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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문화상품화와 그 생산자의 등장

기에 있던 전자본주의 사회의 전통과 민속은 현대적 상품으로 “환생”하 여 국가와 관광추진세력 및 지역주민의 수입원천이 되었다(Dan Ben-Amos 1990: ix).

이러한 전통과 민속의 현대적 환생의 하나로 등장한 것은 여행객들의 관 광기념품(souvenirs)을 비롯한 전근대사회 일상생활용품의 전통문화상품화 이다. 1960년대 산업화과정에서 유기의 일상생활용품으로서의 상품가치가 현저히 저하된 후 유기점주 및 장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새로운 대안이 일상에서 사멸한 전통과 민속의 상품화였다. 이러한 선택으로 조선후기 일상생활용 상품으로 탄생한 유기는 관광객들에게 관광지의 고유성을 회 상시켜 줄 전통문화상품이 되었고, 한국문화의 표상으로 해외수출의 길에 도 오르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기 점주들과 장인들은 장인이자 상인이었 던 자신의 정체성에 전통문화상품 생산자이자 판매자인 전통 계승자로서 의 정체성을 더하게 되었고, 이와 함께 관광사업자이자 관광 상품 생산자 로서의 정체성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장인과 그 생산물의 변화된 정체성에 의해 유기가 다시 생활기물 로 돌아오기까지 안성맞춤유기는 외국인기호품, 관광기념품, 한국 민예품, 모조 골동품 등 전통문화상품으로 그 정체성을 변화시켜갔으며, 장인들 역시 그 생산자로 명맥을 이어가게 되었다.

K씨(남, 1916년 생)는 1935년 4월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의 “타방 외무 원”으로 입사(孟仁在‧金鍾太 1980: 302~303; 337)하여 유기업과 인연을 맺 었고, 일제사기(日製沙器)와 도자기(陶磁器)에 대항한 전국적인 판로개척 사업에 참여하며 동 회사의 사업전략을 몸소 익혔다. 그리고 1937년 전쟁 의 여파에 따른 원료 공급 등의 문제로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의 유기생 산이 어렵게 되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 후 앞서 언급되었듯이 해방과 함께 전국적으로 유기가 호황을 이루어 유기점이 급속히 늘어가던 시절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에서 주물대장을 하던 김기준과 손을 잡고 정광사 를 설립하여 다시 유기업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이후 김기준이 죽고 아들 인 김태화로 정광사가 넘어가 1958년 경 문을 닫게 되자 K씨는 자신의 집터에 유기공장을 차리게 된다. 앞 서 밝혔듯이 독자적인 유기회사를 운 영하기 전 K씨는 윤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 생산품 판매를 도맡아 하는 등 유기 판매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보였다(목물장수 Jt씨 제보). 이는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 외무원 시절 거래하던 타 지역 특판점을 자신의 거래처로 갖게 된 것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렇게 K씨는 전국적 판매망 을 가지고 유기의 판매와 경영전략에 능하게 되었다.

이런 능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유기회사를 차리게 된 후 유기 식기가 사양화되 어 거의 판매가 이루어지지 않게 되자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의 사업방침 중 하 나였던 신제품 개발 및 해외 수출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K씨는 당시 유 기업계에서 공예품이라 불리던 미군이나 해외 관광객의 기호에 맞춘 관광 상품을 생산하고, 이를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판매함과 동시에 해외로 수 출하여 정부의 관광부흥정책과 수출을 통한 외화획득 정책에 적극 부응하 였다. 그리고 이에 따른 각종 혜택을 통해 활로를 모색했다.

이러한 행로는 1963년경부터 시작된다. 1963년 K씨는 서울에서 “외국인 기념품”

을 주문 받아 당시 4곳의 유기점 중 유일하게 유기생산에 들어가게 되었다(『경향 신문』1963.07.13. 기사). 그리고 1965년경에는 미군 PX에 화병ㆍ벽걸이 장식을 외 국인 기호품으로 납품하였고, 미국ㆍ홍콩 등지에도 “민속공예품”을 수출하여 연간 약 5,000 달러정도의 수출고를 기록하는 등 호황을 누렸다. 이에 따라 풍화유기안 성공장에는 80여명의 장인이 일을 하고 있었고, 월 2톤의 동을 소비하며 연중무휴 로 가동되었다(金泳鎬 1965: 164). 아울러 서울 반도조선아케이드에 관광상품

점을 개점하고 외국 관광객들을 상대로 한 관광 상품 판매를 보다 본격적 으로 추진하였다(Ks씨 제보).

한편 정부에서는 그 해 4월에 나전칠기, 자수, 진유공예품(眞鍮工藝品) 등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판매되거나 수출하는 물품을 제작하는 영세 수공업자들에게 시설 및 운영자금을 대출해 주는 ‘영세가내수공업회전대 출자금제도’를 도입하여 국민은행으로 하여금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는 자신이 직접 노동에 종사하는 9인 미만의 사업장 중 ‘달러를 벌 수 있는 업종’에 우선적으로 지원이 되었고, 담보대출이었으나 3만원 미만의 금 액에 대해서는 신용융자도 제공해주어 영세수공업자에게는 대단한 편의가 제공되는 제도였다(『경향신문』1965.04.14. 기사). 이러한 자금을 지원받은 업체는 반도조선 아케이드나 워커힐 호텔, 미군 PX를 통해 외국인 관광 객들에게 상품을 판매하고, 무역회사를 통해 해외 수출을 하던 업체들이 포함 되었다. 따라서 당시 진유공예품을 관광상품으로 생산하여 반도 조 선 아케이드․미군 PX 등에서 판매하며 해외로 수출하던 K씨는 이러한 기 회들을 적극 활용하였을 것이다.

“여기 K씨가 수출을 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 그 때 박정희 정부 때 아니 여 수출만 하면 수출업자는 정부에서 그냥 도와줬어. 그렇게 해서 K씨가 공 장을 일으켜 세운 것 … 정부에서 지원을 많이 해줬다. 수출을 하면 신용장 만 가지고 가면 돈을 다 미리 준대여 물건 선적하기 전에, 그리고 선적하고 나서 정리하고 그랬다. 수출업자 하면 뭐 정부에서 그냥 도와줬다”

(안성 봉남동 일대 노인들 제보)

이렇게 K씨는 정부의 관광과 수출 장려를 위한 각종 혜택을 받아 수출 산업을 점차 더 확대하여 운영하였으며, 유기뿐만 아니라 죽세품․맷방석․

창호지로 만든 카드 등 전통문화상품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수공예품을 생산․수출하였다. 이렇게 생산품목을 점차 확장하면서 “신시산업”이라는 명칭으로 무역회사도 직접 운영하였다. 이 회사는 서울에 사무소를 두고 조소 등 미술 전공자를 시간제 근로자로 채용하여 제품 디자인을 담당하 게 하였다. 그리고 안성 공장의 장인들이 제품 생산을 담당하여 하루에

분 류 상품명 형 태 크기(㎝) 출 처

동물장식

유기공장

진열품

사슴 7.6*6.4

Ks씨 유기점 1960~70년대 상품 팜플렛

기린

물고기

벽걸이 장식품

스푼

사슴

[표 4-11] 안성 K씨 유기점 외국인 기호품 등 관광공예품

2~3개 정도의 새로운 상품이 출시될 정도로 수많은 상품들을 생산했다(Ks 씨 제보).

인형 장식품

세여인 24*12

소녀 24*12

생각 하는 사람

43*30.5

두여인 32*20

기타 공예품

각종

장식품

기념

주화

이렇게 1960년대 중반 이후 안성유기공방의 설립자 K씨는 박정희 정권의 경제지상주의와 이에 따른 관광한국 건설 등 국가정책에 적극 대응하며, 유 기점장으로서의 정체성을 이어가게 된다.

그러나 1970년대 초에는 “신시산업”이 부도나서 K씨 유기점은 운영에 어 려움을 겪기도 했다(Ks씨 제보). 한편 이 시기 문화재관리국에서는 지정 및 비지정 문화재의 모조품 생산 사업을 보호․육성하겠다는 정책을 발표

구 분 상품명 형 태 크기

(㎝) 비 고

민속공 예품

사천왕 벽걸이

장식

13*23 이 상품들은 대부 분 외국 관광객 을 대상으로 한 관광상품이나 수 출상품으로 판매 되었다. 특히 남 대문 종루는 수 출이 많이 이루 어졌으며, 예전처 장석

[표 4-12] 안성 K씨 유기점 전통문화상품

했다. 이 정책은 지나친 문화재에 대한 사랑으로 골동품 수집이 비정상적 으로 활성화되거나 문화재가 국외로 불법 유출되는 등 유형문화재를 둘러 싼 상행위를 방지함과 동시에 기술 연마를 통해 찬란했던 문화를 재현하 여 문화재를 보호․육성한다는 목적을 갖고 진행된 사업이었다. 그러나 보 다 궁극적인 목적은 ‘해외 관광객 유치와 외화획득’이라는 국가 정책목 표를 실현하고자 문화재 모조품을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여 문화재의 상품 화에 의한 경제적 가치를 추구하는 데에 있었다(朴英武 1971: 122~125;

『동아일보』1970.02.14. 기사). 한마디로 실제 문화재를 통한 경제적 가치 실현은 막고, 모조품을 제조해 관광 상품으로 이를 실현하겠다는 것이었 다. 이러한 정부 정책은 K씨에게 또 다른 활로를 마련해 준다. K씨는 불 상, 별전, 마패 등 모조골동품을 제조해 국내 판매는 물론 “샌프란시스 코의 세계적인 토산품 백화점”에까지 수출(『동아일보』1978.06.12. 기사) 하는 등 전통문화상품을 주력 상품으로 하여 유기점을 다시 정상화 할 수 있게 된다.

“수출하다가 부도나고 아버님이 골동품(모조골동품) 그걸 해서 그거는 값이 좋으니까 … 몇 년 차차 차차 나아졌다. … 그렇게 생계유지를 한 10년 이 상 했다.”

(Ks씨 제보)

남대문 종루 (鐘樓)

럼 호황을 누리 는 것은 아니지 만 지금도 판매 이루어지고 있다(Ks씨 제보).

(사진출처: K씨 유 기점

1960~70년대 상품 팜플렛 및 판매장 전시품)

갖신형 재떨이 태극형

재떨이 길이 6

탑형 교회용

손종

모조골 동품

봉업사명 청동향로

청동쌍 사자촛대

길이 51

『국보』등 금속 유물 도록을 참 고하여 본을 떠 서 제작을 했으 며, 입사나 조각 등은 그 분야 전 문가에게 의뢰하 였다. 이렇게 제 작된 모조품은 전국 골동상회나 관광 기념품점에 서 판매되었다(Ks 씨 제보).

종류는 이외 금 동불상, 금동촛 대, 범종, 고려 청동수저, 동경 등이 있다.

(사진출처 : 안성마 춤유기박물관 2009 및 K씨 유기점 1960~70년대 상품 팜플렛, 안성마춤유 기박물관 전시품) 봉업사명

청동북 지름 46

고려향완

20.5

청동거울 지름 13.5

청동정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