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년 일본 “재경성영사관 在京城領事館”이 작성한「경기도급충청도지 방상황병이농황시찰보고 京畿道及忠淸道地方商況幷二農況視察報告」(外務省通商 局 明治26년(1893): 3~15)에는 경기 및 충청지방의 상업권을 제1권역 한강상 류 지역, 제2권역을 금강 지역, 제3권역을 충남서해안 지역, 제4권역을 경 기내륙지역으로 분류하였다.
권 역 권 역 별 주 요 지 역 제1권역 한강상류 지역 이천, 여주, 장호원, 목계, 내창, 대소원
제2권역 금강 지역 논산, 강경, 황산
제3권역 충남서해안 지역 예산, 신창, 아산, 평택, 남쪽의 덕산, 흥주, 결성 제4권역 경기내륙 지역 안성, 수원 등 경기남부 내륙지방
[표 3-1] 개항기 경기․충청지방의 상업 권역
이 보고는 제4권역인 안성‧수원을 중심으로 한 경기내륙지역을 제외하고 권역을 모두 강운(江運)과 해운(海運) 교통을 기반으로 분류하고 있어 당 시 일본이 조선의 상품유통구조를 수운(水運) 중심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게 한다(外務省通商局 明治26년(1893): 3~15; 朝鮮總督府鐵道局 昭和12년(1937) 제1권:
596~597). 아울러 동 보고는 발달되었던 안성은 점차 쇠퇴할 것으로 분석했 다(外務省通商局 明治26년(1893): 15~16; 허영란 1997 : 2~3). 이러한 일본의 분석은 향후 경부철도 노선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게 한다.
1898년 일본은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경부철도계약(京釜鐵道契 約)」(국사편찬위원회 1986)을 체결하고 철도건설을 추진하였다. “철도의 노선은 그것의 독점성과 고정성 때문에 부설 주체의 의도에 따라 철도연 선의 사회․경제구조뿐만 아니라 정치적 지배력을 크게 재편성하게 된 다.”(정재정 1999: 50~51) 일본은 “전 조선에서 인구가 조밀하고 물자가 풍부한 삼남지방(전라, 경상, 충청)을 철도가 종으로 관통하게 하여 교통 운수의 편리를 개시하고, 조선의 문명계발(文明啓發)과 물산증식(物産增
殖), 양 민족의 복지를 증진시킨다”(朝鮮總督府鐵道局 昭和4/1929: 35~37)는 일 방적인 목적을 설정하고 이에 부합하게 노선을 선정하고자 대규모 현장답 사를 5회 진행하였다.
1차 답사는 1892년 일본의 군․관․민이 참가하여 실시하였고, 2차 답사는 청일전쟁기간이었던 1894년 이루어졌다.(外務省 1990: 625~660; 朝鮮總督府鐵 道局 昭和4/1929: 93~95) 1차와 2차 답사에 의해 결정된 노선은 한양에서 부 산에 이르는 영남대로(동래대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용인과 죽 산 사이에 직곡(直谷), 김령역(金岺驛), 양지(陽智), 백암장(白岩場)을 거치 게 되어 있어 이들 철로 연선에서 안성으로 바로 연결되는 직로가 여럿 있고, 이 철로연선은 김령장, 주천장, 백암장 등 기존에 형성되어 있던 장 들을 통과하게 된다. 이에 따라 조선에서 손꼽히던 물산집산지 안성장은 기존 가도(街道)와 장시망을 통해 철도와 연결되어 예전의 명성을 이어갈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죽산 등 주변장과의 위상변화나 예전과 같은 전 국적 물산집산은 어려울 수 있었겠지만 일제 강점기 이후 진행된 것처럼 이전 성시의 모습을 완전히 잃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1899년 3월 경부철도주식회사의 주도하에 실시된 3차 답사에서는 철도 노선이 서울~노량진~영등포~수원~진위~둔포~전의~공주~논산~은진 ~ 진산~금산~영동~금산~대구~현풍~창녕~영산~밀양~삼랑진~구포~부산진 구간 으로 결정되었다(朝鮮總督府鐵道局 昭和4/1929: 101~104). 이는 서울에서 은진 까지의 구간은 기존에 한양에서 전라도 쪽으로 가는 길인 해남로를 택하 고, 이후 구간은 경상도 쪽으로 갈라져 나와 부산까지 연결하는 노선이 다. 이 노선은 두 가지 목적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하나는 토지가 비옥하 고 인구가 조밀한 충청․전라도 지역을 통과하여 철도수익을 높이고자 함 이다(朝鮮總督府鐵道局 昭和4/1929: 101~104). 다른 하나는 조선 정부가 1898년 부터 추진하고 있던 경성~목포 간 관영철도 건설을 막고, 열강의 조선 내 철도부설권 획득을 저지할 수 있는 근거로 삼기 위해 전라도를 아우를 수 있는 노선선정을 통해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정재정 1999: 54 ~ 58).
이에 따라 기존 동래대로 상에 놓여 있던 서울~충청도 구간은 열차노선 에서 완전히 제외되었다. 아울러 진위 갈원역에서 양성 가천역과 소사역
을 거쳐 성환, 천안으로 이어지던 이전 전라도로 가는 해남로 상의 직로 (直路)와는 달리 경부철도 노선은 서쪽 바닷가로 더 치우쳐 진위에서 평 택, 성환을 거쳐 천안으로 연결되었다(外務省通商局 明治26년/1893년: 15~16).
이는 일본이 당시 조선의 교통체계를 철도를 중심으로 확립하고 이를 개 항장 등 해운(海運)과 연결하여 일본과 물자를 수입‧수출하며, 조선 내부 에서는 강운(江運)으로 육로 교통인 철도와 상보적 관계를 형성하게 하고 자하는 의도가 반영된 것이다(朝鮮總督府鐵道局 昭和12/1937: 596~597).
충남서해안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중요한 상업지는 둔포로 평택에서 생산 되는 곡물의 반 이상을 취급할 뿐 만 아니라 남양만(현 경기도 화성지역) 에서 산출되는 식염(食鹽)‧어류(魚類)‧해조류(海藻類)를 안성․죽산 등 내륙 경기도 지역 및 아산․평택 등 인근지역과 직산․천안․진천․청주에 이르는 충 청도 내륙지역까지 공급하는 물산유통의 요지였다(外務省通商局 1893:
12~14). 그러나 평택은 자체 산물도 없고, 소비지도 아니었기에 그 자체로 굴지의 상업지가 아니었다(度支部 1909: 56~63). 다만 아산만 일대의 노포(老 浦)나 신성포(新成浦)의 산물인 어물‧소금‧미역 등을 안성시로를 통해 안성 장으로 전하고(1872년 『평택현지도』; 『대동여지도』), 지리적으로 안성과 둔포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둔포 등 서해안 주요 상업지와 안성장을 연결 해 주는 중계지의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度支部 1909: 58). 이렇게 충 청도 굴지의 포구인 둔포와 안성 등 내륙지역 상권을 이어주는 평택이 철 도노선에 선정된 것이다.
이후 1900년 4차 답사, 1903년 5차 답사가 이루어졌지만 3차 답사에서 취해진 진위~평택~성환~천안으로 연결되는 노선에는 변함이 없이 오늘날 경부철도 노선이 결정되었다(朝鮮總督府鐵道局 編, 昭和4/1929). 이러한 노 선 설정은 교통로와 장시망을 통해 운영되었던 조선경제와 이를 기반으로 생활하던 조선인의 삶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전형적인 제국주의적 침탈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그 결과 진위~양성~안성으로 이어지던 옛 물산유통 로는 제 기능을 할 수 없게 되었고, 안성은 새로운 교통로 상에서 완전히 고립되어 전국적인 물산집산지로서의 역할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경부철도가 개통되고 몇 년 후였던 1909년까지도 평택의 중요성
은 아직 구 교통로 및 경제체계와 상당히 상보적인 관계에 있었다. 반면 에 안성장은 1909년 구래의 발달된 교통로를 통해 여전히 인근지역 굴지 의 시장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당시 안성 일대의 산물은 1차로 안성시장 에 집산되어 다시 성환․평택․오산으로 이출되었다. 오산과 성환 역시 경부 선 철도역이 존재하는 지역으로 안성장에 집산된 물화는 평택 뿐 아니라 오산역이나 성환역을 통해서도 이출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까지 평 택역은 주변 굴지의 시장이었던 안성장에 집산되는 물화와 둔포장에서 거 래되는 물화를 얼마나 당지를 경유하도록 하는가 하는 점에서 주변 철도 역과 경쟁적인 관계에 있었다(度支部 1909: 56~59).
일제의 식민지가 된 1910년 안성장에는 안성․죽산․진천 및 인근지역에 서 생산되는 곡류가 집산되어 벼가 13,500섬, 대두 5,000섬, 잡곡 1,200섬 에 달했다. 이 곡류는 우마를 이용하여 평택역으로 운송한 후 평택역을 통하여 경성ㆍ인천ㆍ일본 등으로 반출되었다(朝鮮總督府鐵道局 1912: 86~87).
반 출 지 품 목 수 량(단위 톤)
경 성
쌀(米) 7,599
벼(籾) 230
대두(大豆) 29
인 천
쌀(米) 1,239
벼(籾) 121
대두(大豆) 578
內地(일본) 쌀(米) 73
대두(大豆) 26
[표 3-2] 평택역 경유 안성지역 집산 미곡 반출 현황
또 외지의 산물 역시 경성, 부산, 인천, 초량(草梁) 뿐만 아니라 일본의 오사카, 나카쓰(中津), 구루메(久留米), 시모노세키(下關) 등에서 평택역을 통해 반입되어 안성을 거쳐 죽산․진천 등지에서 소비되었다(朝鮮總督府鐵道 局 1912: 86~87).
반 입 지 품 목 수 량(단위 톤)
경 성 연초(煙草) 32
부산․인천 염간어(鹽干魚) 200
인 천
새끼줄(繩)․가마니(叺) 101
석유 123
성냥(燐寸) 28
마포(麻布) 10
초 량 해초(海草) 43
선어(鮮魚) 55
오사카‧나카쓰 옥양목(金巾) 105
구 루 메 면사(綿絲) 18
시모노세키 도기(陶器) 40
[표 3-3] 평택역 경유 안성지역 원거리 무역품 이입 현황
이 기록에 따르면 1910년경 원거리에서 안성장으로 집산되는 물산의 이 출이나 원거리 물산의 이입은 모두 평택역을 통하여 이루어지고 있다. 이 렇게 평택역은 점차 경기남부지역 및 충남서해안 일대 물산유통의 중심지 가 되어 가고 있었다.
철도를 중심으로 물산유통구조를 개편하고 그 역 주변으로 일본인들을 정착시켜 이들을 중심으로 식민지 경제를 재편하고자 했던 일본 제국주의 의 구도 하에 평택역이 생겼다. 이러한 시대적 흐름 속에 과거 교통의 편 의에 크게 의존하여 형성되었던 안성장을 중심으로 한 안성경제의 쇠퇴는 필연적인 귀결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안성장은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서서히 백암․죽산․장호원․진천․광혜원․입장 등 소규모 지역 상권의 중심지로 규모가 대폭 축소되어 갔으며, 그 지위의 유지마저도 쉽지 않았다. 아울 러 안성시로(安城市路)의 시발점에 형성되었던 소사장(素沙場)은 1911년경 폐지되었고, 1913년경 평택역 서쪽으로 새롭게 평택장이 등장했다(허영란 1997: 173~174).
1950년 5월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개월여 전 안성의 전반적인 실태를 기 록한 『안성대관 安城大觀』에는 경부철도부설 이전의 번화했던 안성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