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김영미(2009)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빌리자면 ‘물적 및 금융적 유인책을 활용한 자발성과 강제성을 동력으로 하되 강제성이 자발성을 능가한’으

문서에서 한국의 농촌개발 전략 (페이지 138-146)

서의 값싼 노동력유지를 위해 저곡가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한국농 촌경제연구원 2019.)

29 김영미(2009)의 표현을 부분적으로 빌리자면 ‘물적 및 금융적 유인책을 활용한 자발성과 강제성을 동력으로 하되 강제성이 자발성을 능가한’으

로 표현을 대체해도 좋을 것이다.

책을 추진하는 주민 동원 체제 구축 운동이었다고 평가한다. 이들은 농촌새마을운동이 거두었다고 주장되는 물질적 성과는 정치적으로 과장되었다는 점을 지적한다. 초창기의 새마을가꾸기사업과 달리 1973년 이후 농촌새마을운동으로 추진된 사업들은 대부분 정부의 주요 정책 과제들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예를 들어 농수산부의 소득증대사업과 생산기반정비사업은 이미 기존 정책으로 추진해 오 던 사업들을 새마을사업으로 새롭게 명명해 추진한 것들이 많다. 이 와 같은 사례는 농수산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부처에서 공통적으 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김완중 2019: 157).

1970년대에 새마을운동을 통해 농업의 생산성이 높아지고 한때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보다 높았다는 점에 대해서도 실증 연 구를 통해 비판 의견을 제기하고 있다. 1970년대의 농업생산성 증대 는 1980년대 비해서 크게 저조하였을 뿐만 아니라 새마을운동 이전 인 1960년대에 비해서도 낮았다(김완중 2017a: 102)고 지적한다.

또한 새마을운동기간 농가소득이 도시근로자 소득보다 높았던 것 에 대해서도 이는 새마을운동에 의한 생산성 향상보다는 정부의 곡 물 수매 확대 및 수매를 통한 고미가정책의 결과이지 엄밀히 말하면 새마을사업과는 관계가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김완중 2017b: 422).

또한 농외소득 증대 역시 새마을공장 사업과 같은 새마을사업에 의 한 효과는 크지 않으며, 전국적인 공업화 확산에 따른 급여소득 증 대와 공적 및 사적보조금 증가에 의한 부분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분석한다. 더 나아가 농가당 소득개선의 상당부분은 전체적인 농가 수 감소에 따른 평균적인 소득증대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분 석한다(김완중 2017b: 422)

새마을운동에 부정적인 평가들은 새마을운동이 거둔 정신적인 성과 인 주민 참여에 대해서도 의견을 달리한다. 새마을운동의 주민 참여는

박정희 독재 체제의 수립과 안정화를 위해 위로부터의 강제된 규율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새마을운동을 국가 주도의 ‘위로부 터의 개발 방식’으로 바라보는 시각이다(하재훈 2014: 244-245).

새마을운동의 평가를 성공이냐 실패냐, 참여냐 동원이냐 라는 이 분법적인 논쟁은 그 자체로 새마을운동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데 기 여하였다고 판단되지만 한편으론 정치적인 이해에 영향을 받음으로 서 새마을운동의 특정 부분만을 강조하는 한계를 보이고 있다. 이분 법적이고 정치적인 측면으로 새마을운동을 이해하기에는 1970년대 의 한국 농촌이 안고 있는 문제는 복합적이며 새마을운동의 특성과 구성요소는 중층적이다.

비록 그 배경에 정치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하여도 새마을운동은 농촌개발의 가장 중요한 원리인 참여 체제를 구축하고 이를 통해 효 율적으로 사업을 추진했다고 평할 수 있다.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효율적인 추진을 위해 당시의 정부는 중앙집권적 관료체계를 이용 하여 중앙통제기구를 구성했으며 지방행정조직을 강화하여 농촌사 회와 접촉 기회를 확대하였다. 또한 당시 농촌 마을에 존재했던 다 양한 형태의 자율조직들을 농촌새마을운동의 조직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농촌에 존재하는 자율적인 농촌공동체 규범을 활용하여 농촌 주민의 집합적 참여를 이끌어내는 노력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정부차 원의 수평적·수직적 추진 체계와 마을 사회 존재하는 공동체 조직의 결합을 통한 참여적 농촌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표 4-4>는 새마을운동의 참여 마을 수와 참여 연인원을 나타내 고 있다. 전체 참여인원은 새마을운동이 시작한 1971년에는 연인원 7,200천 명에서 1978년에는 37.6배가 늘어난 270,928천 명으로 증가 하였다. 마을당 참여 연인원은 1971년 216명에서 1978년에는 7,472 명으로 증가하였다. 당시의 농촌마을 평균 인구가 440명 정도임을

감안하면 한 사람이 평균 17회 정도 새마을운동에 참여하였다고 할 수 있다. 1970년대는 경제 성장시기로서 농촌개발에 투자할 만한 재 정여력이 충분하였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마을운 동을 통하여 농촌생활환경이 대폭 개선된 것은 마을 주민의 광범위 한 참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표 4-4> 마을 수준별 중점 개발사업

구분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참여마을 33,267 22,708 34,665 34,665 36,547 36,557 36,557 36,257 참여 연인원

(천 명) 7,200 32,000 69,230 106,852 116,880 117,528 137,193 270,928 마을당 참여

연인원(명) 216 1,409 1,997 3,082 3,198 3,215 3,753 7,472 자료: 내무부(1979); 엄석진(2011: 473).

새마을운동의 경제적인 성과는 실증적인 분석을 통해 보다 객관 적인 평가가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1970년대 한국의 새마을 운동이 농촌의 물리적인 환경 변화와 함께 경제적인 측면에서의 변 화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새마을운동 기간 전국적 으로 벌인 퇴비증산운동과 비록 새마을운동과는 별도의 정책으로 추진되었다고 하지만 통일벼 등 신품종도입은 새마을운동과 병행 실시되어 농업의 생산성을 높여주었다. 여기에 당시 정부가 추진한 고미가정책과 쌀 수매량 확대 정책이 농가소득 증대에 기여하였다.

표에서 새마을운동이 활발한 1974년과 1975년의 경우 농가의 소득 이 도시근로자 가구 소득을 상회하였다.

<표 4-5> 농가와 도시가구 소득비교(1970~1980년)

단위: 천 원, % 구분 1970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1978 1979 1980 농가(A) 580 715 761 781 835 873 926 980 991 1,030 999 시가구(B) 776 811 831 857 808 859 999 1,106 1,319 1,530 1,448 A/B 74.7 88.2 91.6 91.1 103.3 101.6 92.7 88.6 75.1 67.3 69.0 주: 실질소득으로 농가의 경우 1975년 기준 농가구입가격지수로 디플레이트하였고, 도시근로자

가구의 경우 1975년 기준 전도시소비자물가지수로 디플레이트한 것임.

자료: 황연수(2006); 엄석진(2011: 471).

새마을운동은 농촌의 절대빈곤을 줄이는 데도 기여하였다. <표 4-6>에서 한국의 절대빈곤가구 비중은 1970년에는 도시가구가 16.2%, 농촌가구가 27.9%로 농촌에서의 비중이 높은데 1976년에는 농촌의 비중이 줄어들어 도시가구 18.1%보다 적은 11.7%를 보여주고 있다.

새마을운동 기간 동안 농촌의 빈곤가구가 대폭 감소하였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다.

<표 4-6> 도시와 농촌의 절대 빈곤가구 비중

단위: %

구분 1965 1970 1976 1980 1991

도시가구 54.9 16.2 18.1 10.4 8.7

농촌가구 35.8 27.9 11.7 9.0 2.8

전 가구 40.9 23.4 14.8 9.8 7.6

주: 절대빈곤가구는 1981년 가격으로 5인 가족 121,000원 기준임 자료: Kwon(2010: 95).

새마을운동은 농촌주민의 가치관과 태도의 변화를 가져오고 이는 농촌주민의 역량증진으로 이어졌다. 1978년에 행해진 전국 36개 마 을 1,497개 농가에 대한 농촌새마을운동 조사에 의하면, 새마을운동

을 통해 주민들이 변화를 수용하는 태도가 높아졌고, 계획을 세우게 되었으며, 미래에 대해 낙관하는 경향이 높게 조사되었다(황인정 1980: 73-83). 또한 새마을운동을 통하여 마을 내 주민 간은 물론이 고 이웃마을 주민과의 협동의식과 연대감이 강화되었다고 분석되었 다(황인정 1980: 100). 의식변화와 함께 생활태도 측면의 변화도 나 타났다. 1978년 10월부터 약 3개월에 걸쳐 전국의 8개 마을, 821명 을 대상으로 수행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유훈 1980), 대부분의 마을에서 노름의 감소, 중매결혼의 감소, 장례식의 간소화, 마을공동 의사결정에의 참여 증가, 음주 감소, 여성의 지위향상 등에 대해 상 당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이고 있다(유훈 1980; 엄석진 2011: 472).

주민의 가치관과 태도변화는 도시화, 상업화, 매스컴의 보급 등 다 양한 요인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새마을운동 활동내용이 이러한 방 향을 강조해 왔고 실제로 영향을 미쳤다고 평할 수 있다.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 이후 농촌새마을운동은 쇠퇴의 길 을 걷게 된다. 1981년에 시작한 제5공화국정부는 새마을운동을 관 주도에서 민간주도로 전환하기 위해 새마을운동본부를 설립하고

「새마을운동조직육성법」을 제정하였지만 새마을운동은 쇠퇴하기 시 작했다. 80년대 초 새마을운동의 쇠퇴요인은 직접적으로 새마을운 동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던 박정희 대통령의 사망이 작용하지만 그 외에 70년대 농가들을 새마을운동에 적극적으로 이끌었던 요인들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첫째, 이농확대 등으로 농가 수가 크게 감소하면서 마을 공동체를 통한 주민동원이 점차 약화되었으며, 새마을운동이 관주도에서 민간 조직인 새마을중앙회 주도로 전환되면서 정부조직에서 새마을 사업 담당부서가 점차 사라짐에 따라 행정조직을 통한 새마을운동 추진 이 약화되었기 때문이다.

둘째, 70년대 후반 경제개발 제4차 5개년계획 시작과 함께 ‘농정 전환론’이 제기되고 소비자 지향의 물가안정을 위한 비교우위론에 입각한 농산물수입 자유화 정책을 추진하였고30 한편으로는 새마을 운동을 떠받쳐온 친 농민적 고미가정책을 중단한 것도 새마을운동 의 쇠퇴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최양부 2019).

셋째, 새마을운동의 근간을 형성한 ‘마을 기반 추진전략’ 그 자체 가 구조적 제약요인이 되었다. 1973년부터 마을 간 경쟁이 본격화되 면서 마을주민들의 참여로 1978년 이후 마을 대부분이 새마을사업 목표를 달성하여 최고 등급인 자립마을에 도달했다. 그러나 마을발 전으로 주민 숙원이 이루어지면서 운동 참여 동기를 부여하는 유인 요인들이 사라지게 되면서 운동은 목표를 잃게 되었다(최양부 2019).

30 한국정부는 1978~1979년간 3차례에 걸쳐 소고기, 돼지고기를 비롯하여

고추, 마늘, 양파 등에 대한 수입자유화 조치를 단행했다. 농민은 정부의

급진적인 반 농민적 농정전환에 충격을 받았고 1978년 가뭄과 1980년 냉

해 등의 자연재해로 인한 소득저하와 부채증가로 정부에 대해 배신감마

저 가지게 되었다(최양부 2019).

1. 배경

1.1. 도시 농촌의 누적적 악순환

1968년을 기점으로 농촌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의 인 구 감소는 1960~1970년대의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도 시와 공업부분에서의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는 이촌탈농현상에 기인하였다.31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촌향도의 결과는 국토의 불균 형 개발과 연계되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1960년대 이

1968년을 기점으로 농촌인구가 감소하기 시작하였다. 농촌의 인 구 감소는 1960~1970년대의 고도경제성장기를 거치는 과정에서 도 시와 공업부분에서의 일자리를 찾아 농촌을 떠나는 이촌탈농현상에 기인하였다.31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촌향도의 결과는 국토의 불균 형 개발과 연계되어 여러 가지 사회적 문제를 낳았다. 1960년대 이

문서에서 한국의 농촌개발 전략 (페이지 138-146)

Outline

관련 문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