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안성의 현재
안성은 예전부터 군(郡) 중심지였던 안성 1‧2‧3동, 아파트 단지의 조성으 로 새로운 중심지가 되어가고 있는 공도읍, 그리고 양성면․죽산면을 포함 한 11개 면 지역으로 구성되어 있다. 2013년 현재 안성의 인구는 약 18만 명으로 경기도 전체 인구(약 1,200만)에 대한 31개 시 군의 평균(39만)에
16) 조선후기 발달된 시장경제 체제의 근대화에 따른 변화과정에 대해서는 최근 주체인 상 인의 실천을 중심으로 민속지적 연구가 시도 된 바 있다(채수홍․구혜경 2015).
훨씬 못 미친다. 그리고 안성시 토지이용현황을 살펴보면 전체 면적(553.5
㎢) 중 임야(272.8㎢)가 총 면적의 49.3%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그 다음은 농지(논 117.4㎢, 밭 52.1㎢)가 30.6%로 임야와 농지가 안성시 토지의 약 80%를 차지한다.
또 생산구조는 제조업 47.8%, 서비스업 33.4%로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경제규모가 가장 크다고 할 수 있다(2007년 기준 www.anseong.go.kr/
section/stat2). 따라서 통계자료와 눈으로 확인되는 2010년을 전후한 안성 의 전반적인 모양새는 사람이 많지 않은 농촌, 지방으로 표현되는 대한민 국 한 지역의 모습을 하고 있다.
[표 1-1] 안성시 토지이용 현황(안성시 2012: 16)
17) 1인당 지역내 총생산=지역 내 총 생산÷지역 내 추계인구(연앙인구)
구 분 단 위 2005 2006 2007 지역내총생산(경상가격) 백만원 3,253,758.9 4,207,487.9 4,408,779.5
(경기도대비구성비) % 1.92 2.33 2.28
생산구조(경상가격) % 100.00 100.00 100.00
농 림 어 업 8.21 4.31 5.40
광 공 업 0.29 0.60 0.50
제 조 업 32.33 47.40 47.80
전기 가스 수도업 1.94 1.59 2.00
건 설 업 18.02 11.04 10.90
서 비 스 업 39.20 35.60 33.40
1인당 지역내총생산17) 천원 20,844.60 26,513.55 27,184.32 인 구 천명 157.13 159.65 163.73
(경기도대비구성비) % 1.48 1.47 -
[표 1-2] 안성시 생산구조(안성시 2012: 566)
통합 이전
군(郡)명칭 통합 이전 면 통합 이후 면
안성군
동리면, 서리면, 북리면 읍내면
북좌면, 가사면, 거곡면, 기좌면, 율동면 보개면
현재의 안성은 1914년 조선총독부 령 제111호에 의거 안성, 양성, 죽산 으로 나뉘어 있던 인근 세 지역이 안성군으로 통합되어 이루어졌다. 통합 되기 이전 안성군은 24개면으로 구성되어 있었고, 양성군은 13개 면, 죽 산군은 15개 면으로 구성되었었는데, 이를 안성군 12개 면으로 재편한 것 이다. 각 면의 통폐합 현황은 다음과 같으며, 통합과정에서 죽산군의 일 부 지역이 용인군에 편입되어 이전에 비해 그 세가 약화되었다.(안성시 2011: 79 ~ 81)
조령면, 대문면, 가동면, 월동면 금광면 기촌면, 송죽면, 덕곡면, 입장면 서운면 목촌면, 만곡면, 진두면, 우곡면 미양면 죽촌면, 소촌면, 견내면, 금곡면 대덕면
양성군
읍내면, 지동면, 송오리면, 금곡면, 덕산면 양성면 공제면, 도일면, 구천리면, 영통면, 구룡동면 공도면 용동면, 반곡면, 원당면, 승량원면 원곡면
죽산군
제촌면, 북이면, 북일면, 남일면, 남이면 죽일면
부일면, 부이면, 남면 죽이면
서일면, 서이면, 서삼면 죽삼면
근삼면, 근일이면 용인군
외사면
죽산군 원삼면, 원일면 용인군
원삼면 [표 1-3] 안성군 통합 현황
이후 1931년 안성시내 읍내면은 안성면으로 명칭이 개편되었고, 1937년 에는 인구증가로 인해 안성면이 안성읍이 되었다. 1963년에는 전국에 걸 쳐 행정구역 경계조정이 있었는데, 이 때 용인군 고삼면의 3개리가 양성 면으로 편입되었다. 또 1983년에는 원곡면 소속 용이리, 죽백리, 월곡리, 청룡리와 공도면 소사리를 평택에 넘겨주었다. 안성군은 1997년 안성시로 승격하였으며, 1998년 안성읍을 안성1․2․3동으로 분동하였다. 2001년에는 공도면이 인구증가에 따라 공도읍으로 승격하여 지금의 안성시 모양을 갖 추게 되었다.18)
18) 본고에서 안성이라는 지명의 표기는 1914년을 기준으로 그 이전에는 군 통합 전 안성군 을 의미하게 될 것이며, 그 이후 시기에는 통합 후 안성군을 이르게 될 것이다.
나
.
안성의 역사와 문화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1914년 이전 안성은 안성, 양성, 죽산 세 지 역으로 나누어 보아야 할 것이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안성은 백성 군(白城郡), 양성은 백성군의 영현인 적성현(赤城縣)이었으며, 죽산은 개산 군(介山郡)으로 불리었다. 고려초에 이르러 안성과 양성은 현대의 명칭으 로 불리기 시작했고, 죽산은 죽주(竹州)로 개칭되었다가 조선 태종 때 현 재의 명칭이 되었다.19)
안성․양성․죽산 중 시대적으로 가장 먼저 세력을 떨친 지역은 죽산이다.
죽산지역 성세의 기틀은 최소한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형성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이 지역은 삼국시대 이래 경상도와 서울‧경기지방을 연결 하는 주요 교통로 상에 위치하여 군사적으로나 행정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崔永俊 1990: 82 ~ 92). 출토유물을 통해 통일신라시대 이 전 축조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죽주산성이나 망이산성은 죽산지역의 이 러한 군사적 중요성을 보여주는 유적이다(단국대학교 중앙박물관 1999:
28~29). 죽주산성은 비봉산 자락에 존재하며, 인근에는 고려 태조 왕건의 진전사찰이었던 봉업사지20)를 비롯하여 장명사지 등 현 죽산면 소재지 일 원으로 거대한 불교유적지가 존재한다. 봉업사를 비롯한 이 일대 불교유 적의 위상은 1966년 경지정리 작업 때 출토된 보물 제 1414호 봉업사명청 동향로(奉業寺銘靑銅香爐), 보물 제 576호 봉업사명 청동북(奉業寺銘 靑銅 金鼓)을 비롯하여 봉업사지에 남아 있는 보물 제 435호 안성 봉업사지 오 층석탑(安城 奉業寺址 五層石塔), 보물 제 983호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 입상(安城 奉業寺址 石造如來立像)21) 등을 통해서도 짐작 할 수 있다. 이 렇게 죽산은 고려 건국 초기부터 그 세력을 떨치게 되어 불교문화의 색채 가 강했으며, 조선시대까지 그 성세를 이어왔다.
안성과 양성의 현재 문화적 모습은 조선시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갖
19) 1871 『竹山府邑誌』; 1871 『陽城邑誌』; 1899 『安城郡邑誌』 각 ‘建置沿革’ 조항 20) 『高麗史』 卷四十 「世家」 卷第四十 恭愍王 12年 2월 5일(음) 기사; 『大東地志』
卷四 「竹山」 “山水”
21) 안성 봉업사지 석조여래입상은 현재 칠장사 경내에 모셔져 있다.
추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특징은 발달된 교통로와 이를 기반 으로 상업과 수공업이 번성하였다는 측면이다. 안성과 양성에도 물론 불 교 관련 유적이 있지만 조선시대 이전에 성세를 이루었던 죽산의 불교문 화와는 조금 양상을 달리한다. 안성의 주요 사찰인 청룡사는 고찰로서의 면모보다는 오히려 조선후기 이후 남사당의 본거지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측면은 조선후기 안성이 장과 상업이 발달하여 번화하였던 것과 관련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와 관련하여 안성에서는 양반계급에 속한 사 람들도 상업에 종사하는 것에 적극적이었으며,22) 이러한 안성 양반계급의 실용적인 측면은 실학 등 새로운 사상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자세를 유지 할 수 있는 안성의 문화적 분위기를 형성하였다. 또 안성에 전하는 유기 장사나 숟가락장사로 나가는 큰아기에 대한 노래를 통해서 여성들의 삶에 대해서도 개방적인 안성의 문화적 특성을 읽을 수 있다(金台榮 1925:
38~39). 이 노래가사에 의하면 조선후기 안성에서는 결혼안한 여성도 유기 행상으로 나갔고, 이를 꺼려 감추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현상을 노래로 만들어 널리 부를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이렇게 조선후기 안성은 양반이 나 여성들도 상업 활동에 종사할 정도로 상리를 중요시하는 실학적 유교 문화가 통용되었다.
조선후기 장과 상업, 이와 관련하여 수공업이 발달했던 점은 번화한 도 회지로서 안성읍의 모습을 연출하였다. 이에 따라 장을 기반으로 식민지 근대화 과정에서 의병운동과 삼일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일찍이 서구 문화의 유입도 왕성하여 천주교와 기독교, 학교제도 등 근대적 문물도 발 달하였다. 안성을 대표하는 이러한 문화적 특징들은 오늘날 문화유산에 대한 관심과 연결되어 안성장, 안성맞춤을 중심으로 다양한 안성문화의 연망을 만들어 가고 있다.
22) “안성시장에는 古來로 八道物産이 集散되야 商業이 相當히 發達되얏고 所爲兩班階級에 속한자도 店鋪에서 활동하기를 不憚하얏슴으로 他地方에 比하야 懸殊하니라 俗謠에 ‘이 를일해 安城장에 八道物貨벌열’이라 한 것을 見하더라도 安城市場의 商業의 發達을 可 知니라”(金台榮 1925: 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