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장은 1703년(숙종29년) 3월 17일『비변사등록』기사에 혁파의 대상으 로 처음 등장한다. 당시 흉년이 들어 도둑들이 시장을 중심으로 출몰하였 는데 이를 막기 위해 관문시장 외 모든 시장의 폐쇄를 의논하게 된다. 이 의논 중에 “안성(安城) 일로는 삼남의 요충지로서 공장(工匠)과 장사꾼들 이 모여들고, 이 때문에 도적의 소굴이 되었으니” 무신(武臣)을 수령으로 보내 이를 혁파하자는 내용이다.35) 이를 토대로 볼 때 임진왜란 경 개설된 안성의 장시는 이즈음에 이르러 한창 성황을 이루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안성장에 대한 보다 명확한 기록은 1770년 간행된 『동국문헌비고 東國文獻備考』에 등장하는데, 여기에는 안성장의 명칭 및 위치․개시일 등 이 제시되어 있다. 이 기록에 따르면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 안성에는 읍내장 하나만이 있었다. 『동국문헌비고』에 나타난 안성지역 장시는 다 음과 같다.
안성장이 대장이라는 것은 앞 서 살펴 본대로 18세기 초부터 실록 등 기 록에 등장한다. 앞 서 제시했던 1703년(숙종29) 3월 17일『비변사등록』기 사 외에 1700년대 중반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 擇里志』기록을 통해 서도 안성장의 대장으로서의 면모를 볼 수 있다.
35) 「金構曰, “畿甸賊患, 無處無之, 而其中安城一路, 三南要衝之地, 而工匠簪聚, 商賈輻集, 以此之故, 爲賊淵藪, 此邑爲先, 似當以武臣差送矣」(『비변사등록』 숙종 29년 3월 17일 기사)[출처 : db.history.go.kr](※이후 제시되는 『조선왕조실록』․『비변사등록』 원문 및 번 역문 모두 출처는 같음.)
“안성은 경기와 호서, 해협의 사이에 있어 화물이 모여 쌓이고, 공장과 장 사치가 모여들어 한수 이남의 한 도회가 되었다.”36)
또 1790년(정조14) 수원 신읍(新邑)에 사람들을 모아 번화하게 하는 방법 을 논한 채제공의 방안37)에는 안성을 전주와 더불어 큰 시장으로 직접적 으로 언급하였다.
“사방의 장사치들이 소문을 듣고 구름떼처럼 모여들어서 전주(全州)나 안성 (安城) 못지않은 큰 시장이 형성될 것”
(『조선왕조실록』 정조 14年(1790) 2月 19日 기사)
이러한 기록 외에 안성장이 대장이었던 것은 위 채제공의 제안에서 장사 치들을 모으기 위해 금해야 할 목록으로 제시되었던 장세의 액수를 통해 서도 알 수 있다. 장세는 조선후기 그 징수의 부당함에 대해 지속적인 논 란이 있었지만 결국 혁파되지 못하고 징수하여 지방관아의 재원 등으로 활용되었다.38) 1794년 작성된 『부역실총 賦役實摠』의 기록을 통해 18세
36) 「安城居畿湖海峽之間貨物委輸工賈走集爲漢南都會」(「八道總論」)
37) 이 방안에는 서울의 부자들에게 무이자로 1천 냥을 주어 새 고을에 전방을 짓고 장사를 하게 하는 것이 제시되었으며, 이와 함께 고을 근처에 한 달에 여섯 번 시장을 세우고, 장사를 하게 하되 세를 거두지 않을 것을 제안했다.(『조선왕조실록』 정조 14年(1790) 2 月 19日 기사)
38) 장세의 징수에 대한 논란은 영조대에 자주 제기된다. 영조 즉위년인 1725년에는 ‘시독 관(侍讀官) 황재(黃梓)’가 진휼을 핑계하여 외읍(外邑) 작은 고을의 50~60명이 모이는 장 터에서도 장세를 거두어 반은 진휼을 위해 활용하고, 반은 사용(私用)하는 것의 부당함을 논의하며 장세를 엄금할 것을 건의한다.(『비변사등록』권78 영조 원년 12월 19일 기사) 다음해인 1726년(영조 2)에도 ‘시독관 권적(權)’이 초왕 은(楚王 殷)이 장사꾼에게 세를 받지 않아 사방의 장사꾼들이 그 나라에 모여들어 부자가 된 사례 등을 들어 연해(沿海) 의 선세(船稅)와 외방 장세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이야기하며 이를 금할 것을 청한다.
(『비변사등록』권79 영조2년 5월 9일 기사) 그러나 1727(영조3)년 이후 장세혁파의 어려 움이 지적되며, 지속적으로 장세 징수 요구가 높아졌다. 1727년에는 전 경기감사 이교악 (李喬岳)이 장계를 올려 “장세로 능침(陵寢)의 역(役)이나 칙사의 접대비용으로 사용하였 는데, 장세를 거두지 못하게 됨에 따라 이와 같은 용도를 위해 또 백성들에게 추가 부담 을 주게 되어 민폐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지적하며 장세징수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
(『비변사등록』 영조3년 5월 8일 기사) 이와 관련된 논의에서 “황주와 안성 장이 커서 상 인들에게 거두어들이는 장세는 많지 않으나 그 세액은 상당하여 민역(民役)에 보탬이 됨 이 크다”고 하며, 직접적으로 안성장을 거장(巨場)으로 언급하였다. 아울러 나라 안에 장 세를 수세하는 곳으로 안성, 전주, 황주, 은진을 들고 있어 이들 장은 장세혁파 논의에
지역 장 시 명 장세총액 장 세 규 정
죽산 주천장
290냥 7전 8월~2월 매삭 15냥/3월~7월 매삭 7냥 5전 배관장(排觀場) 8월~2월 매삭 15냥 6전/3월~7월 매삭 7냥 8전
이천 읍내장
122냥 4전 춘하 매삭 4냥 2전 /추동 매삭 6냥 6전 군량장(郡梁場) 춘하 매삭 3냥 6전/추동 매삭 6냥
안성 읍내장 720냥 매삭 60냥
용인
읍내장
216냥
춘하 매삭 4냥 8전/추동 매삭 6냥 김령장(金嶺場) 춘하 매삭 6량/추동 9량
도촌장 춘하 매삭 4냥 2전/추동 매삭 6냥 양성 소사장 103냥 3전 매삭 9냥/5~6월 4냥 3전
직산 151냥 3전 장 3곳 장세
아산 154냥 8전 장 3곳 장세
신창 158냥 4전 장 1곳 장세
은진
39)
1,035냥 1전 8푼 150냥
[표 2-7] 『부역실총』에 나타난 안성 인근장의 장세
기 후반 경에는 전국적으로 장세가 징수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부역실총』에 제시된 안성 인근 장의 장세는 아래와 같다.
이 기록을 통해 볼 때 전국적으로 통일된 장세 규정은 없었고, 각 지역 별 또는 같은 지역에서도 각 장별, 월별로 장세는 차등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기도 지역에서는 안성장이 720냥(兩)으로 경기도 32개 군현 중 장세가 가장 많다. 다음은 죽산이 290냥, 용인이 216냥이며, 여주 167냥 4 전(錢), 과천이 144냥, 양근이 136냥 8전, 이천이 122냥 4전, 광주가 120냥 (성내, 사평, 송파 매삭 10냥)등의 순이다. 아울러 이를 통해 월이나 계절
따라 전국적으로 장세를 징수하지 않을 때에도 공식적으로 그 징수가 가능하였던 18세기 초 대장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때 논의에서 전체는 아니지만 복구하여야 하여야 할 곳에서는 장세를 복구하도록 하여 실질적으로 장세 징수 금지는 철폐된 것으로 보인 다.(『비변사등록』 영조7년 6월21일 기사)
39) 강경장으로 보임
별 차등장세를 적용하였던 다른 지역의 장과 달리 안성장은 매달 동일한 장세를 적용함으로 특정 월이나 계절에 상관없이 늘 성세를 이루었던 실 상을 짐작할 수 있다. 아울러 안성 인근 장의 경우 은진(강경장)의 1,035 냥 1전 8푼을 제외하면 장세액이 안성과 비교하여 현저히 차이 나는 점을 통해 볼 때 안성장과 은진장이 주변장의 중심장으로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던 점 또한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죽산의 주천장이나 배관장이 중 간 장이었고, 나머지 장은 소규모 장이었던 것으로 장세액을 통해 추정할 수 있다.
거장이자 주변장의 중심장으로서 안성장의 모습은 물화의 집산이라는 측 면에 있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안성장의 번화함을 언급한 문헌들에는 안 성장의 대표적인 모습으로 삼남의 요충지와 더불어 물화의 집적(集積)에 대해 거론했다. 1747년(영조23년) 경기어사 이규채는 “안성장에 대해 서 울(都下)보다 커서 물화가 모여 쌓인다”고 하였다.40) 또 같은 날 『승정 원일기』에는 이를 안성장시는 서소문밖 시장41)보다 커서 물화가 모여 쌓 인다고 묘사하였다.42) 1751년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에도 이와 유사 한 표현이 있음은 이미 제시한 바대로 이다. 또 안성의 속담(俚諺)에 “서 울보다 둘이더만히난다(京城보다 二種이 多出한다)”는 말이 있다. 이는 안성시장에서 거래되는 물화가 많아 경성에서 매매되는 물품보다 두 가지 종류가 더 많다는 뜻으로 물산이 집산되는 안성장의 모습을 담은 속담의 존재까지 보여준다.(金台榮 1925: 40) 이러한 조선후기 물화가 집산되던 안 성장의 모습을 알 수 있는 대표적인 자료는 『임원십육지 林園十六志』이 다. 임원십육지의 기록을 토대로 안성인근 장의 거래 물품을 보면 다음과 같다.
40) 「上召京畿御史李奎采, 問所過農形、民隱及守令治否, 奎采歷擧所經郡縣以對, 至安城曰:
“… 本郡場市, 大於都下市肆, 物貨所聚, 群盜所集, 安城之稱賊藪, 蓋以此也。…” 奎采申 前啓, 不允。」(『조선왕조실록』 영조 23년(1747) 12월 18일 기사)
41) 남대문시장의 전신인 칠패(七牌)를 말함.
42) 「… 安城場市, 大於西小門外市, 物貨所聚, 群盜皆集。安城之賊藪, 蓋以此也。…」(『승정 원일기』 영조 23년(1747년) 12월 18일 기사)
지명 장 시 명 거 래 물 품
안성 군내장(郡內場)
미두(米荳), 모맥(麰麥), 지마(脂麻), 수소(水蘇), 면포(綿布), 마 포(麻布), 어염(魚鹽), 조(棗), 율(栗), 이(梨), 시(柿), 유기(鍮器), 철물(鐵物), 사기(沙器), 유기(柳器), 목물(木物), 입자(笠子), 사 립(簑笠), 피혁(皮鞋), 생마(生麻), 인석(茵席), 마석(磨石),침석 (砧石), 목구(木臼), 목반(木盤), 우독(牛犢)
죽산 부내장(府內場)요미(饒米), 두(荳), 모맥(麰麥), 면포(綿布), 면화(棉花), 과물(果 物), 우독(牛犢)
양성 현내장(縣內場)
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조(棗), 율(栗), 이 (梨), 시(柿), 철물(鐵物), 송이(松茸), 목물(木物), 옹기(甕器), 연초 (烟艸)
음죽 장호원장 (長湖院場)
미곡(米穀), 면포(綿布), 어염(魚鹽), 조(棗), 율(栗), 이(梨), 시(柿), 부정(釜鼎), 유기(鍮器), 우독(牛犢)
진위 신장(新場) 미곡(米穀), 면포(綿布), 생계(生雞), 인석(茵席), 연초(烟艸) 양지 개천장(介川場) 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조(棗), 율(栗), 연초(烟艸)
용인 현내장(縣內場)
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조(棗), 율(栗), 이 (梨), 시(柿), 유기(鍮器), 옹기(甕器), 사기(沙器), 유기(柳器), 연초 (烟艸), 우독(牛犢)
수원 부내장(府內場)미곡(米穀), 면포(綿布), 소과(蔬果), 어염(魚鹽), 해대(海帶), 연초 (烟艸), 우독(牛犢)
이천 부내장(府內場)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어염(魚鹽), 과물(果物), 목기 (木器), 옹기(甕器), 우독(牛犢)
여주 주내장(州內場)
미두(米荳), 모맥(麰麥), 면포(綿布), 마포(麻布), 주단(紬緞), 어염(魚 鹽), 해대(海帶), 조(棗), 율(栗), 이(梨), 시(柿), 부정(釜鼎), 목물(木 物), 피물(皮物), 지물(紙物), 사기(沙器), 연초(烟艸), 치계(雉鷄) 광주 성내장(城內場)미곡(米穀), 면포(綿布), 마포(麻布), 율(栗), 이(梨), 이당(飴糖) 어
염(魚鹽), 치계(雉鷄), 사기(沙器), 연초(烟艸), 우독(牛犢) 청주 읍내장(邑內場) 미곡(米穀), 해송자(海松子), 유기(鍮器)
목천 병천장(竝川場) 미두(米荳), 염(塩), 목기(木器), 토기(土器)
전의 읍내장(邑內場) 지황(地黃), 천궁(川芎), 택사(澤瀉), 목향(木香), 향부자(香附子), 유기(柳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