든 가을-겨울용”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그리고 그 제작을 위해서 이를 사용했던 지역 노인들을 만나 기물과 그에 담겼던 음식 등 식생활 문화에 대해 조사하였다. 조사 후에는 이를 토대로 예전의 상차림을 복원하였고, 그것을 현대의 생활에 맞게 재구성해 “뿌리깊은나무 반상기”를 탄생시 켰다. 그 제작이 이루어지기까지 과정에 대해서는 당시 디자인을 담당했 던 Sc씨의 구술이 잘 드러내 준다(위와 같음).
“파란만장했습니다. 모든 아이디어는 ○사장에게서 나오고 그 아이디어를 디자인으로 구현하는 것은 제가 했습니다. 완성품이 나오기까지 현장에서 뛴 사람은 한사장 세상 뜨신 이듬해에 형님 뒤를 따른 ○○○씨입니다. 그 는 반상기 개발할 때, 반상기를 만들던 곳에 사는 팔순 넘은 할머니들을 찾 아다니며 구술을 받았습니다. 어떤 그릇에 어떤 계절 반찬을 담아 먹었나, 크기는 어땠나, 계절마다 상차림은 어땠나를 살펴 옛 밥상차림을 복원시켜 놓고 아파트 생활의 특성, 우리 식단의 변화들을 고려해서 현실에 맞도록 크기와 구색을 조절했습니다. 장독대 놓고 살던 시대의 것을 그대로 복원한 것이 아닙니다.”
(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398~402)
이렇게 브리테니커사의 전통 복원은 당해 물질의 과거 일상생활 속에서 의 사용맥락에 대한 고증을 선행 한 후 그것을 현대인의 생활에 맞춰 개 량해 현대화된 물질문화로 재탄생시켜 상품성을 갖추었다. 이러한 사업방 침은 S사장이 1976년부터 발간한 잡지 “뿌리깊은나무”의 창간사에 잘 드러난다.
“뿌리깊은나무는 우리 문화의 바탕이 토박이 문화이라고 믿습니다. 또 이 토박이 문화가 역사에서 얕잡힌 숨은 가치를 펼치어, 우리의 살갗에 맞닿지 않은 고급문화의 그늘에서 시들지도 않고 이 시대를 휩쓰는 대중문화에 치 이지도 않으면서, 변화가 주는 진보와 조화롭게 만나야만 우리 문화가 더 싱싱하게 뻗는다고 생각합니다. 또 우리 문화가 그렇게 뻗어야만 우리가 변 화 속에서도 안정된 마음과 넉넉한 살림을 함께 ‘잘 살게’ 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문화가 세계문화의 한 갈래로서 씩씩하게 자라야
[그림 4-7] 뿌리깊은나무 방짜 합반상기
[그림 4-8] 뿌리깊은나무 방짜 옥바리반상기
[그림 4-9] 뿌리깊은나무 방짜 제기 (출처: 1990년 “Britannica”) 세계문화가 더욱 발전한다고 생각합니다.”
(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49-50)
이에 따르면 한국 브리테니커사의 우리문화 사업은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에 대한 대안적 문화로 민중문화인 “토박이 문화”를 설정하고, 그를 발 굴․확산 시켰던 당시 지식인들의 문화운동 이념과 맞닿아 있다. 이러한 이 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한국브리테니커사의 유기제품은 ‘뿌리깊은나무 방 짜 옥바리반상기’․‘뿌리깊은나무 방짜 합반상기’․‘뿌리깊은나무 방짜 제기’ 세 가지로 제작되었다(한국브리테니커회사 1990: 17).
나. 일상생활유기의 부활 : 대중생활용품에서 고급생활용품으로
한국브리테니커사의 일상생활유기 사업은 위에서 언급되었듯이 상품으로 서 판매를 위한 것이었기에 그 상품성의 방향은 브리테니커사의 사업방향
에 맞춰 정해지게 되었다. 당시 브리테니커사는 인류 최고의 지적유산을 생산‧판매한다는 회사의 방침을 세워놓고 백과사전을 주요상품으로 판매 했다. 이에 따라 상당히 고가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은 실용서로서보다 소장용으로 여러 분야에서 최고를 지향하는 사람들에게 주로 판매되는 경 향이 있었다(한국브리테니커사 상무 C씨 제보).
이러한 브리테니커사의 사업방침은 “토박이 문화”의 “숨은 가치”를 찾아 이를 우리문화의 탁월한 유산으로 드러내고자 한 S사장의 또 다른 차원의 이념과 만나 초기 문화사업이었던 판소리감상회부터 적용되었다.
판소리감상회는 당시 판소리학회의 구성원이었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 수 정병욱과 문화재연구소 이보형의 권유에 의해 시작되었고, 동 학회와 한국브리테니커사의 공동주최로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감상회의 판소리 와 소리꾼․고수의 선정은 이들 전문가들이 주도적으로 하게 되었다. 그리 고 그 선정 기준은 어느 소리의 근본을 얼마나 충실히 계승하고 있느냐의
“정통성”과 실력 두 가지 측면이었다. 선정 작업을 위해 이들은 전국방 방곡곡을 돌아다니면서 직접 소리꾼들의 소리를 듣고 심사하였고, 이러한 심사과정을 통해 무대에 오른 사람들은 정통성을 간직한 당대 명창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정통성”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 이 들의 소리를 레코드로 기록하였다(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276~283).
유기 역시 이러한 기준에 부합하게 만들기 위해 생산자와 디자인, 가격 측면에서 고급화 전략을 취하였다. 이에 따라 우선 유기 생산자는 “정통 성”과 당대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장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구체 적인 실현과정은 국가에 의해 그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무형문화재 제도와 밀접히 연관되어 진행되었다. 당시 한국 브리테니커사 는 우리문화를 발굴하고 보존하는 방법으로 문화재위원들과 친분관계를 유지하며 문화재 지정을 통해 실현하고자 했다. 이에 따라 판소리 발표회 참여 명창들은 무형문화재 보유자로 인정되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토 박이 생활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반상기 사업에 있어서도 이러한 방 침을 적용해 자신들의 상품에 대한 고급화 전략으로 이어갔다.
초기 유기 반상기 제조는 잎차를 비롯한 전통문화상품 생산 단지인 벌교
징광리와 가까웠으며, 해방 후 유기생산지로 유명했던 전남 순천시 금곡 동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이곳에는 유기장 Jh씨(남, 1929년생)의 공장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는데, 여기서 생산을 진행하였다. 그리고 총 책임자였 던 Sa씨와 직원들이 Jh씨의 공장에서 자체 생산체제를 갖출 준비를 했다.
그렇게 하여 제작방법 등 기술적인 부분을 숙지하고 본기와 작업도구 일 습을 갖추어 1979년 6월 벌교 징광리 세동에 공장을 설립하여 직접 생산 에 들어가게 되었다(순천유기장 Jh씨 부인; Ju스님 제보). 이때 브리테니커 사의 벌교 현장 책임자였던 Sa씨는 유기장 Jh씨에게 문화재 지정을 약속 하며 벌교의 공장으로 가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유기장 Jh씨는 여러 가지 이유로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유기점 직원이었고 본인보다 연 배가 높았던 Jd씨에게 이를 양보하였다(순천유기장 Jh씨 부인 제보). 이후 Jd씨는 동 회사의 노력으로 무형문화재가 되었다(유기장들 제보). 이렇게 하여 브리테니커사는 유기 생산자를 “정통성”을 갖춘 국가 공인 최고의 장 인으로 재탄생시켜 당사 상품에 대한 진정성과 고유성을 배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듯이 뿌리깊은나무 유기는 형태에 있어서도 정통성 과 현대성․예술성을 갖추도록 장인 개인의 감각에 의한 것이 아닌 동 회 사의 전문가와 S사장의 감각이 결합되어 디자인되었고, 이를 장인으로 하 여금 제작하게 하여 인류 최고의 지적유산으로 탄생시키고자 하였다.(강 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398~402) 유기의 제작은 일반 장인들이 주물로 부어서 만드는 것과 중요무형문화재였던 Jd씨가 방짜로 두드려 만드는 것 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그리고 무형문화재 장인이 제작한 것은 형태면 에서는 큰 차이가 없었지만 ‘뿌리깊은나무 방짜반상기’라 하고, 그 외 의 것은 ‘일반 반상기’로 구분하였다(순천 유기장 Yk씨; 한국브리테니커 사 전 세일즈맨 Y씨 제보). 아울러 무형문화재의 제작품에는 “뿌리깊은나 무 반상기”라 명문을 새기고, 제작자 Jd씨의 확인서를 발급하여 제작자 와 상품을 구분할 수 있게 하였으며, 판매가격도 3배 정도 높게 책정하였다.
[그림 4-11] 확 인서
(http://blog.n a v e r . c o m / d h 8 9 4 20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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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4-10] “뿌리깊은나무 반 상 기 ” ( h t t p : / / g r g k r . blog.me 2015.01.02. 접속)
이런 과정을 거쳐 반상기를 만들게 되자 “잊어버린 ‘조선 밥그릇’을 뿌리깊은나무가 되찾아 주고자 한다”(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399)는 광고를 통해 민족문화담론으로 소비자들에게 다가갔다. 한국브리테니커사 는 당시 전주, 광주, 순천, 목포, 청주, 대전, 부산, 마산, 창원, 대구, 울산, 공주 등 전국 주요 도시에 사업본부를 두고, 각 지역에 세일즈 매니저가 10여 명, 세일즈맨이 100~200여명에 이르러 1,000명 ~ 1,500여명에 달하는 전국적 판매조직을 갖고 있었다(한국브리테니커사 상무 C씨; 전 세일즈맨 Y씨 제보). 유기를 비롯하여 전통문화상품의 판매는 이 세일즈맨 조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자신들의 상품을 여타의 상품들과 민족문화의 전통성․
정통성․고유성․진정성 등에 있어서 구분하고, 형태면에서도 과거에 기반 하나 현대생활에 맞춘 정제된 품질의 상품을 만들어 내어 세일즈맨들을 통해 고가(高價)였던 브리테니커 백과사전이 그러하였듯이 고가로 소수의 중산층 이상을 중심으로 판매 되었다.
“쎄일즈 조직을 통해 살 만한 여유가 되는 고객들에게 방문판매를 했습니다.
○ 사장의 전통감각을 알아주는, 또 그런 값비싼 문화상품을 구입할 여유가 있는 소수가 샀습니다. ‘내가 전통공예를 잘 몰라도 ○사장이 만든 거라면 제대로 만들었을 거다.’하는 사람들이 그래도 있었어요. …”
(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400)
브리테니커사가 인류 최고의 지적유산을 생산․판매한다는 인식은 세일즈 맨들에게도 깊이 각인되어 있었다.
“브리테니커의 상품은 어디에 내놔도 가격을 떠나서 최고의 상품이라 생각 했다.”
(한국브리테니커사 전 세일즈맨 Y씨 제보)
이렇게 유기는 인류 최고의 지적유산으로서 재탄생되어 특정 계층을 대 상으로 판매가 진행되었고, 그 사용자들을 브리테니커 백과사전 소장자들 과 같이 사회적으로 구분해 주는 역할까지 담당했다. 뿌리깊은나무 유기 는 사회적 계층을 ‘뿌리깊은나무 반상기 사용계층’, 브리테니커사의
‘일반반상기 사용계층’, 이 회사 유기를 사용 할 수 없는 계층으로 구 분했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상품이 한국 전통 물질문화를 대표하는 것 으로 저명한 기관이나 전문가들에 의해 선호됨으로 이러한 구분은 더욱 선명해졌을 것이다.
“그 그릇들이 브리티시 뮤지엄 소장품에 들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전 서울대학교 환경대학원 교수(강운구와 쉰여덟사람 2008: 400)
“미니멀리즘을 대표하는 현대 예술가 도널드 저드도 한국에 왔다가 놋쇠합 반상기를 보고 반해서 세 벌을 사가지고 가기도 했습니다.”
전 샘이깊은물 미술편집위원(위와 같음)
“옛것에의 취향은 경제적 성공의 차원을 초월하여 사회적 성공이나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