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천은 제작방법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안성유기장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뛰어난 기술과 발달된 안성장에서 획득한 상략(商略)으로 일제 강점기 이 후 유기가 사양화되었던 시기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실천 중의 하나는 안성유기 제작법을 주물방법으로 특화한 데 있다.
대장이었다. 이러한 환경 속에 갑산동점이 개발되어 원료공급이 원활한 것을 계기로 19세기 중엽 이래 납청은 새롭게 유기산지로 명성을 얻게 되 었다(선희창 1966: 40;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1988(1958): 474). 19세기 후 반 납청정의 유기는 평안도와 황해도ㆍ함경도까지 판로를 갖게 되어 “西 北道 사람의 가정에는 반드시 納淸亭鍮器로 빛을 내게 하였다”(金道泰 1950: 42~43)고 한다. 납청에서 유기행상으로 시작해 유기공장을 운영했던 남강 이승훈의 회고에 의하면 1875년 경 납청정의 큰 유기공장이었던 임 일권(林逸權)의 유기공장에서는 방짜유기에 해당하는 ‘놋쇠그릇’과 주 물유기에 해당하는 ‘퉁쇠그릇’을 모두 만들었다.
“… 工場에서는 주석과 구리를 섞어 녹여가지고 놋쇠그릇과 퉁쇠그릇의 두 가지를 맨드는데 놋쇠 그릇은 놋쇠를 뚜들겨 맨드는 것이요, 퉁쇠그릇은 먼 저 고운 흙으로 原形을 맨들고 퉁쇠를 뜨거운 불에 녹여 물이 되게 한 後에 그 쇳물을 原形에 부어 맨드는 것이다. … 그 다음 뚜들겨 만드는 것은 녹 인물을 부어맨들거나 原形도 없이 그릇 한 개에 몇 兩重이 든다는 것을 저 울에 달아가지고 그것을 鐵鎚로 뚜들겨 平平하게 하고 늘여서 그릇모양을 만든다.”
(金道泰 1950: 67~68)
납청지역에서 방짜와 주물유기를 모두 제조했던 정황은 1900년대 초에도 발견된다. 궁내부 내장원(宮內府 內藏院)의 1900년부터 1907년 사이 평안 남북도 사람들이 올린 각종 소장(訴狀)·청원서(請願書) 등을 모아 놓은
『평안남북도각군소장(平安南北道各郡訴狀)』에는 납청지역 유점 장인들 의 청원서가 있다. 이 청원서는 1903년 서울에서 파견된 봉세관(捧稅官)에 의해 유점세(鍮店稅)가 부과되자 이를 금(禁)해 달라는 김응화(金應化) 등 유점(鍮店) 장인들의 청원서이다. 그 내용에 의하면 “납청정의 1백여호는 모두 유점의 장인으로 업을 삼고 있다”고 하여 이 지역에 유기 제조가 상당히 성행한 유점촌이 형성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유 점세는 방짜유기점에 해당하는 ‘타점(打店)’과 주물유기 제작소에 해당 하는 ‘주점(鑄店)’으로 나뉘어 타점은 1좌(坐)에 봄ㆍ가을로 1백냥씩, 주 점은 1좌(坐)에 봄ㆍ가을로 6십냥씩 과세하는 것으로 구분하였다(內藏院
1903: 4책; 규장각 http://e-kyujanggak.snu.ac.kr/ 2013.12.01.). 이를 통해 볼 때 당시까지 납청지역에 주점이 존재했으며, 아울러 주물유기 제작 또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128)
납청 지역에서 방짜유기 중심의 제작방식이 자리 잡혔던 정황은 일제 강 점기부터 등장한다. 1920년대 후반부터 정주 납청의 유기관련 기록은 방 짜유기를 제조했던 양대공장을 중심으로 기록되었다.
“뎡주(定州)와 박천(博川) 량고을에 도합 십여군데의 공댱을 시설하고 식긔 세면긔(食器洗面器)등을 제작하는 유긔제조십이공댱(鍮器製造十二工場)에는 직공일백칠십육명(職工一百七十六名)이 … 그 상세한 내용을 듯건대 긔유긔 공장은 일명량대뎜(兩大店)이라 칭하는 식긔 세면긔 등과 긔타 여러 가지 유 기를 제작하여 내는 대형뎍유긔제작공장(大型的鍮器製作工場)에 사업이 부 진상태에 잇서서 그리큰리익을 보지 못할 것갓틈으로 직공측으로부터 공댱 주에 동정하여 십일명한패로써나흘동안에 이백근(二百斤)내외의 제작품을 내 여오면서 분에 넘치게 일을 하여 주엇는데 …”
(『동아일보』1927.10.29.일자 기사)
양대공장은 이 지역의 방짜유기공장을 지칭하는 것으로 11명이 한 조를 이루어 손 메질에 의한 단조기법으로 일을 하며, 생산량은 무게로 계산한 다. 이 기사를 통해 볼 때 적어도 1920년대 후반 경 납청지역은 유기제조 에 있어서 방짜기법 특화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정황은 1930년대 방짜유기를 구매하기 위해 이 지역에 드나들었다던 안성유기제 조주식회사 판매사원이었던 K씨 및 정주 납청 출신 유기장 L씨의 회고에 의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성유기점 역시 일제 강점기로 들어서면서 본격화된 일제 사기 유입에 밀려 유기 소비가 위축되고, 1920년대 들어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고착화 되자 현저히 쇠락해가는 유기업계의 자구책 중 하나로 생산원가가 적게 드는 반면 생산량이 많은 주물유기제작으로 생산방식을 단일화하게 되었
128) 이 자료에 따르면 당시 이 지역에서는 유기를 만드는 공장 모두를 유점(鍮店)으로 표 현하고, 유기 장인을 ‘유점장민’(鍮店匠民)이라 통칭하였다. 그리고 세부적으로는 제작방 법에 따라 유점을 타점과 주점으로 구분했다.
다(『동아일보』1926,07.02 기사).
안성유긔에는 두다려서 만드는 방짜라는 것이 잇고 부어서 만드는 붓백이라 는 것이 잇는데 외국물품이 들어오게 된 뒤로는 유긔가 만히 쓰이지 안는 때문에 만들기 어렵고 갑이 만흔 방짜는 업서지고 붓백이만 만들게 되얏스 며 만드는 공장도 아조 줄어저서 지금은 사오처 밧게 남지 안엇슴니다.
(『동아일보』1926,07.02 기사)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에 비해 생산인력과 재료 면에서 원가가 적게 들어 소규모 사업장에서도 쉽게 제작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당시까지 방짜유 기 제조에는 쇠를 녹여 중량을 맞춰 배합한 쇳덩어리인 ‘바데기’를 만 드는 주물공정에 겉대장(부책임자) 1명, 받풍구(밖풍구 미숙련 풍구 책임 자) 1명, 이 쇠를 두드려 기물을 만드는 단조공정에 대장(총책임자), 앞망 치(제1망치군), 겉망치(제2망치군), 세망치(제3망치군), 네핌가질(壓延선반 공), 안풍구(숙련 풍구책임자)가 각각 1명씩, 가질(선반공정)에 2명해서 모 두 11명이 한조로 일했다(金泳鎬 1965: 162 ;『동아일보』1927.10.29.일자 기사). 따라서 방짜유기 제조를 위해서는 최소한 11명의 인원이 있어야 1 조의 생산단위를 갖출 수 있었다. 반면에 주물유기의 경우 대장 1명, 쇳 물 용해․ 갯토 정리 등 대장일을 도와주는 조수가 1명, 풀무 1명, 가질 2 명해서 모두 5명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수 없이 대장이 혼자 하는 경우도 있어 1조에 4~5명이면 하나의 생산단위를 이룰 수 있었다. 이렇게 주물유 기는 인원 면에서 방짜유기의 절반도 안 되는 사람으로 유기 제작이 가능 했다.
아울러 원료에 있어서도 방짜는 구리와 주석이 72 ~ 78% : 22 ~ 28%의 비율이 들어가야 생산이 가능하고, 주석이 이보다 덜 들어갈 경우에는 단 조과정에서 깨지거나 부러져 생산이 가능하지 않다. 반면에 주물유기는 합금방법이 여러 가지이다. 주석의 양을 조절하여 주조해도 깨어지거나 하지 않기에 식기를 만들 경우 보통 상철이라 하여 구리 80 ~ 85%에 주 석 15~20% 합금으로 방짜보다 주석이 덜 들어간 것을 사용했다. 또 식기 가 아닌 촛대나 화로 등 일상 생활용품을 만들 경우에는 주석을 사용하지
않고, 구리와 아연을 다양한 비율로 하여 구리 55 ~ 65%, 아연 35 ~ 45%
의 황동을 사용했다. 아울러 아연 이외의 잡쇠도 구리와 합금하여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방짜와 주물은 합금 원료와 방법이 다르며, 방짜로 생산 할 경우 주석의 가격이 비싸 원가가 높아진다.
생산성 면에 있어서도 방짜와 주물제작법은 현저히 차이가 난다. 1800년 대 말경 납청지역에서는 주야로 돌아가며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金道泰 1950). 그러나 일상적으로 납청 뿐만 아니라 함양 등 방짜유기점에서는 쇠 의 가열 정도를 육안으로 쉽게 확인하기 위해 야간에 작업을 많이 했다.
보통 밤 12시부터 다음날 12시경까지 일을 하는데, 1조의 1일 작업량이 징의 경우 6개 정도 밖에 나오지 못했다(유기장 L씨; Mi씨; A씨 제보). 한 편 주물유기의 경우에는 1조의 작업량이 많이 하면 하루 30번 정도 부어 서 그릇 90벌도 만들 수 있었다(충주 유기장 B씨 제보). 이렇게 방짜유기 는 주물유기에 비해 노동력․비용․생산성 면에서 경쟁이 되지 않았다. 제반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주물유기는 방짜유기에 비해 불황일 때 제작이 용이 한 제조방법이라 할 수 있다.
안성의 유기점들은 철도가 부설 된 이후 저렴한 가격으로 밀려들어 와 새로운 식기로 생활 속에 자리 잡아가기 시작한 일본산 사기에 대해 주물 유기 제작법으로 특화하여 이에 대응해 나가고자 했다. 주물유기 제작법 은 일본산 사기가 갖추고 있던 최대의 장점인 저렴한 가격이라는 점에서 경쟁력을 갖출 수 있게 하였다. 1920년대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를 필두로 당시 유기점들이 추구하던 대안적 유기제작 방향인 “미술적으로 정미한 모양과 실용적으로 견고한 제품을 특별염가로 판매”(『동아일보』
1928.09.28; 10.12. 광고문 등)할 수 있게 하는 제작법으로 주물유기 제작법 은 선택된 것이다. 더구나 1920년대 이후 안성유기점들에서 시도했던 새 로운 수요에 맞춘 다양한 제품의 제작에 있어서도 주물제작법이 유효했 다. 교회용품, 각종 기념품, 새로운 생활용품 등의 제작은 주물기법으로 가능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안성유기점들은 주물유기제작법 특 화를 통해 생산성을 높이고, 새로운 상품들을 생산하여 근대화 된 상품으 로 유기를 재탄생시켜 상품가치를 높이고자 했으며, 이러한 상품들을 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