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 80대 제보).
한편 이성순가는 27대에 걸쳐 안성에 살며 대대로 유기업을 경영했으며, 이성순(李聲淳, 1904년경 생)은 해방 후 낙원동에서 삼화유기제작소(三和 鍮器製作所)를 운영하였고(『경향신문』 1963.07.13. 기사), 안성시장에 유 기상회를 가지고 직접 소매까지 했다(유기장 J씨 제보). 이성순은 주물대 장으로 삼화유기는 가질대장이었던 아들에게까지 전해졌다가 아들 대에서 유기업을 그만두게 되었다.131)
도정규가는 19세기 중엽 약간의 농사를 겸하며 수십 명의 유기장들을 고 용하여 대규모로 유기업을 경영하였다(金泳鎬 1965: 157~160). 1880년대부 터는 도정규가 가업을 이어 안성읍 동리(東里)에서 “안성유기제조공장”
을 하며, 유기제조와 도소매 판매를 겸하였다(김태영 1925: 광고문). 도정 규는 점주이자 장인으로 주물대장이었으며(유기장 J씨 제보), 후대에 유기 업을 계승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도정규 대에서 유 기업을 종료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누대에 걸쳐 유기장을 하였던 집안 중 김기준가(金基俊家)는 본래 경상 도 출신으로 윗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김기준은 1920년대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安城鍮器製造株式會社)에서 주물대장으로 일했고(안 성군 1992: 23~24), 해방 이후 안성시내 봉남동에 정광사유기제작소(正光社 鍮器製作所)를 설립하여 유기업을 이어갔다. 이후 아들 김태화가 아버지 의 기술을 전수 받아 주물대장으로 유기업을 이었다가 1950년대 말 경 유 기업을 그만두고 술 등 잡화 소매상을 하였다(유기장 P씨 제보). 따라서 김기준가도 아들 대에서 유기업을 그만두게 된다.
이외 본래 경상도 출신인 주물대장이었던 P씨(남, 81세)의 아버지도 주물 대장으로 봉남동에서 유기제작소를 운영했다. 선대에 경상도에서 유기장 을 했었는지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안성에서는 P씨를 비롯하 여 아들 2명이 유기장의 길에 입문했다는데, 활동을 길게 한 것은 P씨로 관계자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다(유기업 종사자 O씨 제보).
131) 삼화유기는 현재 80대 유기장들의 기억에는 이관익에 의해 운영되었던 것으로 기억된 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이관익은 이성순의 이명(異名)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이 시기 몇 대에 걸쳐 유기업에 종사한 집안 외에 당대에 입문한 유기장 이 운영했던 유기점들도 있었다. 김영배는 충북 괴산이 고향으로 아버지 대였던 일제강점기에 안성으로 왔다. 그는 윤기병의 유기공장 등에서 부 질대장으로 일하다 해방 후 금성유기제작소(金成鍮器製作所)를 설립하였 다. 김영배는 1960년대 초까지 금성유기제작소를 경영하였으며, 집안에서 유기장의 길은 조카인 Jt씨로 이어졌으나 Jt씨도 유기업의 쇠퇴로 전업하 게 되어 결과적으로 당대에서 유기장의 길을 접게 되었다. 이 외 유기점 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세하지 않으며, 금산동 형제유기제작소 등 장인이 아닌 경영주로서 유기점을 운영한 경우도 있었다(시장 쌍둥이형제 제보).
당시 안성의 유기점들에서는 모두 식민지 시기 특화된 주물제작법으로 유기를 제작하였다. 각 공장의 작업장은 크게 부질간과 가질간으로 나뉘 었는데 부질간은 원료를 배합하여 쇳물을 녹이고 이를 틀에 부어 기물을 성형하는 작업장이고, 가질간은 성형된 그릇을 깎아 고르고 윤이 나도록 하는 것이다. 보통 부질간은 1칸에 대장1명 조수1명 풀무질 1명해서 3명 이 한조로 일했고, 가질간은 1칸에 1명씩 일했으며 거친 가질과 정밀한 가질로 나누어 한 공장에 2칸 정도 갖추고 있었다. 그 외 정리 작업 등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각 유기점 별로 약간의 차등이 있어 유기 제작 1조는 보통 5명 남짓한 인원으로 구성되었다.
해방 후 안성에서는 윤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가 가장 큰 규모의 유기점 이었다. 당시 안성유기제작소는 부질간 5칸, 가질간 7칸에 총 인원이 30 여명 정도 되었다(유기장 J씨‧D씨 제보). 김영배의 금성유기는 부질간이 2 칸에 6명, “시아개”라 해서 처음 주물로 나온 기물을 다듬는 장인이 2 명, 거친 가질 2칸에 2명, 고운 가질 2칸에 2명해서 총 인원 12명 정도가 일을 했다(목물장수 Jt씨 제보). 그리고 이백세의 백성유기는 부질간이 3 칸, 가질간이 3칸으로 인원은 15명 내외 되었을 것이고, 삼화유기는 부질 칸 4칸을 운영하여 총 인원이 20여명 되었다(유기장 D씨 제보). 따라서 1940년대 후반 안성에서는 각 유기점이 10 ~ 30여명의 인원으로 운영되어 30여개의 유기점이 있었으니 최소한 300여명 이상의 유기 장인들이 활동 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상호 및 상품의
종류
상품
명 형 태 크 기
(㎝) 특 징132)
○정광사 주발, 대접 등 식기
대접 1 3 .2* 4 1*4.5
바닥에 실굽이 있는 대접,
“안성맛침 正”이라는 상표를 새김.
○광안사 주발, 대접 등 식기
대접1 15.2*
47.5*7
실굽이 있고, 뒷면 중앙에 원형으로 “안성맞침 光”자가 양각되어 있으나 ‘안’자와
‘맞’자는 마모가 심함.
대접2 15.2*
47.5*7
대접1과 유사하나 대접 안쪽 광이 살아 있으며, 후면 상표 에 ‘침’자의 마모가 심한 것 [표 4-3] 해방 후 안성유기점 상품(안성 K문중 사용 유기를 중심으로)
당시 대부분의 안성 유기점들은 해방 후 수요가 많았던 주발·대접 등 그릇을 주요생산품으로 했다. 김영배의 조카로 장기간 금성유기에서 일했 던 목물장수 Jt씨는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릇 주발·대접을 주로 생산했다. 제기는 많이 안했다. 제기는 만들기도 까 다롭고, 주발·대접 만드는 것만도 바쁘기 때문에 특별히 주문이 들어오면 제 작했다.”
이러한 경향은 가정에서 소규모로 운영하는 공장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장인 1인이 부질대장이면 부질만하고, 가질대장이면 가질만하여 상호협업으로 기물을 생산했으며, 그 생산품은 거의 주발·대접이었다.(당 시 유기장들 제보) 그리고 이 시기 유기점 중에는 주발․대접에 문구를 새겨 기념품이나 답례품으로 판매하는 곳도 있었다.
이 차이점.
○백성유 기제작소 주발, 대접 등 식기, 기념품
기념 품 주발
11.5*
6.5
백일기념주발.
뚜껑 중앙에 ‘축 祝’이라 새 기고, 주변으로 ‘백일기념 수 복 百日紀念 壽福’이라 새겨 백일 맞은 아이의 수명과 복을 기원. 일반 주발에 비해 유아 용으로 크기가 작은 것이 특 징. 바닥에는 “안성맞침 白城 鍮器 白”이라 상표가 새겨져 있음(안성맞춤박물관 2011: 15).
○삼화유 기제작소 주발, 대접 등 식기, 기념품
주발1 실굽이 있으며, 바닥에 “和
안성”(주발1) “안參”(주발 2)이라는 상표를 통해 삼화유 기 제작품임을 짐작할 수 있 주발2 음.
기념 품 주발
11.2*4
뚜껑 위쪽에 “돌맞이”라 새 긴 선물용으로 만들어진 주 발. 바닥에 “안參”이라 상표 가 새겨져 있음(안성맞춤박물관 2011: 15).
그 외 유기점 합
합:
5.3*
10.8*
38 뚜껑:
2.3*
11.3
크기가 크지 않고 굽이 없는 형태. 바닥 중앙에 “안성맞 춤”과 상호의 약자가 합쳐진 상표가 새겨져 있지만, 마모 가 심해 알아보기 어려움.
대접 15.9*4 8*5.7
실굽에 곡선이 살아 있는 형태, 바닥에 “안성 ●●●●”이라 는 상표가 새겨져 있음.
대접 받침
18.6*
58.7*
2.6
안쪽 바닥 가장자리 쪽으로 두 개의 원이 음각되어 있음.
해방 후 일상생활유기 외의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것은 윤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였다. 안성유기제작소는 일상생활용 주발·대접을 제작함은 물론이요, 1948년경에는 “각 관공서·단체·개인의 기념품, 상품(賞品), 사례 품(謝禮品)을 특별 취급”한다는 신문광고를 게재하고 이를 주력 판매상품 으로 하였다.133) 『동아일보』 및 『경향신문』의 광고문에는 당시 안성 유기제작소의 판매 전략을 확인할 수 있는데, 우선 안성유기제작소에서 가장 많이 판매되고 있던 식기·제기(목물장수 Jt씨 제보) 등 조선시대 이래 대표적인 일상생활용 유기상품에 대한 것은 광고 문구에 취급 상품으로 넣지 않고, 주력 판매상품으로 할 각종 기념품·상품(賞品)·사례품만 취급 상품으로 게재하였다. 아울러 총판매원을 서울 동화백화점에 두고 판매시 장을 확대하고자 했으며, “Noted Product in Korea. Souvenir” 라는 문구 를 첨가하여 외국인들을 위한 한국문화상품인 기념품의 영역을 개척하고, 외국인들도 고객층으로 확보하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하였다. 『동아일 보』 1948년 4월 27일 및 4월 30일 광고문에는 이보다 한 발 더 나아가
“鍮器界의 元祖 安城鍮器製作所”, “品質絶對保證”, “絶對責任지는 保證書 添附” 등의 문구를 삽입하여 안성유기제작소 상품의 진정성과 품질을 전
132) 모두 안성맞춤박물관 소장품이다.
133) 『경향신문』 1948.01.17; 01.21; 02.19; 『동아일보』 1948.01.29; 01.31; 02.06; 02.18;
02.27; ; 03.23; 04.02 광고문 참조
[그림 4-1]『경향신문』1948.1.22. 광고문 [그림 4-2]『동아일보』1948.04.30. 광고문 통담론에 기대어 한층 더 강조하였다(『경향신문』 1948.04.27; 04.30 광고 문).
이러한 전략은 1950년경까지 지속되어 『안성대관』의 광고문에는 “紀 念品, 贈答品, 表彰品 專門”이라는 문구를 크게 쓰고 있다. 또 직접적으 로 외지판매소(外地販賣所)를 미군 PX에 두고 수출상품을 판매했으며 상 품의 후면에는 “안성맞임 尹 KOREA”라는 상표를 새겼다.134)
안성유기제작소의 이러한 전략은 안신유기상점, 영창유기상점, 안성유기 제조공장 등 일제 강점기 몇 남지 않았던 안성 유기점들의 생존을 위한 행보와 맥락을 같이 한다. 특히 전통적인 유기상품 외에 신상품 개발에 적극적으로 노력하여 기념품과 신식 생활용품을 생산·판매하고, 특약점 을 모집하여 판매처를 다양화함과 동시에 해외수출을 꾀하였던 안성유기 제조주식회사의 사업전략을 많은 부분 공유하였다. 이러한 점은 윤기병이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에서 일했던 경험의 산물일 것으로 보인다.(『동아 일보』1934.08.09. 기사) 또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 설립을 도모하였던 윤 상은의 영창유기상점 상표인 “永”을 자신의 상품에 새겼던 것(2004년 유기장 K씨 제보)으로 보아 윤기병이 윤상은의 후손이었을 가능성도 배제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윤기병은 전통담론의 활용, 근대화 된 상품생 산에 따른 유기의 상품가치 고취, 변화된 시대에 맞춘 다양한 판매 전략
134) 당해 상표가 안성유기제작소의 상표임에 대해서는 2014년 유기장 D씨의 제보에 의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