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이 정보를 전달한다는 주장에 대한 가장 강력한 반례가 되는 것은 허 구적 그림이다.허구적 그림에는 유니콘 그림,돈키호테 그림과 같이 허구 이야기 속의 대상을 그린 그림들 뿐 아니라 화가가 그림을 그림으로써 대상 을 새로이 만들어내는 그림들까지도 포함된다.이러한 그림들을 단지 “진실 한”그림에 대한 예외적 경우라고만 여기기에는 허구적 그림들은 너무나도 많다.굿맨이 지적하듯이,그림의 세계는 “이름 없는 허구적 인물들,장소들, 그리고 사물들로 넘쳐난다.”97)그러나 대상과 그림 간의 인과적 관계를 바 탕으로 한 정보 기반 묘사 이론에서,인과적 원인이 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는 허구적 그림을 설명하기란 쉽지 않다.그림이 일차적으로 정보를 전달 하기 위한 수단이라면,허구적 그림은 정보를 전달하고자 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닌 것”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비어 있는 그림이다.그러나 이러한 분류에 따르면 우리 주위의 수많은 허구적 그림들은 동일한 정보를 전달하는 그림,정확히 말하면 아무런 정보도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동 일한 그림이 된다.그러나 우리는 셜록 홈스 그림과 돈키호테 그림을 구분 하며,여러 모습의 셜록 홈스 그림들을 묶어서 하나의 유일한 셜록 홈스를 그린 그림으로 분류한다.정보 기반 묘사 이론은 이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 을 것인가?98)
97)Goodman,LanguagesofArt,p.26.
98)허구적 그림과 연관되는 것으로 불특정 대상을 그린 그림을 생각해볼 수 있다.어떤 특정 인물 혹은 특정 고양이를 그린 것이 아닌 그저 사람 그림,고양이 그림 등을 생 각해 보자.이러한 그림들은 존재하는 개별 대상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허구적 그림과 공통점을 가진다.또한 많은 그림들의 경우 그것이 불특정 대 상을 그린 그림인지 허구적 그림인지가 애매하거나 별로 상관없기도 하다.(브뢰헬의
아마도 가장 그럴 듯한 제안은 “믿는 체하기(make-believe)”라는 개념에 기대어 허구적 그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설명하는 방식일 것이다.월튼에 의해 이론화된 “믿는 체하기”는 상상하기의 한 종류로서,다른 상상하기와 달리 소도구(prop)를 필요로 하며 이 소도구들에 대해 특정한 상상을 하도 록 하는 규칙을 준수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게임을 뜻한다.99)믿는 체하기 이 론은 허구에 관한 많은 문제들에 대해 해결책으로 제시된다.코난 도일의 소설 속의 “셜록 홈스”는 실제로는 존재하는 그 누구도 지시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이 실제로 지시하는 이름인 것처럼 믿는 체한다.마찬가지로 우 리는 셜록 홈스 그림을,셜록 홈스를 그린 것으로 믿는 체한다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이제 로페스의 이론을 예로 들어 이러한 제안이 정보 기반 묘 사 이론에 어떻게 적용될 수 있는지 살펴보자.
정보 기반 묘사 이론에서 그림의 정보 구현 기능은 대상으로부터 기원한 시각적 정보를 제공하는 그림을 기반으로 하여 우리가 재인 능력을 통하여 그 대상을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완성된다.그러나 허구적 그림에서는 그림 이 가진 시각적 정보의 기원이 되는 대상이 존재하지 않고 따라서 우리가 재인 능력을 통하여 그 대상을 식별할 수도 없다.이 경우 우리는 대상의 존재와 그 대상에 대한 식별을 믿는 체하기 게임 내에서 일어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월튼을 따라 “p가 참이라고 믿는 체한다”를 *p*(MB)라고 표시해 보자.이제 돈키호테 그림에 대해 *돈키호테가 존재한다*(MB),그리
농부 그림들을 생각해 보라.)그러나 허구적 그림과 달리 불특정 대상을 그린 그림은 정보 기반 묘사 이론에 그리 심각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다.그 그림이 부여하고 있 는 속성들을 가진 종류의 대상이 존재하기만 한다면 우리가 그림을 통하여 그 대상 을 동일시할 수 있고 따라서 그 그림은 그 대상(들)에 대한 정보를 구현하는 것이라 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불특정 대상을 그린 그림은 순수 기술적인 그림과는 구분 된다.순수 기술적인 그림이란 그 그림의 내용과 우연히라도 일치하는 대상이면 무엇 이든지 그 대상이 되는 그런 그림이다.그러나 로페스 가 지적하듯이 그런 그림은 거 의 존재하지 않으며,정보 기반 이론의 관점에서는 정보 기반적인 “기본적인”그림에 대한 예외로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Lopes,UnderstandingPictures,p.168.
99)믿는 체하기 이론에 대해서는 월튼(KendallWalton)의 다음과 같은 저작들을 참고할 수 있다.“Pictures and Make-Believe”,PhilosophicalReview,82(1973),pp.283-319;
“FearingFictions”,JournalofPhilosophy,75(1978),pp.5-27;MimesisasMake-Believe: OntheFoundationsoftheRepresentationalArts(HarvardUniversityPress,1990).
고 *돈키호테의 그림인 것으로 식별된다*(MB)라고 말할 수 있게 된다.즉 우리는 어떤 허구적 그림에 대해 그 그림의 기원이 있다고 믿는 체하고,또 그 그림이 그 기원이 되는 대상의 그림으로 식별될 수 있다고 믿는 체한 다.100)믿는 체하기는 정보 기반 묘사 이론에서 허구적 그림을 설명하는 데 동반되는 어려움들을 한꺼번에 해결하는 듯 보인다.허구적 그림을 설명하 기 위해서는 실제 대상의 그림을 설명하는 모든 개념과 명제들을 *p*(MB) 기호 속으로 집어넣기만 하면 된다.즉 허구적 그림이 구현하는 *정보*(MB) 의 *기원이 존재하고*(MB),우리는 재인 능력을 통해 그 그림을 그 *기원
*(MB)의 그림으로 *식별*(MB)하고,이 과정은 *정당한 근거가 있으며*(MB), 때로는 *잘못된 근거*(MB)에서 *잘못 식별*(MB)하기도 한다.101)따라서 셜록 홈스 그림들은 *셜록 홈스의*(MB)그림들로 묶일 수 있고,그런 점에서 *돈 키호테의*(MB)그림들과 구분될 수 있다.이러한 해결 방식은 실제 대상의 그림과 허구적 대상의 그림에 평행한 설명 구조를 만들어 줌으로써 정보 기 반 묘사 이론이 일관적으로 모든 종류의 그림에 적용될 수 있도록 한다.또 한 언어의 허구적 사용에 대한 이론으로서의 믿는 체하기 이론이 실제 대상 에 대한 기술과 허구적 기술의 차이를 설명하기에 적절한 이론이라고 했을 때,이러한 설명 방식은 그림에 대한 이론과 언어에 대한 이론 사이의 일관 성 역시도 마련해줄 수 있다.
그러나 믿는 체하기 이론을 주장하는 월튼 자신이 허구적 그림에 대해 이 러한 설명 방식을 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논외로 하더라도,과연 믿는 체 하기 이론이 실제 대상을 그린 그림과 허구 그림의 차이를 설명하기에 적절 한 이론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과연 우리는 로페스가 주장하
100)Lopes,UnderstandingPictures,pp.202-203.
101)실제 재인이 아니라 믿는 체하기 재인이라 하더라도,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한 재인 능력이 어떻게 발휘될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로페스는 우리의 재인 능력이 그 대상을 직접 대면함으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대상과 직접 대면한 사람들이 글이나 그림의 형태로 유통시키는 정보를 통해 그 대상에 대한 재인 능력을 얻게 될 수 있다.이와 마찬가지로,허구적 대상에 대한
*재인*(MB)능력은 그 허구적 대상에 대한 이야기나 그림을 통해 획득될 수 있다.따 라서 허구적 대상에 대한 *재인*(MB)능력은 그것이 획득되고 사용되는 방식에 있어 서 사실상 실제 대상에 대한 재인 능력과 차이가 없다.Lopes,UP,p.207.
듯이 실제 대상을 그린 그림과 허구적 그림에 대해 원칙적으로 다른 태도를 가지고 접근하는가?또,실제 대상의 그림으로 알았던 것이 실제 대상의 그 림이 아닌 허구적 그림으로 밝혀졌다면 그 그림에 대한 태도가 갑자기 그것 이 실제 대상을 그린 것이라고 믿는 체하기로 변하는가?필자는 그렇게 생 각하지 않는다.그림을 볼 때 우리는 그 그림이 실제 대상을 보고 그린 것 이라는 전제를 하지 않는다.그림을 볼 때 우선적으로 다가오는 것은 그것 이 실제의 기록이라는 것보다는 그 안에서 보이는 대상이다.즉 그림에서 우리가 대하는 것은 어떤 상황의 기록이 아니라 상황 자체이다.우리는 그 저 그림 속에서 어떤 대상과 장면들을 보고 있으며,그림은 일차적으로 어 떤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따라서 그림 안에서 보이는 것들이 실제 대상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해도,그것들이 갑자기 신용을 잃게 되지는 않는다.허구적 그림에 대해서는 우리가 실제로 그런 대상이 있고 그것을 그린 것이라고 믿는 체한다기보다는 그저 화가가 그림을 그림 으로써 그 모습을 만들어내었다고 생각한다는 편이 더 자연스럽다.그림을 만들어내는 과정에 실제 대상이 모델로서 작용했을 수도 있다.그러나 그렇 다고 해서 모든 그림에 모델이 존재하고 그림은 그에 대한 정보를 전달한다 는 전제를 하지는 않는다.본고는 그림에는 정보전달의 기능이 본질적이지 않다고 주장하고자 한다.이제 그림과 정보전달 사이의 전반적인 관계에 대 해 고찰해 봄으로써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로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