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검토한 바와 같이 경부철도 부설 이후 원거리 물산의 수송은 철도 를 통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 철도가 평택을 경유하게 되면서 평택역이 생겼고, 1913년 개설된 인근의 평택시장은(허영란 1997: 173~174) 내륙지 역인 안성과 해안에 연접한 둔포 등 주변 지역의 원거리 물산유통을 담당 하며 새롭게 물산집산지가 되었다. 이에 따라 종전에 미곡을 비롯하여 전 라․경상․충청도에서 올라오는 물산 뿐 만 아니라 관서․관북지방 등 전국 원 거리 물산의 중간집산지였던 안성시장은 점차 퇴색해 평택역으로 이송될 미곡 등 근거리 물산만을 취급하게 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경남철도 안성선의 부설, 시구개정, 인근벽지연결도로 개수 등 안성사람들의 각고
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안성장은 계속 위축되어 갔다. 안성장과 안성의 대 표 수공업이었던 유기는 서로의 발전을 위하여 상보작용을 하고 있었고, 안성장은 안성유기의 판매시장이었던 만큼 그 쇠퇴는 안성유기의 쇠퇴로 연결되었다.
이시기 안성유기가 쇠퇴한 또 다른 이유 또한 평택역과 관련이 되는데, 그것은 이 평택역을 통해 각종 외래 물산이 물밀듯이 안성으로 밀려들었 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외래물산과 대응하여 경쟁관계에 있는 토착 상품의 성쇠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안성은 장과 함께 유기 등 수공업 이 발달한 지역으로 이 시기부터 안성의 수공업품은 이런 외래 물산과 무 한경쟁에 돌입하게 된다. 외래 물산 중 유기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준 것 은 ‘왜사발’로 불리운 일본산 도자기인 사기그릇이다. 김태영은 일제시 대 일본산 도자기가 밀려들어 와 사람들은 그것을 천시하였지만, 가격이 저렴하여 유기보다는 사기를 쓰는 경향이 늘어갔다고 회고했다(김태영 제 보; 金泳鎬 1965: 162~163 재인용). 이렇듯 일본산 도자기는 가격 면에서 경쟁력을 갖추고 안성유기 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1880년대 개항이 되면서부터 외국물산이 유입되기 시작하였지만, 경부철 도가 부설되고 평택역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러한 경향이 크게 대두되지는 않았다. 「경기도급충청도지방상황병이농황시찰보고(京畿道及忠淸道地方 商況幷二農況視察報告)」에 의하면 1893년경 개항장으로 들어와 경기도와 충청도 지방에서 거래되었던 외국물품은 직물류로 옥양목(金巾)․한랭사(寒 冷紗)․목화(白綿)․목면(木綿)․마포(麻布)․각종 단필(緞疋) 등과 동류(銅類), 석 유, 도자기(陶製器), 성냥, 양산(洋傘), 화산(和傘) 등이 있었다. 이 중 일본 산은 목면(木棉) 등 직물류와 동류(銅類)․도기(陶器)․성냥(マッチ)․양산(洋傘)․
화산(和傘)․철과(鐵鍋)117) 등인데, 인천‧경성을 통해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한국이나 청국 상인들에 의해 공주(公州)․황산(黃山)․예산 (禮山)․둔포(屯浦)․대소원(大召院) 등의 장에서 거래되었다. 당시 안성시장에 서는 “동기(銅器)나 진유기(眞鍮器) 식기” 등의 제작을 위해 동류(銅類) 가 대량으로 거래되었다. 그러나 일본산 도자기는 공주․논산․강경․황산․예
117) 괭이의 일종(박호석/안승모 2001:84~85)
산․곡교․둔포 등에 전해지기는 했지만 어느 곳에서도 거래가 활발하지 않 았다. 유기의 원료인 동의 거래가 대량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던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안성에서도 역시 일본산 도자기의 거래가 활발하지는 않았 을 것이다. 당시 일본산 도자기는 조선의 도자기에 비해 조잡하고 깨지기 쉬운 것으로 인식되었고, 흰색을 좋아하는 조선 사람의 기호에도 색깔이 들어간 일본 도자기는 맞지 않았다. 아울러 철도가 개통되기 전 조선 상 인들은 소량의 화물을 인천․경성에서 구입하여 육로로 운반하였기에 판매 가격이 비싸져서 품질과 가격 면에서 모두 경쟁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 다(外務省通商局 1893: 23~42).
이러한 경향은 1900년대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1902년 작성된 영사관보 고「한국경기강원급충청도농상황시찰보고서(韓國京畿江原及忠淸道農商況 視察報告書)」에 의하면 안성장은 “일대시장(一大市場)”으로 경기도에서 송도(松都)에 다음가는 물산집산지로 기록된다. 당시 외국 물품은 인천이 나 경성에서 안성으로 이입되었는데 인천에서는 석유․방적사(紡績絲) 등이 이입되었고, 경성에서는 “옥양목(金巾)․목면(木綿)․염료(染料)․성냥(燐寸)”
이 이입되었다. 이러한 물품들은 육로로 말바리(駄馬)를 이용해 안성까지 운반되었고, 돌아갈 때 안성에서는 미곡을 싣고, 용인에서는 “신탄(薪 炭)”을 싣고 돌아가곤 했다. 이렇게 이입된 외국 물품은 다시 안성 인근 사방(四方) 10리(里)로 분배되어, 동으로 충주(忠州), 남으로 청주(淸州), 서 로는 평택, 북으로는 양지(陽智)까지 이동되었다(外務省通商局 1902: 126).
이는 철도가 놓인 후 원거리 물산이 평택으로 와서 안성으로 유입되어 인 근지역으로 이출되는 것과는 정반대 현상으로 종래의 조선물자 유통구조 를 유지하며 원거리 물산이 안성으로 들어와서 인근 지역인 평택까지 배 분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시까지 안성은 전국적인 물산집산지의 모습을 잃지 않았으며, 개항 이후 해외 수입품의 일차 유통경로가 되어 안성으로 유입된 외국산품은 인근 경기남부 및 충청도로 재분배되었던 것이다. 그 러나 일본 도자기의 유입상황은 제시되지 않는다. 따라서 당시까지는 아 직 일본산 도자기가 안성으로 이입되지 않았거나 이입되었더라도 주목할 만한 정도가 아니어서 안성유기의 생산․판매에 영향을 미치는 정도는 되
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경부철도가 부설되고 평택역이 생긴 이후인 1909년 자료「평택지방경제 상황(平澤地方經濟狀況)」에 따르면 인천에서 수입되어 철도를 통해 평택 역으로 운송되었던 수입품은 “옥양목(金巾), 방적사(紡績絲), 석유(石油), 성냥(燐寸), 권련초(卷煙草), 명태어(明太魚), 장곽(長藿)”118) 등이 있다. 이 들은 대부분 안성․둔포를 통해 인근지역으로 배분되어 소비되었고, 그 수 량은 아래 표와 같다(度支部, 1909: 58~60). 그러나 역시 일본산 도자기는 보이 지 않는다.
품 목 (단위)
옥양목 (疋)
방적사 (塊)
석유 (鑵)
성냥 (箱)
권련초 (箱)
명태어 (駄)
장곽 (把) 이입수량 12,000 15,000 6,000 550 300 400 110,000
[표 3-4] 1909년 평택역 경유 외국산 수입물품 현황
일본산 도자기는 1910년경부터 평택역의 수입물품으로 등장한다. 표3-3 에 의하면 일본산 도자기는 1910년 시모노세키(下關)에서 평택역을 통해 40톤이 반입되어 안성․죽산․진천 등지에서 소비되었다. 일제 식민지 시대 가 시작되고 일본산 물품은 해로를 이용해 인천 등 개항장으로 운반된 후 철도를 통해 전국으로 분배되었고, 철도역을 중간 집산지로 하여 인근지 역으로 육로를 통해 운반되는 상품유통체제가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 아 울러 1912년경부터 철도 중심의 교통체계를 확립하기 위한 화물운송 요금 인하 정책으로 철도를 이용해 저렴하게 대량의 화물을 운송하는 체계도 확립되어 가고 있었다(정재정 1999: 401~420). 이 시기부터 일제는 식민지 종주국이라는 이점(利點)과 자국 물품을 철도를 이용해 저렴하게 대량 공 급할 수 있다는 이점까지 갖추고 전격적으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기 시작 했다. 이에 따라 일본산 도자기는 이전에 한국 시장에서 갖고 있었던 불 리한 점들 중 가격 면에 있어서는 이제 고가(高價)인 유기가 당하지 못할 정도의 장점을 갖추게 되었다.
118) 미역의 일종
1910년 안성의 특산물은 유기(鍮器)를 비롯하여 담뱃대(煙管), 가죽신(靴), 갓(帽子), 조선지(紙)가 있었고, 그 생산액은 유기가 14,000원, 담뱃대가 7,000원, 가죽신이 2,000원, 갓이 2,000원, 조선지가 1,500원이었다(朝鮮總督 府鐵道局 1912: 86~87). 그러나 유기를 비롯하여 이러한 토속 수공업품은 점차 외국 물품에 압도되어 가기 시작했다.
품 목 유기(鍮器) 담뱃대(煙管) 가죽신(靴) 갓(帽子) 종이(紙) 생산액(圓) 14,000 7,000 2,000 2,000 1,500 [표 3-5] 1910년 연간 안성특산물 생산현황(출처: 朝鮮總督府鐵道局 1912)
경기도에서 대정4년(1915년) 발간한 『경기도안내(京畿道案內)』에 의하 면 안성은 아직까지 경기도 굴지의 상업지라는 지위를 잃지는 않았다. 아 울러 고래로 유명했던 유기산지로 제시되며 당시에도 유기제작이 성행하 여 “진유(眞鍮) 식기 및 담뱃대․재떨이(灰皿)․요강(便器)” 등을 생산하였 으며 경상도 지방으로 주로 이출하였다. 그러나 유기식기를 비롯하여 담 뱃대․재떨이․요강 등을 모두 합한 생산액은 연간 10,000원 정도로 [표 3-5]
에서 제시된 1910년도 유기와 연관을 합한 생산액 21,000원의 반 정도 밖 에 되지 않는다. 이 자료의 조사시점을 책이 발간된 1915년에서 조금 앞 선 1913년 ~ 1914년경으로 볼 때 불과 3~4년 전과 비교하여 현저히 낮아 진 것이다(京畿道, 1915: 254).
이러한 정황은 1920년대 들어서면 완전히 고착화된다. 1924년 『동아일 보』 기사에는 외래물품의 수입으로 점점 설자리를 잃어가는 유기업을 비 롯한 토착산업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사화 하고 있다.
悲慘한 숫자(數字)
安城은 從來로 商業地인 同時에 工業地이엇다. “安城市場에는 京城보다 두 가지 商品이 더난다”는 俗談은 安城市場이 朝鮮의 首府인 京城보다 多數한 商品이 賣買된다는 意味이오 “安城맛침”이라는 말은 安城鍮器를 비롯하야 여러 가지 工産品이 安城서 만히나는 同時에 가장 튼튼하게 만든다는 뜻이 다. 이처럼 이름이 國內에 놉하젓든 安城의 오늘날 商工業現狀은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