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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우리문화 발견 운동

식민지 시기 이래 지식인들에게 전통과 민속은 근대화를 위한 극복대상 이거나(김한초 1985: 55; 전재호 1998a: 88 재인용) 잃어버린 민족의 정체성 을 확인시켜 주는 되찾아야 할 우리문화로, 양가적으로 인식되었다. 해방 과 더불어 “民族文化의 傳統과 主體를 찾으려는 努力”이 지식인과 일반 인들 사이에 큰 관심사가 되었고(임동권 1969: 136), 이러한 관심은 일재잔 재 청산이라는 당위성과 연관되어 더욱 고조되는 듯하였다(전재호 1998:

88). 그러나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등장한 서구화는 토착문화의 토대를 잠식하는 것으로(장주근 2011: 10) 전통은 여전히 극복의 대상이라는 인식 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이승만 정권의 몰락을 가져온 4.19혁명을 계기로 1960년대는 “민족문화” 그 중에서도 피지배층의 문화라 규정되었던 민 속에 대한 관심이 변혁적 지식인들 사이에서 높아져 탈춤ㆍ판소리ㆍ민요 ㆍ풍물 등의 부흥운동이 전개되었다.

“… 4.19혁명은 이승만 독재정권에 종지부를 찍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민 족의 정신세계에도 커다란 각성의 계기를 안겨주었다. 문화‧예술계에서 4.19 의 영향은 60년대와 70년대 초반에 걸쳐 드러났다. 먼저 문학에서 4.19를 주도적으로 경험한 세대들에 의해 순수문학의 허구성이 비판되기 시작하였 고, 참여문학에의 논쟁을 거쳐 ‘민족문학론’이 정립되었다. 한편 4.19의 민 족주의적 성격은 전통 민족문화의 계승에도 관심을 기울이게 하여 탈춤‧판 소리‧민요‧풍물의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하였고, …”

(김용태 『한겨레』1989.05.16. 기사)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 속에 등장한 박정희 정권은 우선 정권수립의 정당 성을 확보하기 위해 제2공화국 장면 정권의 지도력부재 등 실정(失政)을 비 판하고, 4.19혁명을 계승하고 있음을 밝혔다. 또 경제건설을 지상의 과제로 삼고(朴正熙 1963 : 244~292), 이를 기반으로 한 근대화를 성취하기 위해 공 동운명체로서 민족의식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그리고 민족적 위기의 시대에 민족애(民族愛)를 발양(發揚)하여 민족을 위해 개인을 희생하는 민족단결을 강조하였다(『동아일보』1962.03.06. 기사). 따라서 1950년대 후반 다시 강조 되기 시작하여 4.19 이후 더욱 증폭되었던 민족주의에 대한 재인식 및 경제 건설을 위해 단결해야 할 주체로서의 민족과 민족주의는(김경일 1998) 근대 화와 더불어 박정희 정권의 큰 정책기조를 이루고 있었다. 이 시기 “민 족적 민주주의,민족중홍,한국적 민주주의,민족주체성” 등 각종 민족 주의적 구호들이 난무했지만 이러한 구호와 함께 등장하는 민족‧민족문화 는 “조국근대화” ․ “자립경제” 등의 구호에 묻혀 여전히 극복 대상으 로서의 의미가 강했으며, 이러한 경향은 근대화와 경제지상주의를 강조했 던 정권초기에 더욱 두드러졌다(전재호 98b: 89; 98a 88~89; 오명석 1998:

145; 김광억 1989: 58). 따라서 “민족문화의 중흥”은 “실용주의적인 경 제개발”과 함께 “조국근대화”를 위한 “쌍두마차로 평가”(오명석 1998: 147) 되었지만, 결코 경제건설에 앞서는 의미를 획득하지는 못했다.

이러한 정권의 정당성 확보와 경제건설‧근대화의 발판으로 활용되는“민족 문화”정책에 대한 비판이 당시 지식인의 산실이었던 대학가를 중심으로

“반외세”‧“반봉건”의 기치를 내걸고 또 다른 민족문화운동을 전개하게

했다(정갑영 1993: 96; 오명석 1998: 148 재인용). 1961년부터 진행된 한일국 교정상화협상에 의해 “‘한국의 대일 청구권문제’에 대해서 ‘무상ㆍ유상 을 포함하여 5억 달러의 대한민국경제협력’”이 결정되고(정치학대사전편 찬위원회 2002), “거의 무제한적 일본 대중문화유입”이 허용되자 이 사 건은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한 젊은 세대들에게 민족 정체성과 전통문화에 대한 심대한 위협으로 이해되었다.

이에 따라 1963년 11월 서울대학교에서는 “향토의식 초혼굿”이 공연되 었고, 1964년 3월에는 박정희 정권이 내세운 민족주의 구호였던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을 거행하며 민족정기를 팔아먹는 굴욕적 외교에 대한 비판을 탈춤과 굿 등 민족민중문화의 형식을 빌려 드러냈다. 이어 1965년 에는 서울대학교에 “민속극 연구회”가 결성되었고, 계속하여 탈춤‧풍물‧

민요연구회 등이 조직되어 민족정체성과 전통을 회복하고자 하는 “반식 민주의적” 움직임이 전개되었다(김광억 1989: 58~59). 특히 1970년대 초에 는 이러한 “민족문화” 부흥운동의 결과로 이에 대한 관심이 폭발적으로 확대되어 제반 사회 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던 대학가를 중심으로 급 속히 확산되었다.

“탈춤에 관한 관심은 날로 높아지고 있다. 놀이판에 젊은 지성인들이 모여 든다. 여러 대학에서 학생들이 탈춤을 배워서 공연하는 단체를 만들어 신명 나게 움직이고 있다. 탈춤을 계승하는 연극을 만들어 보이려는 움직임도 활 발하게 일어나고 있다. … 탈춤을 공부하고자 하는 젊은 국문학도도 나타나 고, 탈춤 전수를 위한 강습회에 젊은 연극학도도 찾아오게 된 것이 1960년 대 이르러서 이루어진 변화이다. 1960년대의 전환은 이 분야에 있어서도 실 감나게 확인될 수 있다. 그러다가 1960년대 후반부터는 분위기가 자못 달라 졌고, 1970년대에 이르러서는 서두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상황이 벌어져서 탈춤에 관한 관심은 거의 폭발적으로 확대되기조차 했다.”

(조동일, 1988: 5~6)

이러한 지식인들의 민족 정체성과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은 서울대학교 출 신 한 사업가의 민족의 일상문화 회복에 대한 관심을 촉발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유기를 다시 일상생활용품으로 부활시키려는 노력을 진행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