 그 대상 사이의 의미론적 관계에 의존하여 설명할 필요가 없게 된다. 따라서 회화적 재현과 그 대상 사이의 관계를,“지시”대신 반드시 실제 대 상을 지시해야 한다는 함축이 없는 “재현”의 관계라 부르기로 하자.그렇다 면,이러한 “재현”은 어떤 종류의 관계인가?135)
굿맨은 그림의 종류와 그것이 재현하는 바가 일치한다는 순진한 관념을 비판한다.그는 그림의 종류와 그림이 재현하는 바는 서로 독립적이라고 주 장한다.그림의 종류가 “안에서-보기”로서 성격화될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 인다고 할 때,이는 안에서-보기와 재현이 독립적이라는 주장이 된다.그러 나 과연 그러한가?앞서 노비츠가 주목한 굿맨의 검은 말 사진의 예를 생각 해 보자.노비츠가 지적하듯이,이 경우 멀리에 있는 밝은 점이 찍힌 사진이
135)월튼이 제안하고 또 비판하는 한 가지 가능성은,재현을 술어 즉 속성 부여로 보는 것이다.예를 들어 부동산 광고에서 보이는 “메이플 애비뉴 1360”이라는 제목이 붙은 벽난로가 있는 이층집 그림은 그 주소지의 집을 지시할 뿐만 아니라 그 집이 2층이 고 벽난로가 있는 것으로 재현한다.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첫째,허구적 그림의 경우 속성을 부여할 대상이 존재하지 않고,둘째,그림이 지시하는 대상에 속성을 부여한 다는 규정이 없는 사회에서는 그림이 반드시 어떤 대상에 속성을 부여해야 하는지가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설득력이 없다.Walton,“AreRepresentationsSymbols?”,The Monist(1974),pp.251-252.;MimesisasMake-Believe,pp.127-129.
검은 말을 재현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은 실제 검은 말과 인과적으로 연결되 어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이 사진이 사실은 사진이 아니라 그림이라고 생 각해 보자.멀리에 밝은 점이 그려져 있는 그림은 검은 말을 재현한다고 할 수 있을까?또는 노비츠가 드는 다음의 예를 생각해 보자.구약 성서에 나 오는 소금 기둥으로 변한 롯의 아내를 그린 그림이 있다고 해 보자.그 그 림은 소금-기둥-그림이면서 롯의 아내의 그림이라고 할 수 있을까?이 두 경 우는 모두 그림이 그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재현하는 경우이다.노비츠 는 후자의 그림을 롯의 아내의 그림이라고 말한다면,그것은 우리가 그림과 그림의 사용을 혼동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그에 따르면 이 그림은 롯의 아내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주기(illustrate)위해서 사용됨으로써 롯의 아내를 재현한다고 할 수 있지만,소금 기둥의 그림일 뿐 롯의 아내의 그림이 아니 다.136)그러나 이를 인정한다면,안에서-보기와 재현은 필연적 관계가 아니 게 된다.그림 안에서 a를 본다 해도,우리는 그 그림을 b를 재현하는 데 사 용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그러나 어떤 그림이 무엇인가를 재현한다고 말할 때,우리는 단지 그 그림을 재현에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아닌 것 같 다.불타고 있는 도시를 탈출하는 가족들 뒤에 서 있는 소금 기둥을 그린 그림은,단지 롯의 아내와는 아무런 상관없는 것의 그림이 롯의 아내를 재 현하는 데 사용되었다기보다는 롯의 아내를 재현하는 그림이 아닐까?그렇 다면 어떻게 그 안에서 소금 기둥이 보이는 그림이 롯의 아내를 재현하게 되는가?그것은 우리가 그 그림 안에서 “소금 기둥이 된 롯의 아내”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마찬가지로,멀리에 밝은 점이 그려진 그림이 검은 말을 재현한다면,그것은 우리가 그 그림 안에서 “밝은 점으로 보이는 검은 말”
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137)어떤 그림이 무엇인가를 재현하기 위해서는,재 현하는 것을 그 그림 안에서 볼 수 있어야 한다.즉,안에서-보기는 재현의 필요조건이다.
136)Novitz,PicturesandtheirUseinCommunication,p.18.
137)회화적 재현에 지각이 필수적인 요소라고 간주하는 이론이라면 이 점에 대해서 동 의해야만 할 것이다.Walton,MimesisasMake-Believe,p.297n;Lopes,Understanding Pictures,p.98;Wollheim,“Nelson Goodman’sLanguagesofArt”,TheJournalof Philosophy67,no.16(Ag.1970),p.538.
그러나 안에서-보기가 재현의 충분조건이 될 수는 없다.우리는 구름 안에 서 무엇인가를 볼 수 있으나,구름은 재현이 아니다.이 점은 자연물이 아닌 인간이 그린 그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감상자들은 때때로 그림이 재 현하지 않는 것들을 그림 안에서 볼 수 있다.우리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성 안나와 함께 있는 성 모자상>안에서 프로이트가 주장하는 대로 독수 리를 볼 수 있다 해서 그 그림이 독수리를 재현하는 것은 아니다.그림이 재현한다는 것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의 산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아무 생각 없이 종이에 끄적거린 결과물이 사람의 얼굴처럼 보인다 해서 그것이 사람 얼굴의 재현이 되지는 않는다.어떤 것이 우연히 안에서 보이게 되는 것과 의식적으로 어떤 것을 안에서 보이게 하려는 의도 를 가지고 그림을 그리는 것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그리고 후자의 결과물 만이 재현이라고 할 수 있다.이런 점에서 재현은 재현하고자 하는 의도를 전제해야 한다.
볼하임은 회화적 재현의 본질은 안에서-보기라는 지각적 경험이지만,재현 이 되기 위해서는 “옳음의 기준(standard ofcorrectness)”이 필요하다고 말 한다.138)『햄릿』에 나오는 햄릿과 폴로니어스의 대화를 상기해 보자.“혹 시 경의 눈에도 저기 떠 있는,낙타 모양을 한 구름이 보이는가?”“정말 낙 타 같군요.”/“아니 내 생각에는 족제비 같군.” “등이 족제비 같군요.”/“아 니,고래 같기도 하고.”“정말 고래 같군요.”139)이 점은 구름이 아니라 그림 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하나의 그림은 낙타나 족제비,또는 고래 처럼 보일 수도 있다.그러나 그 그림이 무엇을 재현하는가는 화가가 무엇
138)Wollheim,Paintingasan Art,p.48.볼하임은 사진의 경우 옳음의 기준으로 의도 만큼이나 인과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말한다.어떤 엑스트라 배우가 공작부인의 모 습으로 분장하고 사진의 모델이 되었다고 해보자.이 사진을 사진으로 보는 이상 이 사진은 엑스트라 배우의 사진이지 공작부인의 사진이 아니다.그러나 사진은 회화적 재현으로 “사용될”수 있다.이 경우 재현하고자 하는 이의 의도에 따라 그 사진 안 에서 배우가 아닌 공작부인을 보는 것이 옳을 수 있다.이때 사진은 더 이상 사진으 로 간주되는 것이 아니라 재현적 그림으로 간주된다.Wollheim,“Seeing-as,Seeing-in and Pictorial Representation” in Art and its Objects,2nd edn. (Cambridge: CambridgeUniversityPress1980),pp.208-209.
139)『햄릿』 3막 2장 중.
을 재현하고자 했는가에 달려 있다.화가가 고래를 재현하고자 의도했고,우 리가 그림 안에서 고래를 볼 수 있으면,그 그림은 고래를 재현한다.그러나 화가의 의도가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할 수는 없다.개를 그렸으나 아무리 어떤 상황에서 보이는 개라는 화가의 설명을 들어도 그렇게 보이지 않는 경우,그 그림은 그 안에서 개가 보이게 하는 데 실패한 것이고 따라 서 개를 재현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반대로,그림 안에서는 분명히 개가 보 이는데 화가는 말을 재현하려는 의도였다고 해보자.이 그림은 그 안에서 말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말을 재현하지 못할 뿐 아니라,개를 재현하지도 못한다.화가의 의도는 그 그림 안에서 개가 보이는 것이 틀렸다는 것을 결 정하는 기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즉 화가의 의도는 안에서 보이는 것이 맞는지 틀렸는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될 뿐,안에서-보기를 미리 정해 주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점이 있다.화가의 의도는 안에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지는 못할지라도 안에서-보기를 구체화할 수는 있다.볼하임은 사고의 침투성이야말로 그림 안에서-보기의 핵심적인 특징이라고 본다.그가 드는 다음의 예를 보자.나는 폐허가 그려져 있는 전통적인 풍경화를 보고 있고,누군가가 나에게 묻는다.“저 기둥들이 보이는가?”나는 “네.”라고 대 답한다.그리고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신전에서 나온 저 기둥들이 보이는가?”“네.”/“신전으로부터 버려진 저 기둥들이 보이는가?”“네.”/“수 백 년 전에 신전으로부터 버려진 저 기둥들이 보이는가?” “네.”/“수백 년 전에 이교도들에 의해 신전으로부터 버려진 저 기둥들이 보이는가?”
“네.”/“수백 년 전에 당나귀 가죽을 걸친 이교도들에 의해 신전으로부터 버 려진 저 기둥들이 보이는가?”나는 잠시 생각하다가 “아니요.”라고 대답한 다.볼하임은 이 대화에서 “네.”가 의미하는 것은 질문자의 암시가 그림 안 에서 보이는 것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이라고 지적한다.그러나 마지막 질문 에 “아니요.”라고 대답한 것은,사고가 안에서-보기를 변화시키는 데 제한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140)
140)Wollheim,“OnPictorialRepresentation”,p.2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