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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맞춤유기 상품가치 지속을 위한 전략

1) 민족‧전통담론 활용과 판매 전략의 근대화

일본산 도자기에 압도되어 유기시장이 침체됨에 따라 1920년대 중반 안 성에는 연죽점(煙竹店) 등을 제외한 유기점이 4~5 곳 밖에 남지 않게 되 었다(『동아일보』 1926.07.02. 기사). 이러한 정황은 유기 점주들에게 존립 과 관련하여 충분히 위기감을 주는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위기감이 고조

121) 1965년 윤철주(尹喆周, 76세), 김태영(71세) 제보(金泳鎬 1965: 162~163 참조)

되고, 조선 사람의 살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자주적 실천의 중요성이 부각 되기 시작했던 1920년대 초반부터 안성의 유기 점주들은 “상공업전술의 시대화”(『동아일보』 1940.06.25 기사)를 통해 자구책 마련에 부심하게 된다. 이러한 노력은 민족․전통 담론의 활용과 상품 생산․판매 전략의 근 대화라는 두 가지 축을 가지고 진행되었다.

유기 점주들은 우선 각종 광고를 통해 자기 PR에 나서는 한편 자신의 상품을 품평회에 출품하고 그 결과를 적극적으로 홍보했으며, 아울러 해 외수출에도 눈을 돌리는 등 다양한 상품 판매 전략을 구사하였다. 당시 안성에서 이러한 노력을 기울였던 유기점으로는 안성시장 미점통(米店通) 에 있었던 ‘영창유기상점(永昌鍮器商店)’, 안성읍 시장통(市場通)에 있었 던 ‘안신유기상점(安信鍮器商店)’, 안성읍내 동리(東里)에 있었던 ‘안성 유기제조공장(安城鍮器製造工場)’ 등이 있다.

윤상은(尹相殷)이 운영하던 영창유기상점은 1924년 경 경기도연합품평회 에 상품을 출품하여 우등상을 받았으며, 이를 계기로 광고지를 만들어 돌 렸다. 광고문에는 이러한 사실을 적극 활용하여 “永昌鍮器은 他店보담 優等임”, “京畿道聯合品評會에 優等賞狀을 受領함은 唯一” 등의 문구 를 통해 영창유기의 우수성을 최대한 드러내고자 했으며, “유기계의 패 왕 鍮器界의 覇王”으로 자임하였다. 영창유기상점의 유기는 그 진정성을 드러내고자 “진품(眞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며 “忠臣은 孝子門에서 生하고 鍮器의 眞品은 永昌鍮器工場에서 選出됨”, “정진공평(正眞公 平)”, “품질보험(品質保險)” 등의 어구를 통해 이를 역설하였다. 아울러 천안시장과 죽산시장에 지점을 운영하여 판매시장의 다양화와 수요자 중 심의 영업 전략을 택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 규모가 스스로 유기계의 패 왕으로 칭하듯 안성에서 가장 컸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렇게 안성유기점 들은 광고를 통해 새로운 판매전략을 구사하기 시작했다.

[그림 3-4] 1924년 영창유기상점 광고지

(안성맞춤박물관 소장; 국립민속박물관 2015: 174)

1925년 영창유기상점을 비롯하여 앞에 언급된 안성의 3곳 유기점들은 안 성군지격이었던 『안성기략』에 자신들이 운영하던 유기점 광고를 냈다.

지면이 한정적이었던 관계로 보이는데, 이들 광고문에는 간략하게 상호와 점주․주소를 제시하여 자신들 유기점의 존재를 알리고, 간단한 문구로 영 업방침 등을 홍보하였다. 이들 중 변문옥(卞文玉)이 운영하던 안신유기상 점은 가장 많은 광고 문구를 넣어 자신의 유기점을 홍보하였다. 이때부터

‘안성유기’ 장인들은 전통담론을 자신의 상품에 대한 홍보에 적극 활용 하기 시작했다. 안신유기상점은 우선 “고래유명 안성유기 古來有名 安城 鍮器”라는 문구를 통해 지금까지 안성유기가 쌓아왔던 명성에 부쳐 자신 의 상품에 시간의 연속성에 기댄 전통성과 기술의 뛰어남을 부여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안성특산 安城特産”임을 강조하여 최근 유 명 상품의 상점들에서 많이 사용하는 “원조”라는 문구와 같이 안성유기 중에서도 특산임을 부각시켜 다시 한 번 자신의 상품의 우수성을 강조하

[그림 3-5]

『안성기략』

안신유기상점 광고문 (출처: 김태영 1925)

였다. 아울러 상호도 안성의 “안 安”과 “신 信”을 결합함과 동시에 상표도 “信”을 넣어 만들어 장구하게 이어져온 품질 좋은 안성유기와 그 생산자의 후예임과 신용을 부각시켰다. 아울러 “品質美麗와 薄利多賣 는 本店의 特色”이라 하여 직접적으로 품질의 우수성과 그럼에도 불구하 고 저렴한 가격까지 갖춘 상점임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광고전략은 당시 유행하고 있던 일제 사기에 견주어 그 단점이었던 조야한 모양새에 비해

“미려 美麗”라는 문구를 통해 유기의 장점을 부각시키고, “박리다매 薄利多賣‘라는 문구를 통해 그 장점이었던 가격면에 대한 유기의 보완점 을 보여주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金台榮 1925: 광고문).

그리고 이들 유기점들을 시작으로 안성유기점들은 이시기부터 자신의 유 기점을 대표하는 상표를 사용하여 다른 유기점과 차별화 전략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영창유기상점은 “永”을 중심으로 한 상표를 생산품의 뒷면에 명문으로 새겼고, 안신유기상점은 “信”을 명문으로 새겨 넣었다.122)

122) [그림 3-6], [그림 3-7]에 제시된 유기는 안성맞춤박물관 소장품이다.

[그림 3-6] 영창유기점 상표 “永” [그림 3-7] 안신유기점 상표 “信”

명칭123) 형 태 크 기(㎝) 특 징

주발1

주발

18*13.1*41.5 뚜껑 2.8*13.7

연엽식기,

바닥에 “永”상표 새김

주발2

주발

7.1*11.6*36 뚜껑 2.8*12

연엽식기,

바닥에 “永”상표 새김

합 5.3*10.8*37

뚜껑 2*11.4

크기가 크지 않고 굽 이 없는 형태, 바닥 에 “永”상표 새김 [표 3-10] “永” 상호가 새겨진 안성 K문중 사용 영창유기점 유기상품

대접

지름: 15.9 둘레: 50.3 높이: 5.4

실굽 대접, 바닥에 “永”상표 새김

또 이들 유기 점주들의 PR활동은 직접적인 광고와 상표를 통해 자신의 상품에 “역사적 생”을 부여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들은 각종 사 회활동을 통해 “양풍미속(良風美俗)의 조장”(『동아일보』 1940.06.25 기 사)에 앞장섬으로써 그 유기점의 이미지메이킹(Image making)을 통한 간 접 홍보 전략도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안성유기제조공장의 도정규는 안성청년회 활동을 하며 당시 청년회에서 운영하던 야학124)인 안청학원 (安靑學院)의 교사(校舍) 마련 등 후원활동에도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였다 (『동아일보』 1926.07. 30; 1927.11.10. 기사). 이것이 유기점의 PR활동과 연관된 전략적 행위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으나 정황상 결과는 그러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외래품에 압도된 토착수공업품인 유기의 상품가치 지속을 위한 점주들의 시도는 경남철도 안성선이 부설되고, 시구개정 등 안성시장의 상권을 지 키기 위한 자주적 노력이 한창 진행 중이던 1920년대 말경에는 보다 경쟁 력이 있는 “상공(商工)기관의 창설”(『동아일보』 1940.06.25 기사)을 위 해서 노력하기에 이르렀다. 1920년대 말로 접어들면서 안성유기점의 상황 은 1920년대 중반 보다 더욱 더 악화되어 “불과 수년전만 하여도 느진가 을 밤에 늦도록 그릇을 깍고 다지는 소리가 處處에서 들리엇섯스나 요새

123) [표 3-10]에 제시된 유기는 안성맞춤박물관 소장품이다.

124) 이 야학은 당시 가난하여 공부를 할 수 없는 여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되었다.

와서는 그나마 간곳 업고 몃군데 工場에 일군의 합품소래뿐이잇슬뿐”

(『동아일보』 1930.12.02. 기사)인 상황이 되었다. 이에 영창유기상점 점주 윤상은은 “세상이 한번 뒤바뀐 뒤로” 급격히 쇠퇴하고 있는 안성유기에 대해 “안성유긔의 쇠퇴는 안성의 쇠퇴를 의미하는 것인즉 이대로 버려둘 수 업다”는 인식하에 소규모 수공업에서 대규모 공장제 공업으로 전환하 기 위한 주식회사 설립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게 된다(『동아일보』

1931.02.11 기사).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의 설립을 위해 노력하던 영창유기상점 윤상은과 박주병(朴周秉)․김상덕(金相德)․박성재(朴性載)․이익훈(李益薰)․윤철주(尹喆周)․

박용문(朴容紋)․서상준(徐相準)․박필병(朴弼秉)․김태영(金台榮)․임준재(任俊宰)․

임의상(林宜相)․정재창(鄭在昌) 등 안성 유지들은 1928년 5월 10일 제1회 발기인대회를 개최하여 정관(定欵)․설계서 등을 작성하고 창립위원장에 박 주병을 선출하였으며, 영창유기상점에 창립사무소를 두고 회사 창립을 위 한 준비 작업에 착수하였다(『동아일보』 1928.05.14 기사). 그리고 같은 해 7월 3일 창립총회를 거쳐 자본금 5만원에 “사장 박주병, 전무 김상덕, 상무 윤상은, 취체역(取締役: 중역)에 윤철주․박성재․양재철(梁在轍)․홍병렬 (洪炳烈), 감사역(監査役)에 김태영․최병구(崔秉九), 지배인(支配人) 윤철주, 상담역(相談役: 고문) 정재창” 등 임원을 선출하고 회사를 창립했다(『동 아일보』 1928.07.05 기사). 같은 해 9월 11일에는 임원회의를 개최하여

“부대사업, 특약점(特約店) 설치, 외무원채용” 등에 관한 일을 결의하였 고, 공장 설치를 완료(『동아일보』 1928.09.18 기사)하여 ‘붓배기’ 7틀 을 놓고, 직원 30여명(金泳鎬 1965: 163)으로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하였다.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는 유기회사운영 및 기술경험이 풍부한 안성유기계 의 선두주자 영창유기상점의 윤상은과 그 동안 안성경제를 지키기 위해 솔선수범 해 오던 김태영 등 안성 유지들이 대거 참여하여 안성유기의 회 생을 위해 설립되었다. 아울러 당시 활발히 활동했던 안성유기제조공장 도정규 등 안성의 많은 유기점주들과 유기장․시장(匙匠)들도 이에 동참하 여(『동아일보』1931.06.04.; 1934.08.09. 기사) 그동안 안성유기점들에서 실 행되어 오던 자생노력을 더욱 발전시켰다. 그리고 이전에 진행되어 오던

안성유기의 전통에 기댄 진정성 추구는 “조선물산장려운동”의 구호와 연계되어 ‘전통담론’과 함께 ‘민족담론’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한층 발전되었다. 아울러 상품의 모양 및 종류, 생산 및 판매방식, 광고를 이용 한 홍보전략 등 제작․판매에 있어서도 한층 근대화된 방향으로 나아가 시 대적 요구에 맞추고자 노력하였다.

1928년 9월부터 11월까지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에서는 『동아일보』에 여러 차례 광고를 게재했는데, 그 문안에는 이러한 사업방향이 잘 나타나 있다. 광고의 표제는 “朝鮮物産獎勵키 爲하야 安城맛침鍮器를 쓰시오”

(『동아일보』 1928.09.21.; 11.08. 광고문 등)라 하여 식민지근대화로 인해 초토화 된 ‘조선물산장려’라는 대의와 이를 통한 민족 및 지역산업의 부흥에 기댄 ‘민족담론’을 유기 판매를 위해 적극 활용하고 있다. 아울 러 표제 뒤 광고문의 첫머리에는 ‘안성맛침’의 유래를 설명하며 안성맞 춤을 안성유기에 대한 전통담론에 활용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신의 상 품인 안성유기의 명성과 품질의 우수성을 ‘민족’담론과 ‘전통’담론에 기대어 보여주고자 했으며, “四海에 振動하든 안성유기”(『동아일보』

1928.09.21.; 11.08. 광고문 등)의 명성을 자신들의 상품이 잇고 있음을 보 여주고자 했다.

다음으로 유기가 외래품의 유행으로 외면 받게 된 원인에 대한 대안적 방향을 보여주고자 제품 생산에 있어 “일대개혁(一大改革)”을 했음을 명시하여 “模樣은 美術的으로 精美하고, 品質은 實用的으로 堅固하게 製 造하야 特別廉價로 都賣散賣”(『동아일보』 1928.09.28; 10.12. 광고문 등) 하고 있음을 강조하여 근대화된 상품으로 안성맞춤유기가 재탄생했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그리고 안성맞춤의 명성에 걸맞게 엄선된 재료와 숙련 된 기술로 제조하여 주문자들의 기호에 맞추고 있어 재주문이 이어짐을 명시, 당 회사의 신용 과시를 통해 구매자들에게 접근하였다. 또 판매 상 품에는 “가정용 신구식 각종유기(家庭用 新舊式 各種鍮器)”와 함께

“진유 각종 기념품(眞鍮 各種 紀念品)”(『동아일보』 1928.10.18; 10.26.;

11.15. 광고문 등)을 취급하고 있음도 제시하여 상품의 종류에 있어서도 소비수요에 맞춘 근대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주어 실질적인 구매를 이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