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독립 후 일제의 유기공출 등으로 인해 전멸의 상태가 되다시피 했던 각 가정의 유기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유기점 이 급속히 늘어나 『안성대관』(金台榮 1950: 57~58)에 의하면 1950년 6.25 전 쟁이 발발하기 전 안성에는 유기점이 16개소, 시점(匙店)이 3개소, 연죽점 (煙竹店)이 20개소로 유기 관련 업종을 모두 합하면 39개소가 되었다.
『안성대관』에 기록된 유기점의 현황을 보면 아래와 같다.
연번 상 호 주 소 대 표 자
1 정광사유기제작소(正光社鍮器製作所) 봉남동 328 김기준(金箕俊) 2 백성유기제작소(白城鍮器製作所) 서인동 321 이백세(李百歲) 3 경안유기제작소(京安鍮器製作所) 서인동 321 김만수(金萬洙)
4 금성유기제작소(金成鍮器製作所) // 김영배(金永培)
5 안성유기제작소(安城鍮器製作所) 서인동 351 윤희병(尹喜炳) 6 만물유기제작소(萬物鍮器製作所) 대천동 304 박도현(朴道鉉) 7 삼화유기제작소(三和鍮器製作所) 낙원동 403 이성순(李成淳) 8 광안사유기제작소(光安社鍮器製作所) 낙원동 405 김경만(金慶滿) 9 안신유기제작소(安信鍮器製作所) 옥천동 48 변윤수(卞允洙) 10 안창유기제작소(安昌鍮器製作所) 창전동 122 최창섭(最昌燮) 11 안성유기제작소(安城鍮器製作所) 창전동 127 윤기병(尹基炳) 12 대길유기제작소(大吉鍮器製作所) 석정동 39 양대길(梁大吉) 13 조선농공주식회사(朝鮮農工株式會社) 석정동 46 박용만(朴容萬) 14 청풍유기제작소(淸風鍮器製作所) 금산동 6 김주영(金周永) 15 형제유기제작소(兄弟鍮器製作所) 금산동 25 김기창(金起昌) 16 창신유기제작소(昌信鍮器製作所) 금산동 32 이정석(李正石) 17 편갑인농악점(片甲寅農樂店) 창전동 116 편갑인(片甲寅)
[표 4-1]『안성대관』에 기록된 1950년경 안성 유기점 현황
그리고 이 기록에는 누락되었으나 1920년대 “안성유기제조공장”을 운영 하였던 도정규(都丁奎)(金泳鎬 1965: 164)도 해방 후 유기점을 운영하였으 며, 금광면 마둔리의 진주 유씨 집안에서도 시내 금산동 일원에서 크게 유기점을 운영하였다. 또 정상봉·박문수․염창선 등도 이 시기 소규모 유 기점을 운영하였다(쌍둥이형제 제보). 아울러 1972년 경 유기장들의 회고에 의하면 해방 후 전성기 때 안성에 유기점이 30여개였다 하니(『동아일 보』 1972.11.11. 기사) 제반 기록과 기억을 통해 보면 당시 안성에 적어도
연번 주 소 대 표 자 연번 주 소 대 표 자 1 숭인동 61 김낙영(金洛榮) 11 구포동 208 임용옥(林用玉) 2 〃 한희성(韓熙成) 12 구포동 217 김수남(金壽男) 3 〃 임수학(任壽學) 13 구포동 222 김춘화(金春化) 4 숭인동 289 강치운(姜致雲) 14 구포동 224 오창근(吳昌根) 5 〃 손사천(孫士千) 15 구포동 230 나치국(羅致國) 6 숭인동 294 강원돌(姜元乭) 16 서인동 305 이성호(李聖鎬) 7 숭인동 295 지인구(池仁九) 17 연지동 160 임석출(林錫出) 8 구포동 204 장세만(張世萬) 18 연지동 200 박종철(朴宗喆) 9 구포동 205 문창남(文昌男) 19 명륜동 134 김장?(金長?)
10 〃 김만수(金萬壽) 20 〃 김천용(金千用)
[표 4-2]『안성대관』에 기록된 1950년경 안성 연죽점 현황 20 ~ 30여점의 유기점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된다.
한편 유철로 수저를 만드는 시장(匙匠)들은 전통적으로 유기점과 따로 시점(匙店)을 운영하였는데, 공장 명칭은 특별히 없었지만 해방 후 안성에 는 기록에 전하는 것만 해도 인지동에 김기식(金起植), 성남동에 김영귀 (金永貴), 봉산동에 김순만(金順萬) 등이 운영하던 시점이 있었다(김태영 1950: 57~58). 그리고 시장들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외에도 서인동에도 김 기환·진춘산·최종옥 등이 운영하던 시점이 있는 등 시저제조업(匙箸製造 業)도 해방 후 상당히 호황을 누렸다(쌍둥이형제 제보).
연죽점(煙竹店)의 경우 『안성대관』의 기록에는 숭인동에 7곳, 구포동에 8곳 이외 시내에 4곳 해서 모두 20곳이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안성 시내 노인들의 제보에 의하면 연죽제작으로 유명했던 숭인동․구포동 골목에 해 방 후 전성기에는 집집마다 담뱃대 안하는 집이 없어서 연죽점이 숭인동 에만 20여 집이 넘게 있었다고 한다.(숭인동 거주 노인들 제보) 이렇게 볼 때 안성 전체에 연죽점이 20여 곳 이상 있었을 것으로 보여 해방 후 안성의 연죽제조업 역시 유기점에 못지않은 호황을 누렸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렇게 유기가 호황을 누리던 상황은 안성뿐만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으 로 “하여튼 곳곳이 해방 후에 없는 곳이 없었다” 할 정도로 유기업이 성 행하였다. 안성 인근지역인 장호원에도 유기점이 4 ~ 5 곳 있었고, 평택에 도 유기점이 있었다(유기장 J씨 제보). 또 1970년대 말 ~ 80년대 경까지 징장 을 포함하여 유기장들이 남아 있었던 함양, 김천, 봉화, 순천, 벌교 등에 서도 해방 후 유기업이 상당히 성황을 이루었음을 관련 자료나 노인들의 회고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함양에는 꽃부리 징점을 중심으로 서상 (西上)․서하면(西下面)과 안의면(安義面)에 징점이 40~50여 집이 있었다(징장 A씨 제보) 하니 해방 후 이 지역 방짜 징점의 발달상을 볼 수 있다. 김천 역시도 해방 후 반상기와 꽹과리‧징 등을 제작하던 유기점들이 성행하여 유기전으로 유명했던 황금동에만 대로를 사이에 두고 양 옆으로 유기점이 100여점이 있었다고 한다(충주 유기장 B씨 제보).
봉화에서는 현재까지도 유기업의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봉화 삼계리(三 溪里)에 1840년경부터 유기촌(鍮器村)이 형성되어 1917년부터 1921년까지 제1전성기를 맞이했고, 이어 해방 후 1954년까지 두 번째 전성기를 맞이 했다. 제2전성기라 할 수 있었던 해방 후에는 이 지역에 미군 군수물자인 구리와 주석이 대량으로 유입되어 유기의 재료 공급이 원활하였으며, 전 국 유기수요의 80%를 공급하였다 할 정도의 성황을 누렸다. 이에 따라 당 시 이 지역에는“방 윗목에 紙幣가마니가 나락가마니 쌓이듯이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경북도청 1994) 한다.
이러한 전국적인 유기업 성세의 분위기 속에서 안성출신 유기 점주(店 主) 중 서울에서 유기점을 운영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종로 화신백화점 앞에서 유기점을 운영하던 유흥렬은 그 한 예이다(K씨 제보; 서울역사박 물관 2004: 13~14). 유흥렬은 화신백화점 앞의 유기점 외에 1949년 경 서 울 종로2가 14번지에서 안성유기공업사도 운영하였다(『경향신문』
1949.02.19. 광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