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광 상품 생산과 판매에 의해 맺게 된 안성유기장․유기의 관광과의 인 연은 1970년대 들어 민속촌에서 연행의 형태로 한국 전통 공예품 생산과 정을 직접 보여주는 장인 자체를 관광 상품화하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민속촌 건립은 앞서 언급되었듯이 1965년 “태평양지구관광협(太平洋地區 觀光協, Pacific Area Trevel Association)” 제14차 총회가 서울에서 개최 됨을 계기(『경향신문』1965.3.24.일자 기사)로 관광수입 증대를 위한 문화 재관리국의 태릉(泰陵) 민속촌 건립 계획이 수립되면서 시작되었다.
“문화재관리국은 우리나라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민속촌을 泰陵 육사 앞 동국영구보존재산지 40만여 평에 5개년 계획으로 세우기로 했다. 이 촌 에는 우리나라역사의 상고시대부터 李朝와 현대에 이르기까지 시대별로 집 을 짓고 당시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베틀, 물레방아 등 그 시대에 사용한 기구들을 사용하며 지내게 한다는 것이다. 또 이 지역에는 생활이 곤궁한 인간문화재를 이주시켜 민속품 등을 만들게 하여 관광객에게 팔게 할 예정 이다.”
(『경향신문』1965.3.20. 기사)
이후 1972년 수립된 “관광진흥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73년 ~ 74년
사이 서울 근교 곳곳에 관광민속촌을 설립하고, “우리나라의 문화생활, 풍습, 예술, 오락, 음악, 토산품, 운동(運動) 등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시 설”을 갖추기로 했다(『매일경제』1972.11.09.일자 기사).
용인 민속촌은 이러한 정책 하에 민간자본 7억7천만원과 정부보조 6억8 천만원을 들여 1973년 8월에 착공하여 1974년 10월 개관했다. 그리고 용 인 민속촌뿐만 아니라 1975년 교통부 주관 하에 국제관광단지로 개발 중 인 경주 보문(普門)지구와 제주도 중문(中文)지구에도 각각 20억원을 들여 1981년 개관을 목표로 신라촌(新羅村)과 탐라촌(耽羅村) 건립 계획이 세워 졌다(『경향신문』1975.02.14. 기사). 또한 1976년에는 경상북도에 의해 5천5 백만원을 들여 안동 댐 수몰지구 문화재를 안동댐 인근에 민속촌을 조성 하여 보존하는 방안이 세워졌다(『매일경제』1976.09.04.일자 기사). 이렇게 1970년대 민속촌 건립 붐에 의해 이들 민속촌이 조성되었고, 1980년대에 는 낙안읍성마을․안동하회마을․경주양동마을․제주성읍마을 등 각지에서
“민속마을”이 문화재로 지정되며, 특별할 것 없이 살아오던 마을주민들 이 자신이 살고 있는 마을․집과 함께 관광상품이 되었다.
용인 민속촌은 지속적으로 한옥 및 초가를 옮겨와 토속마을을 재현하고, 각종 전통문화 행사, 공예촌 조성을 통해 “대한민국의 역사와 전통의 토 대 위에 전통문화의 새로운 가치와 의미를 창조”(한국민속촌 브랜드 소 개http://www.koreanfolk.co.kr 2014.01.02. 접속)한다는 비전을 갖고 운영 되어 왔다. 안성 K씨 유기점은 민속촌이 생기자 1970년대 말 공예촌에 제작과정 연행 및 상품 판매를 조건으로 입점했다. 초기에는 안성 공장에 서 생산한 유기를 판매하면서 K씨 유기점의 장인들이 와서 관람객들에게 제작과정을 보여주었다. 당시 민속촌 공방은 유기 판매가 무척 잘 되어서 굉장한 호황이었다. 그러나 공방을 운영한지 2년 정도 되자 민속촌 측에 서 직영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그곳에서 만든 것만 판매하기를 요구하였 다. 민속촌 공방은 장소가 협소하여 주물공정은 작업이 어려웠고, 가질 정도만 가능하였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직접 생산한 상품을 판매해서는 유지하기 힘들어 K씨 유기점은 민속촌 공방을 그만두게 되었다. K씨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이었던 이 시기 K씨 유기점은 민속촌에서의 공
방운영을 통해 경제적으로 상당한 도움을 얻었다(유기장 Ks씨 제보). 한편 이 시기부터 안성 유기장들은 단순 기술자가 아닌 유기제작 과정을 연행 하고, 관광객들의 체험을 도와주며, 기념촬영의 대상이 되는 관광 상품으 로서의 정체성을 갖게 되었다.
K씨 유기점이 운영하던 민속촌 유기점은 이어서 안성 장인들이 민속촌 의 직원이 되어 운영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민속촌 유기 공방에서는 관광 객을 위한 연행을 위해 “고유성의 무대화”(딘 맥켄널 1986/1973)에 적합 한 과정으로 수저제작이 선택되었다. 수저는 유기에 비해 크기가 작아 적 은 인원으로 협소한 장소에서 제작의 전 과정을 보여주기에 적합한 것이 었다. 이에 따라 민속촌 공방에서는 1980년대 초부터 수저만 제작하게 되 었고, 관광 공예품을 비롯한 여타의 유기 상품들은 G씨의 안성전통유기 등 타 유기점에서 제작하여 공급하였다(유기장 G씨; 쌍둥이 형제 제보).
1982년 민속촌 유기점에서는 “불무장에 유덕렬, 대장 오인주(65세), 부 질대장 김재근(63세), 가질대장 김정환(54세)”(芮庸海․金鍾太 1982:
207~210)이 수저 제작과정을 연행했다. 이 중 김정환은 안성출신 시장(匙 匠)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 이후 안성출신 주물대장인 남상진과 함께 민속촌에서 주물방법으로 수저를 제작하였다. 1980년대 중반 경에는 남상 진이 그만 두자 다시 안성 주물대장 이상덕과 함께 수저 제작을 했다. 그 리고 1999년 이상덕은 민속촌 측의 추천으로 한국산업인력공단에서 선정 한 기능전승자가 되었다(『경향신문』1999.10.29. 기사; 유기장 G씨, 쌍둥이 형제 제보). 그러나 기능전승자가 된 후 이상덕이 바로 사망하였고, 이어 김정환도 사망하여 유기 공방에서 일할 장인이 필요하게 되자 수저 제작 으로 유명했던 안성 출신 쌍둥이 형제는 민속촌에서 일할 것을 제안 받 는다(유기장 G씨, 쌍둥이 형제 제보).
쌍둥이 형제는 19세경이었던 1950년대 초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생계 수단으로 작은아버지의 숟가락 공장에서 잔심부름을 하며, 시장(匙匠)의 길에 들어섰다. 전통적인 수저 제작과정에서 장인은 크게 큰 망치를 들고 메질을 하는 일명 “망치대장”이라고 하는 “무디대장”과 제작 전반 기술을 익혀 화로 옆에서 한 손에는 집게로 수저를 잡고 다른 손에는 작
은 망치를 잡고 모양을 다듬으며 메질을 하는 ‘집게대장’, 가질을 담당 하는 ‘가질대장’으로 나뉜다. 처음 시장(匙匠)으로 입문하여 익히는 기 술은 가질이다. 가질대장으로 3-5년 일하며, 눈썰미가 있는 사람은 망치 대장이 없는 틈을 타서 틈틈이 망치를 잡고 기술을 익혀 ‘아랫대장’이 라 하는 ‘무디대장’이 된다. 이후 더 기술을 익힌 사람은 수저 제작 전 반을 총괄하는 집게대장이 된다(쌍둥이 형제 제보).
【쌍둥이 형제 방짜 숟가락 제작과정 및 장인별 역할】
① 용해 : 도가니에 구리와 주석을 16:4.5 비율로 넣어 화덕에서 용해한다.
연료는 석탄을 사용하며, 용해는 ‘무디대장’이 담당한다.
② 무질가락 만들기 : 용해된 쇳물을 물판에 부어 숟가락 모양이 될 쇳덩어 리인 ‘무질가락’을 만든다. 무디대장은 도가니를 들고 “곱돌판”에 쇳물을 붓고, 집게대장은 쇳물이 “곱돌판”의 거푸집 안에 제대로 들어가도록 꼬챙이 모양의 “오비총”을 들고 조절한다.
③ 총무디 만들기 : 숟가락 손잡이를 1차로 쳐서 길게 늘리는 작업이다.
한번 치고 불에 달궈서 다시 친다. 집게 대장이 불 옆에 앉아서 쇠가 달궈진 정도를 보고 꺼내어 무디대장과 함께 쳐서 늘린다.
④ 초바닥 치기 : 숟가락 바닥을 1차로 넓게 펴는 작업이다. 무디대장이 쳐 서 쇠를 늘리고, 집게대장은 쇠를 같이 늘리면서 모양을 다듬는다.
⑤ 총메싸기 : 숟가락 손잡이를 최종적으로 늘리고 모양을 다듬는 작업이다.
⑥ 뽀갬질 : 숟가락 두 개를 합하여 바닥을 2차로 넓히는 작업이다. 집게대 장 옆에서 작업하던 무디대장은 마주보는 자리로 이동하여 작업한다.
⑦ 다듬질 : 숟가락 초바닥을 편편하게 만들어 주는 과정이다. 이 작업부터 는 집게대장 혼자 진행한다.
⑧ 우금질 : 초바닥을 숟가락 모양의 틀인 우금돌에 대고 오목한 바닥모양 을 잡는 작업이다.
⑨ 담금질 : 완성된 수저의 유연성과 강도를 높이기 위해 간수에 담근 후 다 시 불에 달구어 맹물에 넣는 열처리 과정이다.
⑩ 벼름질 : 숟가락 표면의 망치자국 등을 곱게 펴서 모양을 다듬는 작업이 다. 벼름질은 무디대장도 같이 한다.
⑪ 가질 : 검은 쇠의 겉면의 거친 부분을 깎아 내고 황금색의 고운 수저를 만드는 작업이다.
이들은 안성에서 가질대장으로 4년여 일하다 무디대장으로 충주, 수원, 서울, 대천, 대구 등 전국 공장을 돌며 일했다. 쌍둥이형제의 형은 수원에 서 처음 무디대장을 시작해 3년여 일했고, 이후 예산에서 2년 정도 일하 다가 일 잘한다는 평이 나면서 서울까지 가서 일을 하게 되었다.156) 그는 기술이 좋았을 뿐 아니라 생산량도 다른 사람의 두 배 이상 되었다. 숟가 락 제작은 보통 무디대장과 집게대장 2명이 새벽 3시경부터 오후 6시경 까지 하루 동안 200여개 정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데, 쌍둥이 형제의 형 은 새벽 4시부터 오후 4시경까지 일을 해서 하루에 500여개 정도를 만들 어 당시 “대한민국에서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할 정도로 기술력을 인 정받았다(위와 같음).
쌍둥이 형제는 서울에서 일하다 1960년대 초 시장(匙匠)이었던 큰형(1925 년 경 생)이 안성에 시점(匙店)을 내게 되어 안성으로 다시 왔다. 그러나 스테인리스가 나오고 유기가 잘 팔리지 않게 되자 30세경이었던 1960년 대 중반 삼형제는 모두 시장의 길을 접었다. 이 때 쌍둥이 형제는 전업하 여 형님은 조적, 동생은 미장일을 10여년 했다. 이후 이들은 1979년 경주 보문단지 공예촌에서 다시 시장의 길을 재개했다. 그러나 이제 이들은 생 산만 담당하는 단순 장인이 아닌 일정한 숫자만큼 수저를 생산해야 하는 생산자와 제작과정 연행을 겸하는 관광 상품인 장인이 되었다(위와 같 음). 이들은 경주에서 3년 정도 일하다 1980년대 초 안성 K씨 유기공장으 로 오게 되었다. 그러나 얼마 되지 않아 수공 방짜기법의 낮은 생산성 문 제로 일을 그만두게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이 민속촌에서는 1990년대 초반부터 7년여에 걸쳐 지속적 으로 쌍둥이형제에게 민속촌 유기 공방에서 일할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이들은 월급이 적어 이를 수락하지 않다가 월급 조정과정을 거쳐 1999년 경 부터 민속촌 공방에서 일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관광 상품인 시장의 길을 걷고 있다. 민속촌에서 이들의 역할은 관광객들에게 제작과 정을 보여주고 설명해 주며, 기념사진 촬영을 해주는 것이 주요한 역할이
156) 시장도 유기장과 마찬가지로 1960년대 경까지 4일 일하고 장날인 5일째 되는 날 임금 을 지급받았다. 그들이 안성에서 처음 시장의 길로 접어들었을 때 임금은 5일에 쌀 한말 이었는데, 수원에서는 5일 일하고 쌀 두가마니를 벌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