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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시적 정체와 다저자성(multi-authorship)으로의 은둔 68

로 보존하거나 유통시키기 어려워지며, 나아가 커뮤니티 외부에서 검 색을 통해 찾아내기는 더더욱 어렵다. 커뮤니티 내부에서도 조금만 시일이 지나면 찾기 어려워진다. 계속해서 쌓여가는 게시물들 뒤로 밀려나 버리기 때문에, 나중에 가입한 팬들은 그 글의 존재를 모르는 경우도 많다. 또한 온라인 커뮤니티의 서버가 이전을 하거나 팬 페이 지가 폐쇄될 경우 게시물이 전부 사라지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물론 그 전에 텍스트 파일이나 이미지 파일을 저장해 둔 회원들도 있겠지 만, 이미 원본의 좌표가 사라진 상황에서는 그가 저장한 창작물이 정 확히 어디에서 온 것이며 누가 만든 것인지 입증할 방법은 없다. 2차 창작물도, 그 작가도, 함께 유희에 동참한 커뮤니티가 있었다는 증거 도, 모두 한시적으로만 존재했다가 증발한다.

또한 한 편의 팬픽션을 여러 명의 작가가 합작하는 경우도 있다.

단, 작가들 간에도 익명으로만 소통하는 팬픽션 커뮤니티의 특성 상 물리적으로 같은 공간에 모여 합작하는 경우는 드물고, 전자우편으로 소통하거나 릴레이 픽션(relay fiction)이라는 형식 하에 두 명 이상의 작가들이 한 챕터씩 돌아가며 게시하는 형식으로 제작된다.

다른 예술 분야에서의 합작품도 저자를 어느 한 명으로 지목하기 어렵지만, 릴레이 형식의 팬픽션에서는 단일 저자를 지목하기가 더욱 곤란하다. 작가의 성향이 다를 경우 챕터마다 내용의 전개가 바뀌고, 서술하는 어조도 바뀌며, 의외의 사건이 발생하거나 캐릭터의 심경이 느닷없이 변하기도 한다. 다음 작가가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지 예 측 불가능하다는 점이 릴레이 픽션의 큰 재미이기도 하다. 어차피 유 희로서 시작된 작품이므로 기획 단계부터 통일성이나 일관성은 큰 고 려 대상이 아니었다. 이런 픽션은 각기 다른 판타지의 짜깁기인 동시

에 서로에게 받은 영향이 뒤섞인 것이므로, 정확히 어디서부터 어디 까지가 특정 작가의 영역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물론 전체 작품을 어 느 한 작가에게 귀속시키는 것 역시 불가능에 가깝다.

2. 불명확한 이입대상으로의 은둔

여성향 서브컬쳐를 제작하고 향유하는 주체는 확고하고 단일한 정 체를 형성하지 않고, 작품 안에 정체를 분산시키거나 그마저도 수시 로 증발시킨다. 또한 작품에서 어느 캐릭터에게 이입하고 있는지를 명확하게 제시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순정만화의 경우 인물의 내면을 정교하게 묘사하는 특징이 있으므 로, 여주인공이 이야기의 중심일 때 독자는 그에게 이입하게 되고, 남 성 캐릭터의 심경이 묘사될 때는 그에 이입하게 된다. 주인공이 여러 명일 경우에는 더욱 이입 대상이 분산된다. 이 때문에 여성의 판타지 를 온전히 대변하고 있는 어느 한 인물을 포착하기 어렵다.

이와 같은 현상은 작품 속에 여성 주인공이 없을 때 더욱 복잡하 게 나타난다. 순정만화의 하위장르인 BL(Boys’ Love)만화와 팬픽션 중 상당수는 남성 캐릭터들 간의 연애를 그리고 있다.89) 이러한 작품 에서 여성 작가/독자는 두 남자 주인공 중 더 “여성스러운” 쪽에 이 입해 있는 듯 보일 때도 있고, 더 “남성적인” 쪽에 이입해 관계를 주

89) 미조구치 아키코(溝口 彰子: ?-)에 의하면, BL은 “남성 간의 연애를 중심으로 엮어나가는 이야기로 작가와 독자 대부분이 이성애 여성이다.” 또한 그는 BL이 소녀만화의 큰 틀 안에서 발전한 하위장르임을 만화의 계보를 통해 규명하였다.

미조구치 아키코. 김효진 역. 『BL진화론』. 과천: 이미지프레임, 2018, p.11, pp.24-31 참조.

도하고 있는 듯 보일 때도 있다. 그런가 하면 둘 다와 거리를 두고서 남자들 간의 성애를 관음하는 자리에 있는 듯할 때도 있다. 이 세 가 지 입장을 수시로 돌아다닐 수 있도록 한 것이 BL의 독특한 구조이 다.

일본의 BL만화를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분석한 미조구치 아키코 역시 “하나의 포지션에 100퍼센트 동일화/감정이입하는 독자는 거의 없다”며,90) 조금 더 이입하거나 덜 이입하는 경우는 있어도 언제나 두 캐릭터 및 그들을 바라보는 전지적 시점 세 가지 입장이 동시에 진행중이라고 하였다. 그는 이를 “다중 동일화(multi-identification)”라 고 칭한다.91) 팬픽션이나 BL이 현실 속 동성애자의 이야기가 아닌 것은 확실하나, 여성 주체의 이입처는 다중적이거나 수시로 변하므로, 과연 어디서부터가 여성 자신의 욕망이고 어디서부터가 작품 속 남성 의 욕망인지 구분할 수 없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향 서브컬쳐는 장르도 비주류에 숨어 있으며 작품 안에서 주체의 좌표 역시 흐트러뜨림으로써 은폐한 다. “여자들만 좋아하는” 이런 것들이 있다는 사실을 숨기는 것이 장 르의 은둔이었다면, “이런 것들”을 찾아내더라도 그것을 즐기는 여성 이 그 판타지 안에서 정확히 어디 위치해 있는지 찾을 수 없도록 하 는 것이 주체의 은둔이다.

90) 미조구치 아키코, 위의 책, p. 81.

91) 미조구치 아키코, 위의 책, p. 80-81 참조. 이 책이 한국에 번역된 것은 2018년 8월이고, 본 논문은 2018년 3월부터 공식적으로 진행되었으므로, 여성 주체가 작 품 안에서 분산하여 이입하고 있다는 본 논문의 주장은 미조구치의 이론을 따른 것은 아니다. 미조구치의 이론은 본 논문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였 음을 밝힌다.

제 4 장

주체가 은둔하는 여성향 서브컬쳐의 전복성

여성향 서브컬쳐의 비주류성, 그리고 여성 주체를 색출해 내지 못 하게 하는 이중 은둔은, 몇몇 전복적인 효과를 초래하였다. 일견 무해 한 오락처럼 보이는 순정만화나 2차창작이, 가부장제의 규범을 위배 하는 경험을 제공하게 된 것이다.

제 1 절 여성향 서브컬쳐 장르의 은둔: 외부의 검열자 로부터의 도피

여성향 서브컬쳐가 비주류와 온라인상 익명의 공간에 은둔한 것 은, 외부에서 여성향 서브컬쳐의 내용에 대해 비판이나 교정을 가할 여지를 없앤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여성들은, 현실에서라면 제재를 당했을 상황에 대해 끝까지 상상하고 구체화해 볼 수 있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