듯이 실제 대상을 그린 그림과 허구적 그림에 대해 원칙적으로 다른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는가?또,실제 대상의 그림으로 알았던 것이 실제 대상의 그 림이 아닌 허구적 그림으로 밝혀졌다면 그 그림에 대한 태도가 갑자기 그것 이 실제 대상을 그린 것이라고 믿는 체하기로 변하는가?필자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 그림이 실제 대상을 보고 그린 것 이라는 전제를 하지 않는다.그림을 볼 때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 이 실제의 기록이라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보이는 대상이다.즉 그림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어떤 상황의 기록이 아니라 상황 자체이다.우리는 그 저 그림 속에서 어떤 대상과 장면들을 보고 있으며,그림은 일차적으로 어 떤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따라서 그림 안에서 보이는 것들이 실제 대상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그것들이 갑자기 신용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허구적 그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런 대상이 있고 그것을 그린 것이라고 믿는 체한다기보다는 그저 화가가 그림을 그림 으로써 그 모습을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실제 대상이 모델로서 작용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모든 그림에 모델이 존재하고 그림은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는 전제를 하지는 않는다.본고는 그림에는 정보전달의 기능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고자 한다.이제 그림과 정보전달 사이의 전반적인 관계에 대 해 고찰해 봄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로 하겠다.
지 않은 자료가 효과적으로 암호화되고 전달될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지 는 수학적 접근과는 달리,정보에 대한 의미론적 접근에서는 무엇인가에
“관한”것으로서 “해석”될 수 있는,의미 있는 내용으로서의 정보에 관심을 가진다.따라서 의미론적 정보는 일반적으로 기호나 상징이 담고 있는 의미 론적 내용과 동일시된다.의미론적 정보는 언어나 정보 수용자와 독립적으 로 의미론적 내용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객관적일 수 있다.예를 들어 이집트 상형문자는 로제타석이 발견되어 해독이 가능해지기 이전에도 이미 정보를 담고 있었다고 간주될 수 있다.그러나 의미론적 정보는 보다 강한 의미에서 객관적인,이른바 “환경적 정보(environmentalinformation)”와 구 분된다.환경적 정보란 지적인 정보 생산자 혹은 정보 제공자와 독립적으로 그 자신의 의미론을 가질 수 있는 정보를 말한다.환경적 정보의 가장 대표 적인 예로는 나무의 나이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나이테를 들 수 있다.
기호나 상징이 담고 있는 정보가 그것을 생산해내는 지적인 주체를 필요로 하는 데 비해,나이테의 정보는 지적인 정보 생산자와 독립적으로 성립한다.
인간과 같은 고차원적 인지 능력이 없는 식물이나 동물,또는 카메라와 같 은 기계장치 등도 이런 의미에서는 정보를 수신하고 처리한다고 말할 수 있 다.102)
그림이 언어와 같은 의미론적 정보 전달 매체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 을 것이다.사실상 그림은 정보 전달에 매우 유용하게 사용된다.예를 들어 레고 블록 조립 설명서에 있는 그림은 어떤 블록을 어느 위치에 어떤 방향 으로 끼워 넣어야 하는지에 대해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으로 전 달해줄 수 있다.그러나 그림의 본질을 정보 전달 매체라는 점에서 찾는 이 론에서는 그림을 언어와 같은 의미론적 상징으로서 본다기보다는 환경적 정 보를 구현하는 매체로서 간주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그림은 자연 상태 의 연속성을 지닌 시각적 정보를 인간의 지적인 분류와 개념화를 거치지 않
102) Luciano Floridi, “Information” in The Blackwell Guide to the Philosophy of Computing and Information,edited by L.Floridi(BlackwellPublishing,2004),pp.
40-61.임일환은 의미론적 정보와 환경적 정보를 각각 주관주의적 정보와 객관주의적 정보로 구분하기도 한다.임일환,「정보 지식 인지 개념」,『정보 사회의 철학적 진 단』(철학과 현실사,1999),pp.37-72.
고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할 수 있다는 데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특 히 그림이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 혹은 그림이 전달하는 정보의 특징은 언어 가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나 언어가 전달하는 정보의 형태와 비교함으로써 더 명료해진다.이러한 이론에 따르면 디지털적이고 개념적인 정보를 전달 하는 언어와 달리 그림은 아날로그적인 정보 혹은 비개념적인 정보를 전달 한다는 점에서 언어와는 완전히 다른 정보 전달 매체로 분류될 수 있다.
앞서 우리는 그림을 아날로그적 상징으로서 정의하는 굿맨의 이론을 살펴 보았다.그러나 그림을 아날로그적이거나 비개념적인 정보 전달 매체로 보 는 이론은 그림을 상징으로 간주하는 이론과는 다른 관점을 취한다.그림을 상징으로서 본다는 것은 그림을 언어와 같이 인간이 세계를 개념화하는 수 단으로서 보는 것이며 인간이 상징을 사용하는 관례에 따르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그러나 그림을 아날로그적이고 비개념적인 정보 전달 매체로 본다 는 것은 그림을 인간의 지적인 개념화 과정을 거칠 필요가 없는,인과적이 고 전의식적인 과정의 결과로 보는 것이다.이러한 점에서 정보 기반 묘사 이론은 그림을 언어에 유비시키는 상징 이론과는 완전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이론의 근저에는 그림이 전달하는 정보 혹은 정보를 전달하는 방 식이 우리의 지각 시스템이 환경에 대해 전달하는 정보 혹은 그러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과 유사하다는 관념이 자리하고 있다.우리의 지각 상태가 세 계를 표상하는 방식은 믿음이나 욕구와 같은 고차원적인 명제 태도가 세계 를 표상하는 방식과 다르다고 주장하는 일련의 이론들이 있어왔으며,이러 한 차이를 설명하는 유용한 개념들이 바로 아날로그와 디지털,혹은 비개념 성과 개념성이다.103)정보 기반 묘사 이론에서는 그러한 차이를 바로 그림이
103)비개념적 심적 내용이라는 것이 존재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쟁은 최근 분석철학 내에서 가장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논쟁들 중 하나이다.이른바 “비개념주의자”들은 어떤 심적 상태,특히 지각의 초기 단계가 표상하는 내용은 주체가 가지는 개념의 레 퍼토리를 넘어설 수 있다고 주장한다.1980년대 드레츠키,에반스 등에 의해 촉발된 비개념주의는 그에 찬성하는 이론들과 반대하는 이론들,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는 이론들 사이에서 아직도 혼란스러운 상태이다.그러나 본 고는 그림이 전달하는 정보가 비개념적 심적 내용과 유비될 수 있다는 주장을 지지
전달하는 정보와 언어가 전달하는 정보의 차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보고,그 림이 전달하는 정보는 지각이 표상하는 정보와 같이 아날로그적이거나 비개 념적인 정보라고 주장한다.
우선,인간의 인지 과정을 정보 처리라는 관점에서 바라보면서 아날로그 적 정보와 디지털적 정보의 구분을 그림과 진술의 차이로 설명하고 있는 드 레츠키의 이론을 살펴봄으로써 아날로그 정보라는 개념이 그림이 전달하는 정보를 설명할 수 있는지 고찰해 보자.드레츠키는 지각을 비롯한 인간의 인지 활동을 아날로그 형태로 주어지는 환경적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변환 하는 과정으로서 보고,디지털 정보와 아날로그 정보의 차이점을 다음과 같 이 설명한다.그에 따르면 어떤 신호가 “s는 F이다”라는 정보를 전달할 때, 그 신호가 s가 F라는 사실에 이미 내포되어(nested)있지 않은 어떤 부가적 인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디지털 형태로 정보를 전달한다.그러 나 어떤 신호가 s는 F라는 사실에 내포되어 있지 않은,s에 대한 부가적인 정보를 전달한다면 그것은 그 사실을 아날로그 형태로 전달하는 것이다.예 를 들어 “이 컵 안에는 커피가 들어 있다.”라는 진술은 문제의 컵 안에 커 피가 들어 있다는 정보 혹은 그 정보에 이미 내포된 정보-이를테면 컵 안에 어떤 액체가 들어 있다는 정보-외에는 어떤 부가적인 정보도 전달하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디지털 형태로 전달한다.반면,그 컵이 있는 장면을 찍은 사 진은 컵 안에 커피가 들어 있다는 정보 외에 그 컵에 들어 있는 커피의 양 이 어느 정도인지,얼마나 진한 커피인지,컵의 모양과 크기와 색이 어떠한 지 등까지도 알려주게 되므로 아날로그 형태로 정보를 전달한다.104)
드레츠키가 이처럼 아날로그와 디지털 정보를 구분하는 것은 감각은 그 표상 형태에 있어 아날로그이고 지각 혹은 판단과 믿음은 디지털이라는 주 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이다.필요한 정보 외의 수많은 부가적인 정보들까 지 혼재되어 있는 아날로그 상태인 감각이 분류되고 처리되면 보다 높은 인 지적 단계에서 필요한 정보가 디지털 형태로 추출된다.드레츠키는 s는 F라
하는 것이 아니므로,본고가 비개념적 심적 내용의 존재 여부에 관한 논쟁에 개입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104)Fred I.Dretske,KnowledgeandtheFlow ofInformation,MITPress(1981),p.1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