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유기장들은 조선후기 주문제작품인 맞춤과 일반수요를 위한 장내기 라는 두 가지 생산방식을 통해 다양한 소비수요에 대응해 왔다. 이러한 안성유기 생산의 전통은 일제 강점기 격변의 시대에도 그 빛을 잃지 않았 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안성유기는 1900년대 초 식민지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신문물이 도입됨에 따라 심각한 존폐위기에 내 몰리게 되었다. 1920 년대 들어 일본산 사기그릇의 위협이 본격화되기 시작하자 안성유기업계 는 유기소비의 급격한 감소에 대한 대응 방법으로 조선시대 사용되던 제 기와 식기 등의 생산과 더불어 근대적 소비수요에 맞춘 신제품 개발을 상 품가치 재고를 위한 주요한 전략의 하나로 삼게 되었다. 이에 따라 전 세 계적 수요에 대응하는 제품 개발과 수출 또한 새로운 소비수요에 맞춘 신 제품 개발의 연장선상에서 진행되었다.
이러한 전략은 1924년 안성 미양면의 성공회 전도사 김현석(金顯錫)에 의해 추진된 “안성신명공업강습소(安城新明工業講習所)”에서 시작되었 다. 이 강습소에서는 성공회의 자금원조를 받아 “농촌공업품 자급자족운 동”의 일환으로 농촌 남여에게 염직(染織)과 유기(鍮器)를 가르쳤다. 본 강습소의 실습을 마친 사람들은 유기 제조 실력이 뛰어나 안성품평회(安 城品評會)에 출품하여 1등을 하였고, 이들이 만든 신선로‧화병 등은 영국 박람회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이들은 기존의 유기제품인 식기류 생산 외 에 촛대‧십자가‧종 등 각종 교회 의식용품(儀式用品)을 제작하여 일본‧중국‧
구미 각국에 수출하여 수출액이 매년 3천원에 달하였다(金泳鎬 1965: 163;
『동아일보』1927.03.15. 기사). 외래품에 의해 전멸된 농촌공업부흥의 방안 으로 설립된 신명공업강습소의 유기제작은 기독교를 배경으로 새로운 상 품개발과 해외수출이라는 신경향을 대두시키게 되었다. 『동아일보』
1926년 기사에는 이를 통해 “안성맛침 이라는 말이 세계도처에서 쓰이게 될 것”이라는 희망찬 메시지를 전한다(『동아일보』 1926.07.02. 기사). 그 러나 신명강습소의 유기제작에 있어 새로운 풍조는 몇 년 진행되다 1928 년경 중단되었다(『동아일보』 1928.12.11. 기사).
[그림 3-8]
1926년
안성의 한 유기점 상품진열 모습 (『동아일보』
1926.07.02.)
이후 이러한 신제품 개발 및 수출의 경향은 1928년 설립된 안성유기제조 주식회사로 이어졌다.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에서는 사해에 자자할 정도였 던 안성맞춤유기의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 생산이 감소되었던 원인 중 하 나로 “需用家의 要求를 滿足케하지못하는”(『동아일보』 1931.02.11. 기 사) 점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안 중 하나로 근대화된 시대에 걸맞는 제품을 개발하여 소비수요에 대응하고자 했다. 우선 기존에 제작 하던 식기․제기 및 각종 생활용품에 있어서는 외양에 있어 당대의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 미적인 면을 강화하였다. 아울러 반상기 등에 있어서도 개 량된 형태의 식기를 생산하여 제품을 다양화하였고126), 변색에 대한 보증 서를 발급(기록역사박물관 소장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 상품도록 사진)하 여 재질에 있어서도 상품의 품질에 대한 신뢰를 높이고자 하였다. 또한 새로운 상품으로 각종 기념품과 “표창품(表彰品)”을 제작하여 상당한 판매실적을 올렸다. 아울러 상품에 화학약품을 사용하여 그림도 그리고 명문(銘文)도 새겨 넣어(『동아일보』 1931.02.11. 기사) 소비자의 기호에 한층 다가가는 등 유기의 상품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 각종 기념품 및 표창품 외에 신호종‧간판 등 새로운 생활용품도 제작․
판매하였다. 신호종은 진유제(眞鍮製)인 ‘갑종(甲種)’과 합성철제(合成 鐵製)인 ‘을종(乙種)’으로 구분하여 생산했으며, 합성철제가 진유제에 비해 크기가 크고 가격도 높았다. 새로운 상품은 제품에 따라 유기 합금
126) 1930년 전북 임실의 구매자에게 보내는 안성유기제조주식회사의 상품 명세서인 “사절 서 仕切書”에는 “개량칠첩 改良七牒”의 거래내역이 기재되어 있어 이와 같은 정황을 설 명해 준다(안성맞춤박물관 소장자료).
종류 및 형태 구 분 재 질 크 기(직경) 가 격 갑 1호
진유제
29.7㎝ 11원
갑 2호 26.6㎝ 8원
갑 3호 23.6㎝ 6원
갑종(甲種) 갑 4호 20.3㎝ 4원 50전
을 1호
합성철제
45.5㎝ 16원
을 2호 36.4㎝ 12원
을종(乙種) 을 3호 30.3㎝ 8원
[표 3-11] 신호종 종류 및 형태‧재질‧크기‧가격 (출처:『동아일보』 1933.06.23.; 07.02. 광고)
에 사용되던 구리와 비철금속의 합금 외에 다른 재질도 사용되었으며, 형 태도 다양해 재질 및 형태에 있어서도 다각적인 소비수요에 응하고자 했 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각 군 진흥회에서 신호종을 많이 주문해 준 것 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봉사적대염가(奉仕的大廉價)”로 판매한다는 광 고(『동아일보』 1933.06.23.; 07.02. 광고)를 통해 가격인하 등 상품의 교환 가치 측면에 있어서도 다양한 판매 전략을 구사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런 다양한 판매 전략의 한 측면은 당사의 상품도록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직원현황 및 회사의 상품판매 전경, 상품의 종류와 형태․크기․
용량, 그 판매액 등을 상세히 기재하여 회사와 상품에 대한 신뢰도를 높 임과 동시에 주문을 위한 판촉자료로 활용하였다.127)
시대적 수요에 맞춘 새로운 상품 생산이라는 전략은 이후 근대화 과정에 서 안성유기가 그 명맥을 이어갈 수 있는 주요한 전략이 되었다. 이러한
127) 동 회사의 상품판매 도록(기록역사박물관 소장 사진)에는 당사에서 생산했던 동아일보 사 간판의 형태와 전국‧해외 500여 지사에 주문‧납품하였음을 판매일시까지 기재하여 놓 았다. 이를 통해 상품에 대한 신뢰도를 한층 높임과 동시에 그 표본을 제시하여 소비자 로 하여금 주문을 독려하고자 하였다.
실천은 제작방법 면에서도 이루어졌다. 안성유기장은 조선시대에 형성된 뛰어난 기술과 발달된 안성장에서 획득한 상략(商略)으로 일제 강점기 이 후 유기가 사양화되었던 시기에도 부단한 노력으로 그 명맥을 이어갔다.
이를 위한 대표적인 실천 중의 하나는 안성유기 제작법을 주물방법으로 특화한 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