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양은․스테인리스의 등장과 일상에서의 폐기
유기의 상품가치를 퇴색시켰던 변색문제는 유기 재료에 국한되지 않고, 1950년대부터 시작된 가정용 연료를 연탄으로 대체하는 정책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진행되었다.(『경향신문』1953.09.01. 기사) 1950년대 말부터 서 울․부산․대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가정용 연료로 연탄사용이 본격화되기 시작했다(『동아일보』 1958.09.12. 기사). 유기는 유해가스에 민감하여 공 기가 좋아야 변색이 안 되고 오래 사용할 수 있었다. 연탄이 각 가정의 부엌에서 널리 사용되게 되자 유해가스에 약한 유기는 사고납이 아님에도
149) 놋쇠는 넓은 의미로 구리에 주석•아연 등 비철금속의 합금이지만 장인들이나 문헌 및 언론 등의 사용례에 따르면 구리+주석의 합금을 놋쇠라 하기도 하고, 구리+아연의 합금 을 놋쇠라 하기도 한다. 여기서 놋쇠는 구리와 아연 합금을 말한다.
불구하고 사고납 유기와 같이 쉽게 녹이 나고 색이 변해 사용하기 위해서 는 계속 닦아야만 하는 불편을 낳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기는 이후 등장 하는 대체품에 밀려 급격히 일상생활용품의 지위를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G씨; L씨; Ys씨 등 유기장들 제보).
유기의 대체품으로 먼저 등장한 것은 양은이다. 공식적인 기업체 통계에 조사된 바에 의하면 양은은 1956년도부터 등장하여 유기점들을 압도하여 가기 시작한다. 전국적으로 양은제조업체는 1956년도에는 57개 업체150), 1957년도에 53개 업체였고(『全國企業體總攬』 1958년판) 1959년도 자료에
연번 업 체 명 주 소 연
번 업 체 명 주 소 1 三和工作所 용산구 원효로 30 華城洋銀工業社 인천시 류동 2 協信洋銀工業社 용산구 신계동 31 韓一알미늄工業社 인천시 금곡동 3 서울알미늄工場 성동구 하왕십리 32 甲信洋銀工業社 인천시 송림동 4 三協工業社 용산구 원효로 33 朝鮮輕合金工業(株) 부산시 봉래동 5 承助알미늄鑄物工業社 마포구 공덕동 34 信和洋銀工場 용산구 원효로 6 三兄商會 성동구 상왕십리 35 平和産業工場 영등포구 본동 7 高麗鍮器工場 마포구 아현동 36 漢城工業社 중구 동자동 8 韓美社 마포구 아현동 37 大同工藝品製作所 성동구 하왕십리동 9 萬里鍮器工場 서대문구 만리동 38 城東商會 성동구 신당동 10 大元鍮器工場 서대문구 만리동 39 大韓工業社 성동구 신당동 11 朝鮮鍮器商會 서대문구 충정로 40 昌慶洋銀工業社 용산구 남영동 12 雲興鍮器工場 서대문구 충정로 41 元興鑄物工場 용산구 신계동 13 大韓金屬工業(株) 인천시 창영동 42 福信洋銀工業社 용산구 신계동 14 東和金屬工業社 인천시 도원동 43 元一洋銀工場 용산구 신계동 15 東邦金屬工業社 인천시 송림동 44 德新洋銀工業社 인천시 신흥동 16 東洋金屬工業(株) 인천시 송림동 45 松林洋銀鑄物工業社 인천시 송월동 17 三進工業社 용산구 원효로 46 三共製作所 대구시 인교동 18 東洋알마이트工業社 성북구 미아리 47 大邱企業社 대구시 칠성동 19 三興鑄物工場 용산구 문배동 48 保仁輕工業社 대구시 내당동 20 柳韓美術工藝社 종로구 이화동 49 宜興輕金屬工業社 전남 광주시 누문동 21 興亞金屬工業社 인천시 송월동 50 光州알미늄工業社 전남 광주시 서동 22 完美製器工場 인천시 송월동 51 裡里洋銀工業社 전북 이리시 화선동 23 朝鮮輕金屬工業(株) 인천시 신흥동 52 忠北鑄物工場 충북 청주시 남주동 24 大韓洋銀工業社 인천시 화천동 53 大洋輕金屬工業社 부산시 봉래동 25 仁珍洋銀工業社 인천시 송월동 54 釜山金屬工業(株) 부산시 봉래동 26 二和양은工業社 인천시 금곡동 55 地球鐵工所 대구시 계산동 27 濟物浦洋銀工業社 인천시 송림동 56 서울알마이트工業 종로구 연지동 28 港進洋銀工業社 인천시 송림동 57 仁光工業社 용산구 청파동 29 三陽洋銀工業社 인천시 류동
150) 【1956년도 양은제조업체 현황】(1956년판 『全國主要企業體名鑑』 출처 :http://db.history.go.kr)
는 35개 업체가 조사되어(『광업및제조업사업체명부』 1959년 조사자료) 1956년 ~ 57년 경 가장 번성하였고, 1959년경부터 서서히 양은의 열기도 식어가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통계조사에 누락되거나 영세한 업체까지 합한다면 실제 양은 제조업체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은 숫자였을 것이다.
양은이 급격히 성행하게 되자 서울의 “고려유기공장(高麗鍮器工 場)”·“만리유기공장(萬里鍮器工場)”ㆍ“대원유기공장(大元鍮器工場)”
ㆍ“조선유기상회(朝鮮鍮器商會)”ㆍ“운흥유기공장(雲興鍮器工場)” 등 유기제조업체 중에서는 “유기(鍮器)”라는 명칭을 상호에 그대로 두고 양은생산으로 전환한 경우도 있었으며, 대전의 “삼광양은공업사(三光洋 銀工業社)”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유기와 양은냄비를 함께 제조하기 도 했다(위와 같음). 이렇게 양은은 급속히 일상생활 식기로서 유기의 자 리를 대체해 갔다.
그리고 1950년대 말에는 양은에 이어 스테인리스가 등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초까지 고가의 가격으로 인해 아직 상용화되지는 못했다(『동아 일보』1957.08.16. 기사). 스테인리스는 1960년대 중반부터 각 가정에서 식 기로 광범위하게 사용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름다운 광택과 녹슬지 않고 오래 쓸 수 있는 내구성”으로 “현대문화생활”에 안성맞춤인 것으 로 주부들에게 호응을 얻으며 양은의 뒤를 이어 유기시장을 잠식해 들어 갔다. 심지어 “유기그릇에 일명 ‘메끼’라 하여 니켈 등을 도금해서 스 테인리스로 판매하는 유사품이 시중에 나돌기 시작했으니 이에 주의하 라”(『매일경제』1967.02.14. 기사)는 신문기사가 날 정도로 유기의 지위 는 땅에 떨어졌다. 당시의 상황을 아래의 기사문은 잘 보여주고 있다.
「스테인리스」그릇이 나오기 시작해서부터 유기그릇이 사양화되어 가고 있지 만 아직도 일부 부유층에서나 기왕에 장만해 놓은 가정에서는 유기그릇을 그대로 쓰고 있는 형편이며 새살림을 꾸미는 가정에서는 모든 그릇을 유기 로부터 「스테인리스」로 바꾸어가고 있다.
(『매일경제』1967.02.14. 기사)
이렇게 양은에 이어 등장한 스테인리스는 일상생활용품으로서 유기의 자
리를 대체하여 갔다.
가정용 연료가 연탄으로 변화됨에 따라 유기는 변색문제로 일상생활용품 으로서 가치를 상실하고, 이에 대한 대체 식기로 등장한 양은과 스테인리 스에 밀려 급속히 사양화(斜陽化) 되어갔다. 아울러 당시 등장한 플라스틱 도 양은․스테인리스와 함께 많은 부분 유기의 자리를 잠식하여 갔다(『경 향신문』1948.10.17. 기사). 이렇게 유기는 일상생활에서 폐기되어 갔으며, 점차 대체품에 자리를 내어주게 되었다.
나. 상품가치 하락과 유기점의 몰락
앞서 살펴 본 대로 유기가 상품으로서 지위에 현저히 타격을 받고 대체 상품에 그 자리를 내어주게 되면서 안성유기점들도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 다. 1955년경까지 19곳 정도에 이르렀던 안성유기점들은(『경향신문』
1963.07.13. 기사) 1956년 ~ 1957년경에는 현저히 줄어 통계상으로 5개 업 체 정도가 남게 된다(1956년판『全國主要企業體名鑑』;『全國企業體總攬』1958년판 http://db.history.go.kr 2013.01.02). 규모가 갖추어진 유기점을 중심으로 기록되 던 통계자료상의 허실을 감안하더라도 1~2년 사이 현저히 줄어든 것을 알 수 있다. 1956~7년 경 기록될 정도의 규모가 되었던 안성의 유기업체는 김기준의 정광사유기제작소, 이성순의 삼화유기제작소, 변윤수의 안신유 기제작소, 윤기병의 안성유기제작소, 양대길의 대길유기제작소 5개 업체 였다. 그리고 이 보다 2년 경과한 1959년 조사된『광업및제조업사업체명 부』자료에 의하면 안성의 유기업체는 이제 안성유기제작소 한 곳 만이 남아있어 몇 년 사이 안성유기점은 급속히 쇠퇴하여 겨우 그 명맥만 유지 하고 있는 형상이 되었다. 이렇게 양은백이(사고납) 생산으로 인해 실추된 유기의 이미지와 연탄 보급에 따른 변색문제는 양은의 확산으로 이어졌 고, 결국 유기점의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다.
업 체 명 주 소 대 표 자 존폐 여부151) 1956 1957 1959.3
正光社鍮器製作所 鳳南洞 328 金箕俊 ○ ○ ×
三和鍮器製作所 樂園洞 403 金鍾學(李成淳)152) ○ ○ △
安信鍮器製作所 玉川洞 48 卞允洙 ○ ○ ×
安城鍮器製作所 倉前洞 127 尹基炳 ○ ○ ○
大吉鍮器製作所 石井洞 391 梁大吉 ○ ○ ×
5개소
[표 4-10] 1950년대 후반 안성유기점 존폐 현황
1958년 경 김기준의 정광사유기제작소가 폐업을 하게 되자 김서영의
“영광유기상회”는 그 공장을 인수하여 그 자리에서 유기생산을 시작했 다. 그리고 동업으로 김기준과 함께 정광사를 운영했던 K씨는 새로 별개 의 유기공장을 설립했다(『경향신문』 1963.07.13. 기사 및 유기장들 제보).
따라서 1959년 경 안성에는 기존에 운영되던 유기업체 중 유일하게 남아 있던 안성유기제작소 외에 이들 유기점이 신생유기점으로 공존하는 형국 이 되었다. 이성순의 삼화유기는 완전히 폐업한 것은 아니지만 1959년경 부터 유기생산은 중단되어 사실상 폐업상태로 볼 수 있었다(『경향신문』
1963.07.13. 기사). 이성순은 1961년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안성유기업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구리와 주석 등 원료를 싸게 구입함과 동시에 판매단 일화에 의한 시장개척을 목적으로 안성유기주식회사의 설립을 추진하였으 나 경기부진으로 유기업자들의 출자가 이루어지지 못해 무산되었다(『경향 신문』 1963.07.13. 기사). 당시 상황을 신문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빛 잃어가는 ‘鍮器時代’ 寵兒 洋銀에 눌려”
‘안성마춤’으로 이름 난 안성의 유기(놋그릇)가 점차 우리 생활주변에서 멀
151)『全國主要企業體名鑑』(1956년판),『全國企業體總攬』(1958년판),『광업및제조업사업체명부』
(1959년 조사자료) 참조
152)『全國主要企業體名鑑』(1956년판)에는 삼화유기제작소의 대표가 김종학으로 되어 있으나 1950년『安城大觀』등 이전의 기록과 삼화유기가 이관익이 운영하였다던 안성유기장들의 제보 를 참조 할 때 당시 삼화유기제작소의 대표는 이성순이었을 것이고, 김종학으로 기록된 부분 은 기록상의 오류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