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색 결과가 없습니다.

조선후기 안성수공업의 발달과 장인의 활동상

가. 안성수공업 발달상과 ‘공장(工匠)’층의 형성

조선후기에는 농업과 수공업 생산의 발전, 대동법 실시, 화폐 사용의 확 대 등으로 전국적으로 시장이 확산되었고, 상업도 발전하였다. 조선의 수 공업자는 크게 관청에 소속되어 부역의 형태로 그 소요물품을 제작하던 관장(官匠)과 개인적인 경영을 하던 사장(私匠)으로 나누어진다. 관장들은 중앙 및 지방의 각 관청 장적(匠籍)에 등록되어 관리되었다(『경국대전 經 國大典』「공장전 工匠典」). 그러나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러한 장적제도 (匠籍制度)는 유명무실해졌고, 부역노동은 점차 가포(價布)를 납부하는 제 도로 바뀌어 갔다. 이에 따라 관청에서 일이 있으면 개인수공업자들을 임 금을 주고 고용하게 되었다(『대전통편』「공전」“외공장”; 홍희유 1989: 251~256 재인용). 따라서 장인가포제의 확대와 함께 사장의 활동도 더욱 활발해졌다. 그러나 수공업자들은 여전히 관청부역이나 양반 관료들 의 수탈에서 자유롭지 못하였다. 17세기 저술된『반계수록 磻溪隧錄』에 는 이러한 정황이 잘 드러난다. 당시 한양에서는 장인들은 일정한 세금이 없이 관청부역에 마구 불려가 일을 하고 관청일이라 하여 임금은 적게 받 았다. 지방의 경우에는 더욱 심하여 세를 내는지 여부와 상관없이 기술자 라는 소문이 들리면 관청에서는 강제로 일을 시켰으며, 이를 본받아 양반 들도 함부로 일을 시키고 임금을 제대로 주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따 라서 전업수공업자들은 자신의 기술이 알려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형편이 었다.43) 안성 유기장들 사이에도 ‘유명해지면 망한다’는 계언(戒言)이

43) 「大典 京中工匠 亦有稅 然今 則京中工匠 皆無常稅 而只官有役 則隨聞捉致役之 稱以官 役 少給其價 外方則勿論有稅無稅 直隨所聞 威勒役之而已. 公府旣如此 勢家兩班 又從而 效之 償不當直 是以業工匠者 猶恐其技之聞於人 …」(『磻溪隧錄』 卷之一 “田制” 上 ‘雜 說’ 참조)

있어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게 한다(金泳鎬 1965: 161).

한편 17세기 들어 수공업자들로 구성된 점촌(店村)들이 광범위하게 확산 되어 18세기에는 더욱 더 성행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농민들이 토지에서 이탈하여 수공업자로 전환되는 과정이 진행되었다(홍희유 1989: 257). 점 촌은 1479년부터 문헌에 등장하여44) 17세기 초반부터 점점 그 빈도가 높 아진다. 그리고 이들 중 지방 관리들과 결탁하여 각종 부역을 면제받는

“계방촌 稧房村”이 되는 곳이 점차 많아졌다. 1667년 충청도의 한 유생 은 각 지방에 수철점(水鐵店), 옹점(甕店), 침점(針店) 등 여러 점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군역이나 부역을 피해 점촌으로 밀려들어가고, 지방관들은 이를 오히려 비호하면서 점촌들에서 납부하는 물품들로 사리를 채우고 있는 것을 우려했다(『승정원 일기』 현종 8년 윤 4월 10일 기사).

이러한 현상은 18세기 말에는 일반화 되었는데, 『일성록』정조16년 (1792년) 기사에는 “각 읍에 모두 이교(吏校)들의 계방촌(稧房村)이 있고, 이들은 모두 부촌(富村)으로 부유한 호(戶)가 있는 곳”(『日省錄』 정조16 년(1792년) 9월1일 기사)이라 하여 이와 같은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이후 1795년(정조 19) 호남 암행어사가 올린 장계나45) 1892년(고종29) 전라도 암행어사가 올린 장계의 내용46)을 통해서도 점촌의 계방촌화가 조선말기 일반적인 현상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방촌이 된 이들 점촌은 관료들 과 결탁하여 개인의 이윤추구에 유리하였고, 경제적 입지 또한 강화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안성에도 17세기 초부터 점촌에 대한 기록이 등장한다. 안성 수공업 발 달의 대표적인 품목은 안성맞춤이라는 말을 만들어낼 정도로 유명했던 유 기(鍮器)다. 1614년(광해군 6) 『택당집 澤堂集』 ‘천장잡록 遷葬襍錄’

44) 「竹籬茅店村墟靜」(『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2월 1일 기사)

45) “호남의 도전체에 고을마다 각각 계방촌이니 원당촌(願堂村)이니 하는 것들이 있는데, 관가에 소속되기도 하고 향청(鄕廳)에 소속되기도 하여 해마다 돈을 바치고 온 마을이 부 역을 면제받고 있기 때문에 부유한 집의 건장한 장정들이 종신토록 한가하게 지내고 있 습니다.”(『조선왕조실록』 정조 19년 을묘(1795) 5월22일 기사)

46) “계방촌에서 요포(繇布)를 징수하지 않으니, 계방을 없애고 권세 있는 사람들을 조사하 여 균일하게 나누어 배정하고, 무명값도 시세에 맞춰 조정하고, 불법으로 균역에서 빠진 사람들을 엄히 다스려야 한다.”(『승정원일기』 고종29년 7월 18일 기사 참조)

(「택당선생 별집」제11권 “계산지 啓山志”)에는 천장 과정에서 안성 유 점(鍮店)에 묵었다는 기록이 있다. 택당은 전라도의 고부(古阜)에서 금구현 (金溝縣)47)을 지나 서울로 가는 대로를 따라 삼례역(參禮驛), 은진현(恩津 縣)을 거쳐 천안(天安) 덕경점(德竟店)에 머물고, 직산현(稷山縣)을 지나 안 성(安城)에 도착하여 안성의 유점(鍮店)에서 묵게 된다. 이후 안성 동서로 를 따라 죽산부(竹山府)를 지나 동쪽으로 여주(驪州) 마기곡(馬起谷)을 거 쳐, 지평(砥平)의 백야곡(白鵶谷)으로 가게 된다.

이 기록을 통해 당시 전라도에서 강원도 쪽으로 가는 길은 안성까지 북 쪽으로 올라와서 안성장을 지나 ‘안성시로’로 불리던 안성의 동서로를 이용해 강원도로 이르게 됨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경로를 통해 당 시 안성시장이 전라도와 충청도, 강원도를 아우르는 상권을 갖고 있었음 도 알 수 있다. 그 안성장을 배경으로 안성에는 공장들이 모여들었고, 적 어도 17세기 초에는 유점을 비롯하여 수공업촌인 점촌이 생기기 시작했다.

안성유기와 함께 점촌을 형성하고 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것은 지점(紙 店)이다. 보개면 기좌리를 중심으로 인근 불현리 등에서는 17세기 초부터 각종 종이 생산과 목판인쇄가 발달하였다. 조선 효종4년(1653년) 시헌력 (時憲曆)이 시행된 후 조정에서는 기좌리에 역서(曆書) 간행처를 두고 이 곳에서 생산되는 백지(白紙)를 구매하여 역서를 간행하였다(『동아일보』

1929.07.04. 1931.05.12. 1938.04.12. 1940.06.25. 1940.06.27. 기사). 이에 따라

“매년 역서 인쇄할 때가 되면 동네사람들은 돈더미에 올라앉았고, 장사 꾼이 모여들어 마치 시장과 같이 번화”했다. 기좌리에서 생산되던 종이 의 종류는 “역서인쇄용지(曆書印刷用紙)를 비롯하여 과거(科擧)에 쓰이는 감시명지(鑑試明紙)와 서적인쇄지, 창호지(窓戶紙), 시장지(市場紙), 유물지 (油物紙)”등 이었다(『동아일보』 1929.07.04. 기사). 그리고 기좌리 등지에 서는 역서 뿐 아니라 사서삼경(四書三經) 등 각종 서적을 인쇄하여 판매 함으로 방각본(坊刻本) 생산으로 전국적으로 유명하였다. 종이 제조 및 인 쇄업이 한창 호황을 이어가던 1907년48) 이전 기좌리는 130호에 이르는 마

47) 고부는 현 전라북도 정읍, 금구현은 현 전라북도 김제시 금구면이다.

48) 1907년 8월 대한제국 군대가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 된 후, 의병대장 정주원(鄭周遠)이 이끄는 의병 1천2백여명이 기좌리에서 일병 및 일진회원(一進會員)들과 접전을 벌인 사

을 주민 거의 모두가 종이생산에 종사하였으며, 불현리는 20호에서 100호 에 이르는 가구가 종이제작에 종사하여 지점을 형성하고 있었다(『동아일 보』 1929.07.04., 1931.05.12. 기사).

이렇게 17세기 경 점촌을 형성하며 발달하기 시작한 안성의 수공업은 18 세기 초에 들어서면 본격화되어 안성의 번화함을 이야기하는 문구에는 앞 서 언급되었듯이 안성장의 발달과 함께 “공장(工匠)과 장사꾼이 모여든 다”는 내용이 등장한다(『비변사등록』 숙종 29년 3월 17일 기사; 『택리 지』“팔도총론 八道總論”). 18세기 안성수공업의 발달상은 1790년 이후 수원 신읍(新邑)에 사람들을 모으기 위한 채제공의 제안에 따라 실행되었 던 공장들을 수원으로 불러 모으는 논의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논의 에서 정조는 1791년 수원으로 이주하기를 원하는 안성의 장인(匠人)들에 게 공화(公貨) 2만금을 대여해 주도록 한다. 그러나 정조는 이러한 조치로 안성의 장인들이 수원으로 대거 이주하여 안성이 옛 모습만 같지 못함을 우려했다.49) 또 다음해인 1792년에는 수원으로 이사하는 안성의 지장(紙 匠)들에게 전례에 따라 공화(公貨) 4천 냥을 3년간 무이자로 대여해 주고, 그 이후부터 매년 1/10씩 납부하게 하는 논의를 한다.50) 이러한 전거들을 통해 볼 때 적어도 17세기경에는 안성장을 중심으로 안성에 유장과 지장 등 수공업자들이 활발히 활동하였고, 18세기경에는 도회를 형성할 정도로 발달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안성 수공업의 발달상은 장인세(匠人稅) 수취에서도 확인할 수 있 다. 1794년(정조18)경 작성된『부역실총』에 의하면 전국적으로 흔치 않게 안성에서는 장인세가 수취됐다. 『부역실총』안성편의 ‘본읍봉용질 本邑 捧用秩’ 조항에 의하면 각색 장인 39명에게 매명 당 1냥 2전 씩 해서 총 46냥 8전의 장인세를 징수했다. 그러나 경기도와 충청도를 포함하여 안성

건이 있었다. 이때 기좌리․불현리는 마을이 전소되는 참상을 당했고, 이를 계기로 제지업 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다.(『동아일보』 1929.07.04. 기사)

49) 「傳曰, 近聞安城郡工匠等, 自願挈居水原新邑云, 渠輩子來之願, 不可拒却, 但安城之不如 舊樣, 雖屬 軫念處, …」(『비변사등록』 정조15년 5월 6일 기사)

50) 「司啓曰, 安城紙匠之自願移居於水原新邑者, 以某樣公貨限四千兩貸給, … 紙匠, 卽居一 於工匠, 而前年工匠之來接也, 旣以公貨許貸, 一以勞徠, 一以制産, 今於紙匠之來, 何可不 用已行之例乎, … 及限三年興利資生後, 自乙卯爲始, 以十分一, 逐年備納於本府, …」(『비 변사등록』 정조16년 3월 8일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