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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후 입문 장인들의 생활인으로서의 삶

: 장인들의 입문경위와 그 정체성의 단속(斷續)을 중심으로

유기점이 성황을 이루었던 만큼 이 시기에는 유기장으로 입문하는 사람 도 많았다. 이 때 유기장은 임금이 높아 기술을 배우는 사람들 사이에 인 기가 좋았다고 한다(안성유기장들 제보). 유기장들은 대개 처음 입문해서 는 풀무질을 먼저 시작하고, 그 후에 부질이나 가질 기술을 배우게 된다.

부질의 경우 기술자인 대장의 조수로 1년에서 수년간 일을 하며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된다. 조수는 대장이 부질을 할 수 있게 화덕에 불도 피워 주고, 풀무질도 해주며, 주물 작업에 사용하는 흙(갯토)도 깨준다.

현재 80대의 유기장들은 이 시기에 입문하여 생존자 중 안성유기장 1세 대를 형성하고 있다. 주물대장으로는 D씨, P씨가 생존해 있고, 가질대장 으로는 N씨, J씨, Q씨 등이 있다. 이 시기 입문하여 유기장으로 큰 족적 을 남긴 것은 D씨와 P씨다. D씨(남, 1932년 생)는 부질대장으로 현재 유 기장들 사이에서 박사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기술이 뛰어난 것으로 평 가 받는 인물이다. 그는 16세(1947년)에 윤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에서 유 기장으로 입문하였다. 여기서 2개월 정도 일하다 변윤수의 안신유기제작 소로 옮겨 1년여 정도 있으면서 부질기술을 완전히 익혀서 나왔다. 그 뒤 삼화유기 등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일을 했다. 그가 처음 배운 것은 해 방 후 각광을 받았던 주발·대접 등 식기‧제기 제작기술이었다. 그는 안성 에서 10여년을 일하다 서울로 가게 된다. 6.25 이후 서울에서는 해외 수

요에 맞춘 공예품 생산·수출이 한창이었다. 그는 탁광윤(卓光潤)142)이 점 주였던 동화공예산업사(東華工藝産業社)(1956년판 『全國主要企業體名 鑑』)에서 4년여 일하며 고난이도(高難易度)의 공예품 기술을 익혔다. 동 화공예에서는 해외 수출용인 커다란 원형의 벽걸이 장식‧쟁반‧대형 화병‧주 전자 등 셀 수 없이 다양한 종류의 물품을 만들었다. 서울에서 익힌 그의 공예품 제작 기술은 유기 식기나 제기가 사양길로 접어들었던 1960 ~ 70 년대 안성유기점의 수출용 공예품 제작에 크게 기여했다. 유기장들 사이 에서는 식기나 제기보다 이러한 공예품 제작을 상당히 고도(高度)의 기술 로 인식했다. 그는 자신이 공예품 기술자였음을 강조하며,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대화 과정 중에 자주 드러난다. D씨는 1970년대 천안‧충주와 전 라도‧경상도 등 전국을 돌며 일하다 70년대 말쯤 건강상의 문제로 조적(租 積)일을 배워서 전업하였다.143) 유기장의 길을 접기 이전 그의 주요 이직 사유는 일하던 유기점이 운영을 중단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임금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144)

P씨(남, 1934년생) 역시 안성 유기장들 사이에 부질대장으로 기술이 뛰어 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20세경이었던 1950년대 초반 김태화가 운 영하던 정광사유기제작소(正光社鍮器製作所)에서 유기장의 길에 입문하게 된다. 이후 정광사는 문을 닫고 동업으로 정광사를 운영하던 K씨가 공장 을 내게 되자 이 유기점에서 줄곧 일하며 공장장까지 지냈다. P씨는 약간 의 농업을 겸하며 유기장의 길을 이어갔다. 그는 고색 처리한 불상 등 모 조골동품을 제작하는 기술이 있었다. 1970년대 초 문화재관리국에서 관광 상품으로 판매할 목적으로 장려한 정책에 힘입어 K씨의 공방에서는 불상 등 모조골동품을 제조‧판매하였다. P씨는 K씨 유기점에서 모조골동품을 제조하였고, 이후 독립하여 독자적으로 제조․판매를 지속했다. 그러다 자 신의 제작품이 도난품과 같은 것이었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는 등 어려움

142) 탁광윤은 평안북도 정주군 청정리 출신으로 남한에서 북한식 양대공장을 운영하던 탁 창여(卓昌汝)의 장남이다.(유기장 L씨 제보)

143) 당시 유기제작 과정 중에는 그을음질 할 때 경유를 사용하였는데, 이때 발생하는 연기 (매연)는 부질 장인들의 건강을 상당히 위협하였다. D씨도 그로 인해 전업을 한 경우이 다.

144) 유기장 D씨 제보 내용을 토대로 작성

을 겪게 되어 유기장을 그만두게 된다(안성유기 관계자들 제보).

가질대장 중 가장 연장자인 N씨(남, 1928년생)는 원래 고향은 충북 음성 이다. 그는 1944년 안성으로 이사와 17세 ~ 18세경(1944 ~ 1945년경) 백성 유기제작소에서 유기장으로 입문하게 된다. 처음에는 조수로 풀무질을 했 으며, 얼마 후 당시 70세정도 되는 가질대장에게 가질을 배웠다. 이렇게 백성유기에서 1년여 정도 일한 후 경제적인 이유로 안성을 떠나 청주, 서 울 등지에서 가질대장으로 장인의 길을 이어갔다. 6.25 즈음 군에 입대하 여 장인의 길을 중단하였다가 제대 후 안성 K씨의 유기공장에서 다시 장 인의 길을 재개하였다. 그러나 몇 년 후 유기장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 일을 접고 장을 돌며 자전거 행상으로 쌀장사를 했다. 이후 유기 장과 쌀장사를 겸하다가 연로하여 일손을 놓게 되었다(N씨 제보).

가질대장인 J씨(남, 1934년생)는 초등학교 졸업 후 15세경 변윤수의 안신 유기제작소에서 유기장에 입문하여 가질을 배웠다. 여기서 1년 여 일한 후 정광사에서 장인의 길을 이어갔고, 이후 중간 중간 일을 쉬었던 약간 의 공백기를 제외하면 다른 장인들과 달리 타 지역으로 나가지 않고 K씨 유기공장에서 줄 곧 일하였다. 그러다 73세경 연로하여 유기제작에서 완 전히 손을 놓았다.(J씨 제보)

가질대장인 Q씨(남, 1934년생)는 20세경(1953년 경) 정광사에서 유기업에 입문하였다. 그 후 1956년 입대로 인해 장인의 길을 중단하였고, 1959년 K씨 유기점에서 다시 가질대장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1970년대 초에는 K 씨 유기점이 부도나자 장인의 길을 접고 자전거에 성냥·잿물·간수 등 물건을 싣고 시골로 다니며 행상을 했다. 그러다가 1970년대 후반 다시 K 씨 공장에서 가질대장으로 장인의 길을 재개했으며, 이후 임금 등 경제적 인 문제로 부천·수원·순천으로 돌아다닌 몇 년을 제외하고 줄곧 이곳에 서 일했다. 1990년대에는 소음으로 인한 직업병이 발생하여 건강상의 문 제로 유기업을 접고, 농업으로 전업하였다.(Q씨 제보) 이외 금성유기제작 소 김영배의 조카였던 Jt씨(남, 1935년생)도 14세 경 유기업에 입문하여 윤 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 등에서 7~8년 정도 풀무일을 했으며, 1956년 경 유기가 사양산업이 되자 그만두고 작은 아버지를 따라 목물장사로 전업하

였다(Jt씨 제보).145)

이들보다 연배가 조금 낮은 70대 정도 되는 유기장들은 현재 생존자는 거의 없다. 주물대장으로 소복동·이상덕(1940년 경 생)·유영철·조순 만· 김서영 등이 있었으며, 가질대장으로는 이재덕·김병열·양상복 등 이 있었다. 소복동은 생존했다면 나이가 70대 후반으로 어려서부터 유기 일을 시작하여 중간에 서울·순천 등지에서도 일했지만, 안성 K씨 유기점 에서 가장 오래 일했고, 40여년 정도 주물대장의 길을 지속했다. 그러다 유기제작 시 발생하는 경유 그을음으로 인해 신병을 얻어 의사의 권유에 따라 유기장의 길을 접었으며, 2009년 경 사망하였다. 소복동의 동생 Bg 씨(남, 1945년 경 생)도 17세(1960년대 초)경부터 형의 조수로 유기장의 길 에 들어섰다. 그리고 10여년을 형의 조수 일 하다 부질대장이 되어 안성 K씨 유기점에서 주물대장으로 4년 정도 일했다. 그 후 임금이 많았던 서 울로 옮겨 1년여 일한 후 앞 서 언급했던 유기 제작 시 발생하는 경유 그 을음이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것 같아 유기장의 길을 접고 당시 붐이 일 었던 건설업으로 전업하였다(Bg씨 제보).

지금까지 살펴 본 장인들의 삶을 통해 볼 때 1940년대 중후반 ~ 1950년 대 경 점주가 아닌 일반 장인들의 입문 경위는 주로 생계를 위해서였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학력이 높지 않았던 이들은 수공업이 발달한 안성에서 쉽게 장인의 길로 입문할 기회가 많았다. 앞서 밝힌 대 로 유기 제작 일은 연죽제작 등 다른 일에 비해 임금이 많았다. 유기장은 4일 일하고 5일째 되는 날인 장날에는 쉬면서 화덕 등 작업장 정비도 하 였고, 이날 임금을 지불받았다. 처음 들어가서 조수를 할 경우에는 4일 일하고 5일째 되는 날 4일 일한 임금을 지급받았고, 숙련 장인인 부질대 장이 된 후에는 생산량에 따라 개당 얼마 씩 해서 5일째 되는 날 4일 분 의 임금을 지급받았다. 반면 연죽장 등 다른 분야 장인들의 경우 처음 입 문 후 얼마간은 임금이 지급되지 않았다(Q씨 제보). 따라서 임금 차이가

145) Jt씨의 작은아버지는 고향인 괴산에서부터 대장간을 하다 안성으로 왔고, 안성역 앞에 서 몇 십 년 대장간을 계속했다. 그러나 대장간이 잘 안되자 목물장사로 전업하여 낫 등 직접 생산한 농기구와 각종 목물을 함께 취급하였다. Jt씨는 이 작은아버지를 도와 목물 장사를 시작하여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다(Jt씨 제보).

나기 때문에 당시 장인들 사이에서는 유기장이 선호되었고, 형편이 어려 운 사람들이 유기장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146)

이렇게 타 직종에 비해 입문 당시 유기장이 선호되는 이유뿐만 아니라 유기장들이 다른 지역이나 타 유기점으로 직장을 옮기는 경우 그 이유 또 한 대부분이 임금 때문이었다. 서울 등 타 지역과 안성은 임금 면에서 차 이가 많이 났다. 우선 타 지역에서는 처음 들어갈 때 몇 달 월급을 선불 로 주었고, 그 유기점이 폐업해도 선불은 돌려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임금 수준도 서울 등 타지역이 안성에 비해 20~40% 높았다. 또 숙식이 제 공되는 타지와는 달리 안성에서는 숙박은 물론 식사도 제공되지 않아 중 식까지 본인들이 해결해야 했다. 이런 이유로 장인들은 서울 등 타지 유 기점으로 일하러 가는 경우가 많았다(D씨 등 안성유기장들 제보).

그리고 장인들이 유기업 외에 다른 직업으로 전직이나 전업하는 경우 건 강상의 이유147)와 함께 유기업의 쇠퇴에 따른 생계문제 해결을 위한 경우 가 대부분이었다. 1960년대 이후 유기업이 쇠퇴하고, 1970년대 무렵부터 건설경기가 호황을 누리게 되자 유기장들은 미장 등 건설 관계 업종으로 전업하거나 행상이나 농업 등으로 전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1980 년대 이후 점차 유기업이 호황을 누리게 되자 다시 유기장의 길을 재개했 다. 이렇게 유기장들이 다른 유기점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타 직종으로 이

146) 수공업 장인이 많았던 안성 시내에서 2대 이상 연죽장을 해 온 집안일 경우에도 가족 이 유기장으로 입문하는 경우가 있었으며, 집안에서는 연죽장보다 유기장하는 것을 선호 하는 경우가 많았다(Q씨 제보). 가질대장이었던 Q씨나 부질대장이었던 Sch씨(남, 1918

~ 1975년)도 이런 경우이다. 숭인동에 거주하는 Q씨의 집안은 원래 현 충남 아산시에 속 한 신창(新昌)이었는데, Q씨의 증조모 대에 안성으로 이사하여 조부 대부터 연죽제작을 시작하였다. Q씨의 아버지와 작은 아버지도 연죽장으로 2대째 연죽점을 하였다. Q씨도 처음에는 연죽 제작을 하였으나 유기에 비해 벌이가 좋지 않아 그만두고 유기장의 길을 가게 되었다(Q씨 제보). 유기장 Sch씨는 연죽점을 하던 손사천의 아들이다. Sch씨 집안 은 아버지 대부터 연죽을 제작하여 형제 중 동생 2명이 연죽 제작을 하였다. 그러나 Sch씨는 처음부터 유기장의 길로 들어서 1950년대 말경까지 유기장의 길을 갔다.

147) 주물기법으로 유기를 제작하는 공장에서는 주물과정에서 향남틀 암틀과 수틀에 갯토를 넣고 본을 떠서 용해된 쇳물을 붓기 전에 표면을 단단하게 하여 쇳물이 잘 흐르도록 그 을음질을 한다. 예전에는 관솔불로 그을음질을 했지만 1950년대 이후 경유를 사용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공장에 사람이 안 보일정도로” 그을음이 많이 났기 때문에 주물대 장들은 천식으로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더하여 장인들은 술· 담배를 많이 했기에 주물 대장들은 대개 단명했다(유기업 종사자 O씨 및 유기장 D씨 등 제보). 이에 따라 이것이 전직의 사유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가질대장의 경우 가질 과정에서 발생하는 소음으 로 인한 건강상의 문제도 전직의 사유가 되었다(가질대장 Q씨의 경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