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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튼은 회화적 재현을 지시와 분리시키며,재현은 대상과의 관계에 의해 정의되는 의미론적 개념이 아닌 화용론적 개념이라고 주장한다.그는 재현 을 그 그림을 가지고 하는 경험으로써 설명해야 한다는 데에는 동의하지만, 그 경험은 지각적인 만큼이나 상상적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이는 재현 일반 을 상상하기를 불러일으키는 기능을 하는 “허구(fiction)”로서 바라보고자 하 는 그의 기본 입장에서 비롯된다.

월튼은 재현적 작품을 “그것의 기능이 믿는 체하기(make-believe)게임에 서의 소도구(prop)인 사물들”로서 정의한다.178)월튼은 아이들이 장난감 트 럭이나 인형을 가지고 노는 행위들에서 믿는 체하기 게임의 개념을 가지고 온다.아이들은 인형이 마치 아기인 것처럼 믿는 체하면서 엄마놀이를 하고 장난감 트럭을 진짜 트럭으로 믿는 체하면서 장난감 놀이를 한다.이 때 인 형이나 장난감 트럭은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의 소도구가 된다.우리는 하늘 에 떠 있는 구름을 보면서 코끼리를 본다고 상상하기도 하고 별자리를 보면 서 궁수를 본다고 상상하기도 하지만,인형과 장난감 트럭이 구름이나 별자 리와 다른 점은 그것들이 어떤 기능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178) Kendall L. Walton,Mimesis as Make-Believe: On the Foundations of the RepresentationalArts,HarvardUniversityPress(1990),pp.52-53.

어떤 기능을 한다는 것은 어떤 사회적 집단 내에 그러한 목적을 위해 사용 하는 전통이나 일반적 관행,또는 관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월튼은 이 러한 종류의 기능이 재현적 예술 작품들에도 적용된다고 주장한다.이러한 면에서,회화적 재현에 대한 월튼의 주장은 관례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다.

재현적 예술 작품은 어떤 기능을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것이며,재현적 예 술 작품이 그러한 기능을 하게 되는 것은 사회적 규칙이나 관례에 의해 확 립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재현 작품이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의 소도구로서 기능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그것은 모든 재현 작품은 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다.예를 들어 <그랑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라는 그림은 한 커플이 공원에 서 산책하고 있다고 믿는 체하는 게임에서의 소도구가 되며,또 한 커플이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다는 허구적 참을 발생시킨다.이렇게 보았을 때,월튼 은 모든 재현 작품을 믿는 체하기 게임에서 허구적 참을 발생시키는 것으로 서 간주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시각적 재현 작품을 가지고 하는 게임은 특별한 종류의 상상 하기를 포함한다.우리는 그림을 보면서 그 그림이 발생시키는 허구적 참을 믿거나 안다고 상상하는 것뿐만 아니라 “본다고”상상한다.우리가 인형을 가지고 믿는 체하기 게임을 할 때 인형에 대한 게임의 세계가 있는 것처럼, 관람자가 그림을 가지고 하는 게임의 세계가 있다.관람자로서의 우리는 그 림의 세계 안에 속하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그 그림 속 장면을 보는 게임 세계에 속함으로써,우리가 그림 속 장면을 보고 있다는 허구적 참을 발생 시킨다.따라서 우리 자신은 우리의 게임 안에서 재귀적 소도구가 된다.우 리는 그림을 감상하는 순간 자동적으로 허구 세계에 들어가게 되어,그림을 보는 행위는 허구적으로 그림 속 장면을 보는 행위가 된다.179)

월튼은 볼하임이 말하는 “안에서-보기”의 특별한 현상적 특징이 바로 본 다고 상상하기로써 설명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우리가 그림 안에서 어떤 장면을 볼 때,우리는 시각적 믿는 체하기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다.그

179)Ibid.,pp.215-217.

림 경험이 특별한 것은 그림을 보는 것이 그 대상을 보는 것이라는 상상이 그 경험에 침투한다는 점 때문이다.내가 호베마의 <빨간 지붕의 물레방앗 간>을 보면서 물레방앗간을 본다고 상상하는 것은 캔버스의 관련 특징들을 알아차리기 때문이다.그러나 나는 소설을 읽으면서 그 주인공의 모습을 떠 올리는 것과 같이 단지 실제로 캔버스를 보는 것의 결과로서 물레방앗간을 본다고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캔버스를 보는 행위가 물레방앗간을 보 는 행위라고 상상하는 것이며,이 상상하기는 캔버스에 대한 시각 경험의 필수적인 부분이다.즉 그림을 보는 경험 안에서-보기와 상상하기는 서로 상 호 침투한다.월튼은 이것이 바로 볼하임의 “이중성”이 의미하는 바라고 주 장한다.180)

그러나 볼하임은 이러한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는다.그것은 다음의 두 가 지 이유에서이다.첫째,본다고 상상하기는 안에서-보기가 특별한 종류의 시 각적 경험이라는 점을 포착하지 못한다.월튼의 이론에서 재현 작품이 소도 구로서 기능하는 믿는 체하기 게임은 반드시 어떤 사회적 규칙 하에서 일어 난다.이는 그 게임 안에서 어떤 명제를 허구적으로 만드는 관례,이해,동 의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즉 그림의 외양과 우리가 본다고 상상 하는 것은 관례적으로 연결된다.따라서 본다고 상상하기는 본질적으로 시 각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된다.볼하임은 이 차이를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건 초 만드는 사람의 그림 앞에서 내가 “나는 농부를 본다.”라고 말할 때와

“저기 농부가 있다.”라고 말할 때,월튼의 이론에 따르면 나는 같은 것을 말 하고 있는 것이다.그림을 가지고 하는 믿는 체하기 게임의 세계 안에서,저 기 농부가 있다는 것과 내가 그 농부를 보고 있다는 것은 모두 허구적으로 참이기 때문이다.그러나 볼하임의 이론에서는 이 두 가지 말의 의미가 같 지 않다.볼하임은 만약 우리가 건초 만드는 사람의 그림 앞에서 “저기 농 부가 있다.”와 같은 말을 한다면,그것은 일종의 믿는 체하기라는 것을 인정 한다.내 앞에는 그림이 있을 뿐,실제로 농부가 존재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에서-보기는 존재 함축을 가지지 않는다.내가 건초 만드는 사람을

180)Ibid.,pp.300-301.

그린 그림 안에서 농부를 본다는 것은 그 농부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할 필요가 없다.나는 단지 안에서-보기라는 경험을 하고 있을 뿐이다.

둘째,볼하임은 믿는 체하기 게임 안에서 내가 캔버스를 보는 경험이 그것 이 재현하는 대상을 보는 경험이 된다는 월튼의 주장에 의문을 표한다.한 지각 경험이 다른 지각 경험이라고 상상한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 인가?만약 그러한 상상하기에 성공한다면,원래의 경험-표면 경험-은 어떻 게 그 내용을 유지할 수 있는가?또 반대로 표면을 보는 지각 경험이 그 내 용을 유지한다면,어떻게 그 경험을 이를테면 얼굴을 보는 경험으로 상상하 는 것이 성공할 수 있는가?

월튼은 이러한 반론들에 대응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첫째,월튼은 자신의 이론이 관례주의적이라는 해석에 반대한다.어떤 그림을 보는 행위가 그 대 상을 보는 행위가 된다는 것이 믿는 체하기 게임 내에서 일어나며 그러한 게임은 사회적 관례를 전제로 한다는 주장이 우리가 재현적 그림을 감상할 때마다 그러한 관례를 떠올린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감상자들은 그 저 그림 앞에서 상상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뿐,그러한 관례를 의식하지 않는다.이러한 점에서 믿는 체하기의 관례는 사실상 볼하임이 말하는 옳음 의 기준과 유사하다.월튼은 그림을 봄으로써 그림 속 대상을 본다고 상상 하게 되는 것은 거의 자동적이어서 우리는 그 상상이 발생한다는 원칙을 암 묵적으로 수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둘째,하나의 지각 경험이 다른 지각 경험이라고 상상하기는 불가능하지 않다.오히려 우리는 그러한 상상 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다.나는 글렌 굴드의 바흐 녹음을 들으며 그것을 콘 서트 홀에서의 라이브 연주 소리로 상상한다.또 나는 오페라 마술피리에서 플루트 연주자가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 경험을 파파게노가 그의 나무 피리 로 연주하는 소리를 듣는 경험으로 상상한다.영화 <현기증>에서 스카티가 주디를 매들린으로 상상하는 것을 생각해 보라.스카티의 실제 경험은 잘 차려입은 주디를 보는 것이나 분명히 그는 그 경험이 매들린을 지각하는 경 험인 것으로 상상하고 있다.월튼은 오히려 만약 두 지향적 내용들 사이에 어떤 비양립성이 존재한다면 그것은 볼하임 자신의 안에서-보기 개념에서도 문제가 된다고 비판한다.볼하임이 말하는 안에서-보기 경험의 이중성은 두

개의 독립된 경험들이 아니라 두 개의 다른 지향적 내용을 가지고 있는 하 나의 지각적 경험의 두 측면들이다.그렇다면 왜 그는 하나의 내용이 다른 내용에 끼어든다고 생각하지 않는가?만약 그림의 대상이 지각적 경험의 내 용이 된다면,표면 지각은 어떻게 그 “내용을 유지”할 수 있는가?볼하임은 서로 다른 두 “측면”을 말하지만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그는 비 양립성을 말한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오리-토끼 그림과의 유비를 거부하 지 않는가?월튼은 자신의 이론이 어떻게 서로 다른 두 지향적 내용이 상호 침투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고 주장한다.그 경험은 말하자면 “어떤 얼굴 의 지각이라고 상상된 그림 표면의 지각”인 것이다.181)

필자는 월튼의 재반박에 동의하지 않는다.첫째,월튼이 말하는 믿는 체하 기 게임의 관례가 볼하임이 말하는 옳음의 기준과 유사한 것이라면,적어도 월튼의 이론은 중요한 한 가지 요소를 결여하고 있다.그것은 바로 시각성 이다.월튼은 회화적 재현이 발생시키는 상상하기가 “본다고”상상하기라는 점에서 그림의 시각성이 설명된다고 생각하는 듯하지만,필자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본다고 상상하기는 상상하기일 뿐 보기가 아니다.그러할 때,옳음의 기준이 적용되기 전의 시각적 경험은 어떻게 설명될 것인가?그 것이 관례 때문이 아니라면 우리는 왜 그림 안에서 다른 것이 아닌 농부를 보는 것인가?월튼은 적어도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의도적으로 회피한다.둘 째,월튼이 드는 지각적 상호 침투의 예들과 우리가 그림에서 경험하는 이 중성은 서로 다르다.글렌 굴드의 녹음과 플루트 연주자의 플루트 소리를 듣는 경험,그리고 스카티가 주디의 모습을 보는 경험은 각각 그것이 상상 되는 바의 경험과 동일한 유형의 지각적 내용을 가진다.오디오에서 흘러나 오는 소리는 실제로 음악 소리이며 플루트 연주자의 연주는 실제로 악기의

181)볼하임과 월튼 사이의 논쟁에 대해서는 다음을 참고하라.Wollheim,Paintingasan Art(1987), p. 361 n. 21; Wollheim, “A Note on Mimesis as Make-Believe”, PhilosophyandPhenomenologicalResearch(1991),pp.401-406;Wollheim,“On Pictorial Representation,TheJournalofAestheticsandArtCriticism(1998),pp.224-225;Walton, Mimesis as Make-Believe(1990),pp.300-301;Walton,“Depiction,Perception,and Imagination:Responses to Richard Wollheim”,The JournalofAesthetics and Art Criticism(2002),pp.27-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