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운동 이후 일제의 침탈에 대한 의식이 고조된 안성사람들은 시장을 중심으로 한 안성경제의 쇠퇴상을 수동적으로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있 어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으로 안성장을 되살리고자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 기 시작한다(김태영 1950: 8~9). 1940년 6월 25일자 『동아일보』 기사에
는 “자고(自古)로 상업(商業)의 중심(中心) 안성(安城) 팔도물화(八道物貨) 의 집산지(集散地) 교통기관의 발달로 다시 비약 과거이십년간(過去二十年 間)의 발전현저(發展顯著)”라는 표제를 걸고 1919년 이래 20여 년간 안성 사람들이 안성경제발전을 위해 해왔던 노력에 대해 기술하였다. 표제에서 보이듯이 안성 상업이 옛 명성을 되찾기 위해서 우선적으로 해야 할 일은 교통기관의 발달이었다. 경부선 철도 개설 이후 새로운 교통체계에서 소 외되어 급속도로 쇠퇴하기 시작한 경험 속에서 안성시장 상공계는 경남철 도의 속성 개통 및 이에 발맞추어 안성장에서 인근지역에 이르는 도로확 장․개수를 위해 노력했다. 이와 더불어 시장시설을 개선하고자 시구개정 (市區改正)에도 힘을 쏟았다(『동아일보』 1940.06.25. 기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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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체계의 개편:
경남철도(朝鮮京南鐵道)
부설과 외지 연결 도로 건설1910년 조선의 공식적인 식민지화를 성취한 일제는 러일전쟁 후 실시된 일본 본토 내의 철도국유화정책에 발맞춰 경부철도와 경인철도를 국유화 하고, 아울러 기존 간선철도를 중심으로 한 지선설립과 경의선(京義線) 등 군용철도 건설에 주력하였다. 이에 따라 1914년 호남선이 국유철도로 부 설되어 영업을 개시하는 등 조선총독부에서 직접 간선철도 지선 건설에 앞장서는(정재정 1999: 106~110; 139~147) 한편 그 조속한 부설을 위하여 보조금을 지급하고 사설철도회사의 설립을 장려하였다(『동아일보』
1921.12.31. 기사.).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조선에서의 철도 운수 및 창고 업, 철도 연선(沿線)․기타의 부원(富源) 개발 및 척식(拓植)상 필요한 사업 과 이에 부대하는 업무”(1925년판 『조선은행회사요록 朝鮮銀行會社要 錄』)를 목적으로 경남철도회사가 설립되었다.
경남철도주식회사는 1920년 2월 자본금 천만 원으로 충청남도 천안군 천 안면 읍내리 329에 본점을 설립하고, 천안을 중심으로 동북방으로 안성~
장호원~여주를 거쳐 한강상류를 횡단하여 강원도 원주~강릉에 닿고, 서남
방으로는 온양온천~예산~홍성~광천~보령~서천~군산까지 철도 건립을 추진 하였다. 이 선은 궁극적으로는 호남선 익산역에서 군산항까지 이어지던 군산선에 연결하는 것을 목적으로 동서해안을 발착지로 하는 동서횡단선 으로(『동아일보』1922.08.24. 기사), 안성 동쪽으로 강원도까지는 예전 안 성의 동서로를 근간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첫 번째 사업이 충남 서천군에서 안성간 궤도 폭원 4척 8촌 반인 증기 경편철도를 부설하는 것이었다(1921년판『朝鮮銀行會社要錄』).
경남철도 계획이 알려지고 어느 지역 선로를 먼저 부설할 지 미정인 상태 에서 각 지역 상황에 따라 그 선후가 가려질 것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되 자 1921년 2월 안성에서는 안성유지(安城有志)들이 모여 “경남철도안성 선속성동맹회(京南鐵道安城線速成同盟會)”113)를 조직하고 활동에 들어간 다. 이의 성과로 그 해 5월 8일 경남철도 사장 이하 직원 7명과 천안유지 10여명이 안성을 방문하여 물산집산 상황과 기타 여건을 살펴보았고, 안 성공립보통학교에서 안성유지 100여명이 모인 가운데 성대한 환영회를 개 최하였다. 그 후 동맹회 간부 6명이 장호원과 여주의 상황을 보기 위해 이 시찰단에 합류하였다(『동아일보』 1921.05.12. 기사). 그러나 이러한 노 력은 조기에 성과를 보지는 못하였다.
1923년 5월 5일 동맹회는 안성선 연변유지(沿邊有志) 다수를 포함하여 동 맹대회를 개최하고 진정위원을 선정하여 경기도와 조선총독부에 안성선 속 성을 진정하게 하고 긍정적인 답을 얻게 된다. 이후 이 결과를 가지고 경남 철도주식회사와 교섭하여 안성선 속성에 대한 동의를 얻어낸다. 이를 계기 로 경남철도회사는 안성유지들에게 철도용지 기부를 요구했으며, 그 성사 를 위해 안성유지들은 토지소유주들과 교섭을 진행하였다(『동아일보』
1923.05.19. 기사). 이에 힘입어 1924년 경남철도 부설 계획에는 천안 ~ 안 성 간 16리의 선로가 채택되었고, 철도부로부터 당해 영업개시 예정철도 허가를 받았다(『동아일보』 1924년 2월 6일자 기사). 이렇게 하여 1924년 12월 11일 천안에서 기공식을 거행하고(『동아일보』 1924. 11.23 기사) 다 음해인 1925년 우여곡절 끝에 천안 ~ 안성 간 철도 17리 8푼이 개통되었다.
113) 이하 “동맹회”로 표기함.
[그림 3-1] 1925년 안성역 기차 발착 광경(출처: 김태영 1925)
당시 안성사람들 사이에서는 경남철도가 개통되면 안성에서 천안까지 고 속의 최신 교통수단이 놓이게 되고, 이는 또 기존의 안성시로를 따라 동 쪽으로 여주까지 연결이 되도록 노선설계가 되어 있어 이를 계기로 죽산 등 동부권 주변지역에서 안성역으로 집산되는 물산은 안성시장에 우선 집 산된 후 철도를 이용해 원거리로 수송될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따라서 안성에 철도가 놓이고 안성역이 생긴 것을 계기로 평택역의 탄생 에 따라 안성이 받았던 타격을 만회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며, 평택역 주변이 누렸던 호황을 안성시장이 누릴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반대로 안성선이 개통되기 얼마 전인 1925년 중 반 경부터 안성역 주변으로 신시가지(新市街地)가 생기고, 이에 따라 구시 가(舊市街)의 상권(商權)이 신시가지로 옮겨가게 될 것이라는 염려가 대두 되었다. 이에 따라 안성상공계를 중심으로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을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 하게 된다(『동아일보』 1926.02.25. 기사). 일본의 조선 내 철도부설 목적 중 하나는 앞서 언급했듯이 철도역 주변으로 일본인들 을 정착시키고 이들을 중심으로 상업권을 형성하고자 한 것이고, 사철인 경남철도주식회사도 그 목적에 이러한 ‘척식(拓植)’을 한 항목으로 갖 고 있었다. 따라서 경남철도 회사는 조선인들의 구시장 상권을 지키고자 하는 노력에 대해 “철도(鐵道)가 시가지(市街地)를 따라다니는 것이 아니
라 시가(市街)가 철도를 따라 가는 것인즉 정거장 부근에 철도촌을 만들 어야 된다.”고 하며, 신시가지 조성을 적극 원조하는 한편 여기에 일본 인 촌락을 만들어 현재 안성시장에서 조선인이 가지고 있는 상업상 중심 세력을 철도촌으로 옮기려고 하였다. 아울러 관변에서도 역시 신시가에 주력하는 모습이 보이자 안성시장 상공인들을 중심으로 이에 대한 대책 마련에 적극 나서게 된다(『동아일보』 1926.02.25. 기사).
이에 따라 안성시장 사람들은 안성시황(安城市況) 개선책을 적극 모색하 던 중에 경남철도가 안성까지 개통하게 된 기회를 이용하여 인근 지역 물 산을 안성시장으로 흡수할 계획을 세우고, 그 방안의 하나로 부근 각 군 에서 안성시장으로 이어지는 벽지도로 수축을 계획한다. 여기에는 안성시 장에서 충북 진천읍내에 이르는 가도(街道)와 진천군 광혜원에 이르는 도 로, 용인 백암장과 용인군 고삼면에 이르는 도로 수축 등이 포함되었다 (『동아일보』 1925.07.04 기사). 1924년 안성 사람들의 노력으로 자동차와 마차가 다닐 수 있는 안성~진천간 도로는 2개년 계획으로 총 예산 1만3천 여원을 세워 1925년 7월 지방비 6천원을 받아 수축 중이었다(『동아일 보』 1925.07.04 기사; 1930.10.26. 기사). 그러나 충북도청에서 향후 수년 내 지방비보조를 할 수 없다고 거절하여 공사 진척에 어려움을 겪게 된다 (『동아일보』 1926.02.26. 기사; 1930.10.26. 기사). 이에 따라 사업을 추진한 지 몇 년이 지난 1929년에도 안성유지들은 도지사에게 “안성진천간가도 (安城鎭川間街道), 안성용인간가도(安城龍仁間街道), 안성이천간가도(安城 利川間街道) 수축을 건의”하는 한편 “등외도로(等外道路)의 삼등도로(三 等道路)로 승격을 건의” 하는 등 안성시장의 쇠퇴상 만회를 위해 지속적 으로 노력했다(『동아일보』 1929.04.26 기사).
이러한 안성번영회 유지들의 노력 끝에 안성진천간도로는 1932년 “안성 읍에서 부역 9천명에 대한 환산금 2천7백 원을 내고, 금광면에서 부역 6 천명을 내는 등” 지역민들의 희생을 동반하여 공사를 진행하였으며 1936 년 가을 경 개통되었다(『동아일보』1932.01.16 기사; 1932.06.23. 기사; 1936.05.12 기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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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구개정(市區改正)
교통체계 개선과 함께 안성시장 상공계는 1925년 7월 경 신시가지로 상 권을 빼앗기지 않기 위해 그 필요성이 제기되었던 시장 시가(市街) 정돈 을 위한 시구개정을 안성선이 개통하기 전에 마치고자 분주히 활동을 시 작했다. 시구개정은 안성시장이 개설된 이래 몇 백 년 동안 불규칙하게 나열되어 구불구불한 시장 길의 가옥․점포․도로를 정돈하고, 교통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시장의 협소한 도로 폭을 넓히는 것을 주요 골자로 했 다. 또 눈이나 비가 올 때 물이 차서 마치 논과 같이 되어 통행에 막심한 불편이 있는 길에 하수구를 설치하는 것도 포함되었다(『동아일보』
1926.03.02 기사). 이러한 시구개정은 안성역을 통해 원거리로 이송되는 모 든 물화와 여객이 안성장을 거쳐서 안성역에 이르도록 할 계획 하에 안성 시장을 중심으로 동쪽 안성시로 입구에서 안성시장에 이르는 도로와 서쪽 으로 안성시장에서 안성역까지 이르는 도로 신설을 중심과제로 하여 진행 되었다(『동아일보』 1926.08.05. 기사).
안성역이 생기고 신시가지로 상권이 옮겨갈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안성시 장의 중심기관인 안성상사주식회사(安城商事株式會社)․호서은행(湖西銀行) 및 대상인(大商人) 송규형(宋圭衡)․김창배(金昌培)․최병찬(崔秉纘)․이종구(李 鍾九) 등 시장상공계 80여명은 시장소재 자기들 소유 토지 및 가옥에 대 해 시가확장개정에 필요한 부분 약 3만원 상당의 가격에 해당하는 것을 무조건 기부할 것이니 시장의 도로를 개정확장해 줄 것을 관계당국에 요 청하면서 시구개정은 시작되었다(『동아일보』 1925.07.27. 기사).
이들의 요구에 의해 1925년 7월 토목당국은 시구개정지역에 대한 토지측 량을 진행했다. 1925년 9월 13일 시구개정 및 시장발전책을 구체적으로 강구하기 위하여 안성시장 상업가들은 안성시구개정기성회(安城市區改正期 成會)를 조직하여 다음과 같은 사항을 결의하였다.
a. 현재 교통이 불편한 동리북우(東里北隅)에 있는 안성군청(安城郡廳)을 읍내 중앙인 안성공원 내로 이전할 것을 당국에 진정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