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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인터랙션 퍼포먼스(Interaction Performance)

5.5 센서빌리아(sensibilia)

5.5.1 기억성(memorability)

믿기지 않겠지만 사실이다. 지금 내 혀는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서 쏙 빠져나와 뱃속 어딘가로 들어가 버렸다. 나도 모르게 삼킨 혀는 소화되지 않고 몸 속을 돌아다니며 여기저기 장기에 들러붙어 맛을 보고 있다. (중략) ‘아파.’ 나는 몸 곳곳을 만져보다가 혀가 등허리 부 근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그럼에도 혀 가 자리한 부근에서 조금씩 통증이 느껴졌다. 동시에 눈앞이 아득해 지더니 등허리를 구타당한 일이 떠올랐다.

위는 박화영(2019)의 단편 ‘혀’의 일부이다. 이 소설은 우연한 사고로 삼 켜버린 혀가 몸속 곳곳을 돌아다니며 내장기관의 맛을 전달하고 몸에 각 인된 기억을 불러들여 환청과 환상을 일으킨다는 환타지이다. 이 소설에서 혀는 미각의 수용체이자 기억의 전달자 혹은 매개자라 인식했다. 소설은 환상적 소재로 활용하였지만, 감각이 기억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를 묘사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고장난 에스컬레이터 현상과 같이, 이처럼 감 각은 체득된 기억에 의해 발현된다고 알려져 있다.

철학적 통찰로서 Bergson(2017)은 우리가 대상을 인식[혹은 감지]함에 있 어 동원되는 기억의 기제를 설파하였는데, 고장 난 에스컬레이터 현상에서 의 ‘체득된 경험’과 같은 기억을 상대적으로 단순한 습관기억이라 하고, 이와는 다르게 이미지로서 저장된 기억을 이미지-기억이라고 하였다. 이 이미지는 같은 대상[물질]에 대해서도 많은 층위를 가지고 있어 무한히 팽 창할 수 있는 과거 이미지들을 불러와 주의를 기울여 대상의 뒤에 그리고 대상 자체와 함께 점점 더 깊은 곳에 위치하는 여러 층위를 탐색할 수 있 고(‘주의 깊은 식별’), 어떤 수준의 회로에 의해서 대상을 구성하는가에 따 라 인식의 깊이를 달리한다고 하였다. 그는 기억을 감각 발현의 기제일 뿐 아니라, 제3의 감각으로 인식한다. 감각의 발현에 있어서 기억이 차지하고 있는 역할을 중요한 위치로 포착하고 있는 것이다.

Pallasmaa(2012)는 건축의 요소들이 시각적인 구성단위나 형태(gestalt)가 아닌, 기억과 상호작용하는 조우(encounters), 기억과 마주하는 대치 (confrontation)라 규정함으로써 감각 기억에 의한 연상 작용을 강조하였 다. 이렇게 감각을 통해 기억을 떠올리는 현상을 “프루스트 효과”라 부르 기도 하는데, 이는 프랑스의 소설가 프루스트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 아서”의 1권에 등장하는 기억과 향기의 에피소드에서 유래한다.

감각과 기억의 상호작용은 문학적 은유나 철학적 통찰의 차원만이 아니라 실체적이다. 감각은 기억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뇌의 작용과도 연관 된다. 후각의 예를 보자. 뇌의 후각 담당 영역은 다른 영역보다 일찍 발달 하기 때문에 후각에 있어서 상관 현상은 더 강하게 나타난다고 한다 (Platoni, 2017). 그래서 심지어 후각과 경험의 연결고리가 끊기면 기억을 잃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다. 많은 사례에서 보이듯, 이러한 상관관계와 상 호작용이 알츠하이머병과 같이 기억을 잃는 병의 진단과 치유에 향기요법 이 활용되는 이유이다. 향기요법을 통해 알츠하이머 환자의 기억을 되살리 는 것이다.

감각을 통한 연상 작용은 우리 일상에서 흔히 경험된다. 짠내가 물씬 풍기 는 바다의 냄새나 톡톡 양철 지붕을 두드리는 빗소리는 자연스럽게 그 장 면을 그리게 만들고 우리의 후각과 청각을 자극한다. 감각의 연상이 감성 적 안정상태 혹은 고양된 경험의 상태로 우리를 이끌게 된다. 이것이 ASMR을 들으며 마음의 안정을 찾는 원리이다.

이러한 연유로 감각의 연상 작용은 자주 상업적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매 킨토시 컴퓨터의 부팅 사운드는 만들어진 지 30년이 넘게 지났지만 여전 히 매킨토시 컴퓨터의 아이콘처럼 사용되고 있다. 소리가 매킨토시 컴퓨터

그림 75 기억성 사례 : Motorola Startac(좌)와 Razr(우)

와 관련된 ‘긍정적인’ 사용자의 경험을 불러일으키는 매개로 활용되고 있 는 것이다. 같은 이유로, Motorola는 이전 버전인 스타텍(Startac)이 열릴 때 내는 딸깍하는 소리를 제조 기술이 향상되어 구태여 적용하지 않아도 되었을 후속 레이저(Razr)에서도 일부러 구현하였다(그림). 각인된 힌지 소 리의 청각적 자극이 모토롤라의 ‘긍정적인’ 사용자 경험과 깊이 연관된다 고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소리를 통해 기업이나 제품의 브랜드 긍정적인 브랜드 이미지와 브랜드 경험을 전파하는, 소위 “사운드 브랜딩”의 대표적 인 사례들이다. <그림 75>

매킨토시의 부팅 사운드나 Startac의 힌지 소리가 인터랙션 퍼포먼스에서 청각적 센서빌리아를 기억과 연상의 매체로 활용하여 인터랙션에 대한 감 각적 경험을 증폭한 경우라면, 감각의 기억을 ‘실용적 감성’ 유발의 도구 로 활용한 경우도 있다. 영국의 Rodd Design84)이 개발한 ‘Ode’85)가 그 중 하나이다. ‘Ode’는 일종의 향기 타이머로서 일정 시간이 되면 사용자 가 정해놓은 향기를 내뿜게 되어있다. 그 자체만으로는 어떤 용도인지 의 아할 수 있는데, 사용자가 알츠하이머 환자라면 다르게 와 닿는다. 기억을 잃어가는 기억상실의 병을 앓고 있는 환자에게 향기는 뇌의 그 부분을 자 극하는 좋은 자극제가 된다는 게 그들의 디자인 의도이다. 기억과 연관된 향기의 인터랙션이 이 디자인 퍼포먼스의 핵심이다. ‘Paro’86) 로봇도 비슷

84) https://bit.ly/31zUhup 85) https://bit.ly/3CLgaEe

그림 76 기억성 사례 : Ode(좌), Paro 로봇(우)

한 사례이다. 따뜻한 털이 감싸고 있는 물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이 로봇 은 치료용 반려 로봇이다. 노년의 외로운 사람들에게 벗이 되어줌으로써 심리적인 치료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로봇이다. 이 로봇은 지능 회로와 기 능으로 반려자의 소구를 정확히 해결하는데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촉감과 쓰다듬을 기억하고 반응하는 방식으로 반려자의 감성을 충족하는 데 초점을 맞추었다. 촉감의 감각적 기억을 감성적 인터랙션에 활용한 것 이다. 인텔리전트한 고기능 로봇의 정확하고 정밀한 퍼포먼스보다는 느리 고 일정하지만 따뜻한 감각적인 교감의 퍼포먼스를 목표로 상정하고, 털, 온도와 같은 촉각적 센서빌리아를 적용한 것이다. <그림 76>

이렇게 감각적 연상 작용을 실용적으로 활용한 경우가 있는 반면, 보다 표 현적인 방편으로 활용한 경우도 있다. TU Eindhoven의 Kees Overbeeke 교수팀이 디자인하고 Philip Ross87)에 의해 완성된 변신하는 조명 ‘Fonckel One’88) 조명은 독특한 인터랙션 방식을 가진다. 일반적인 조명처럼 불을 켜고 끄는 단순 조작이 아니라 조명의 등 부분을 손가락 멀티터치로 만지는 것으로 조명의 방향과 빛의 양을 조절하는 인터랙션을 채택하였다. 커피 테이블에 놓이게 될 이 조명을 조절하는 행위는 마치 애 완동물을 쓰다듬는 행위를 연상시킨다. 이는 사실 디자인의 의도가 그대로 드러난 것이다. 애초에 고양이를 안고 쓰다듬는 기억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이 인터랙션의 퍼포먼스를 위해서 멀티 터치와 부

87) https://bit.ly/3pprkJT 88) https://bit.ly/3xVgBKR

그림 77 기억성 사례 : Fonckel One

드럽게 이어진 조명의 넓은 등이 촉각의 센서빌리아로 활용된다. <그림 77>

Misher Traxler Studio89)의 ‘Ephemera(2014)’90)와 Richard Clarkso n91)의 ‘Levitating Cloud Speaker(2014)’92)는 외형적인 연상 요소에 한 정된 것으로 보이지만 이 사례들에서 연상은 단지 인터랙션 퍼포먼스의 시각적 즐거움이 아닌 매우 감각적인 경험으로 전개된다. ‘Ephemera’에 서는 그냥 평평하던 탁자로 사람이 다가서면 그 상단에 풀잎들의 형상을 한 얇은 형태들이 일어선다. 이 얇은 풀잎 형상은 얇은 면 때문에 휘청이 듯 천천히 하나둘 일어서는데 전체가 마치 바람 부는 들판에 풀들이 바람 에 천천히 흔들리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이 바람 들판의 연상은 마치 우 리의 몸에 운동감각적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다. 한편 ‘Cloud Speaker’는 자기현상으로 공중 부양된 블루투스 스피커인데 흘러나오는 음악의 비트 에 따라 구름 형상 사이로 천둥과 번개 같은 빛이 작렬한다. 비트라는 청 각적 센서빌리아의 충격이 귀를 자극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천둥과 번개의 연상은 우리의 몸에 더 증폭된 진동으로 느껴진다. 두 사례는 각각 인간의 오감을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센서빌리아를 전개하고 있지 않지만, 시각적 단서를 통해 우리의 기억과 연상을 자극함으로써 운동감각적 경험을 전달 한다. <그림 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