였다.
여성적 상상의 산물을 제도권 미술의 공간에 위치시킬 발생하는 어색함이야말로 그림에서 즉각적으로 읽히는 메시지들보다 중요하다.
또는 그 어색함과 불편함 자체가 메시지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러한 경험을 유발시키는 화면을 만들고자, 2015~2016년간에는 그림 속 인물을 마치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모습으로 연출하 였다. 이전까지의 작품에서는 미소년들이 자신들의 역할을 당연하다 는 듯 받아들이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면, 이 시기의 그림 속 남자들 은 그렇게 편안한 모습이 아니다. <Crimson/White(【작품 21】)>와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작품 22】)> 속 인 물의 얼굴은 마치 방금 전까지 울고 있었던 듯 눈두덩이 부어 있고 붉게 상기되어 있다. 그들은 옮아다니는 병과 같은 존재이며 환영받 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 상태가 편안할 리 없다는 상상을 그림에 반 영하였다. 그들이 왜 불편해야만 하는지, 그림 안팎으로 여러 의문을 이끌어 내고자 행한 시도이다.
(【작품 23】)>는 장지에 그린 그림이지만 순지에 작업하듯 연한 채 색을 섬세하게 올린 그림이다. 담채의 투명한 효과는 물론, 미표백 장 지의 색과 질감이 드러나도록 배경을 구성한 후 바탕 채색을 생략하 였다. 한편, <The Flower Duet(【작품 24】)>은 담채 기법을 활용하 되 출판 순정만화의 전형적인 표지를 연상시키도록 하여, 전통 회화 와 장식적 대중미술 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 그림이다.
2014년부터는 담채에 대한 관심과 더불어 먹 색과 먹선을 돋보이 게 하려는 의욕을 갖게 되었다. 이는 유학 시절부터 시작된 회화성에 대한 고민의 연장이었다. 동양화의 안료, 그리고 먹과 종이의 질감으 로 유화나 아크릴화 못지 않은 “회화적(painterly)” 효과를 낼 방법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를 위해 먹의 다양한 색을 도출하고자 아교 포수 전 후의 먹 색이 한 그림에서 대비를 이루도록 그리기도 하였고 (【작품 21】, 【작품 22】), 필선을 활용하기도 하는 등의 실험을 하 였다(【작품 23】가운데 부분의 수석과 재갈 표현).
또한 먹선과 먹 색을 잘 나타내고자, 아교포수를 하지 않은 바탕 에 수묵 효과를 먼저 내고, 그 이후에 아교포수를 하고 마무리하는 실험을 하였다. 처음에는 수묵의 필선과 흑백 출판만화의 느낌만을 혼합하고자 했었다(【작품 25】). 종이는 기존에 사용하던 무표백 2합 장지를 사용하였다.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 (【작품 22】)>는, 인물의 의복과 해골을 아교포수 전에 그리고, 이후 에 아교포수를 한 위에 완성한 그림이다. <Dorian Gray, 1891(【작품 26】)>역시 같은 시도를 더 큰 화면에 실행한 작품이다.
【작품 23】 <La Grande>, 90x145cm, 장지에 채색, 2014.
【작품 24】 <Sous le dôme épais où le blanc jasmine (The Flower Duet)>,
50x50cm, 장지에 채색, 2015.
【작품 25】 <The Musicians>, 45x75.5cm, 장지에 수묵 담채, 2014.
【작품 26】 <Dorian Gray, 1891>, 가변 설치, 장지에 수묵
채색, 2016.
【작품 27】 <Class Trip>, 28x23(cm), 순지에 채색, 2010.
2016년 단행본 『위반의 집』을 출간을 기념하여 서울의 코너아트 스페이스에서 개최한 동명의 개인전에서는 오브제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이기도 하였다. <Crimson/White(【작품 21】)>와 <The Tragedy of Hamlet, Prince of Denmark(【작품 22】)>, <Class Trip(【작품 27】)>은 액자 표면에 큐빅을 일정한 간격으로 붙여 완 성한 작품이다. 그림 속 광경이 쇼윈도 건너편에 격리되어 있는 듯한 인상을 주기 위한 장치이다. 그림 속 장면과 관련이 없는 입체적인 물체가 장벽처럼 시각경험에 개입함으로써, 그림 속 남성이 갇혀 있 는 듯한 느낌을 전달하고자 하였다. 『위반의 집』의 “X군”이 현실로 걸어나오지 못하는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 분명히 보임 으로써 가시성을 획득한 상황을 상상한 결과이다.
제 4 절 동아시아 전통미술의 주제와 퀴어(queer)문화 의 요소 혼용
수묵 담채 기법, 그리고 먹색을 맑게 드러내는 순지를 사용하는 실험이 계속되었고, 필선과 인물을 모두 돋보이게 하는 기법을 완성 하였다. 아울로 퀴어(queer)문화의 요소 역시 도입하기 시작하였다.
1. 가부장적 규범에서 벗어난 신체들
2006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로, 본인의 그림이 퀴어적이라는 평을
듣곤 했다. 작품 안에 남성 신체만 표현되기 때문에 종종 동성성애적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퀴어 미술의 맥락에서 다 루어지는 것은 반가운 일이었으나, 다만 작가인 본인의 성 정체성이 이성애자인 관계로, 몸소 퀴어 미술을 표방할 자격이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나 2018년 현재, 페미니즘과 함께 성 소수자의 권익과 문화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다양한 논의가 활발히 오고가면서, 퀴 어의 범주가 성 정체성을 지시하는 데에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 부장적 젠더 규범에 대한 위반을 모두 아우른다는 인식도 확산되고 있다.144) 그렇다면 가부장제가 지정한 남성성과 여성성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여성향 서브컬쳐의 주체들, 특히 BL 이나 동성애 팬픽션을 소비하는 여성들은 이성애자임에도 분명 퀴어한 존재들이다.
또한 핼버스탐(Judith Halberstam)은 그의 저서 The Queer Art of Failure에서 가부장적 이성애자 남성이 아닌 존재—즉 동성애자나 양성애자 등—이 “실패자”임을 다음과 같이 서술한다. 성공이란 소비 중심적 현대사회의 산물이며,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는 이성애 중심적 관습에 맞추어진 소비체계에 적극 동참하는 의미가 있다는 것이 다.145) 따라서 이러한 시스템에 편승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는 존재들 은 실패자들로 낙인찍힌다고 한다. 이러한 설명에 의거하면, 비단 동 성애자 뿐 아니라 가부장제가 포용하지 못하는 여성향의 주체들 역시
144) 일례로, 박차민정은 일제가 조선에 서구 근대의 성 관념을 이식한 과정을 조사 하며, 이성애중심적 성 규범이 식민지인의 신체를 규제하고 단속하기 위한 도구로 활용되었다고 주장한다. 『조선의 퀴어: 근대의 틈새에 숨은 변태들의 초상』. 서 울: 현실문화연구, 2018 참조.
145) Halberstam, Judith. The Queer Art of Failure. Duke University Press:
Durham and London, 2011 참조.
같은 실패자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들이 구현한 남성 신체들도 마찬 가지이다.
이러한 변화를 반영하여, 2017년 서울의 갤러리 구에서 개최한 5 번째 개인전 <Lords, Poets and Philosophers>에서는 소위 “실패”로 서의 신체인 퀴어한 신체를, 있는 그대로 기리는 그림을 제작하였다.
현실에서라면 환영받지 못할 이러한 존재들이 마치 영생을 누리는 상 서로운 존재들, 즉 군자(lords)나 문인(poets, philosophers), 신선 (immortals)처럼 등장하여, 전통문화가 신성시하던 존재들의 권위를 빼앗아 누리고 있는 장면들이다.
이 시리즈에서는 서양 명화보다는 동아시아의 도석인물화와 같은 화목(畵牧)을 주로 참조하였다. 100호 화판 5개를 가로로 이은 <群仙 圖(The March of the Immortals)(【작품 28】)>는 신선들의 행렬을 그리던 군선도(群仙圖)의 전통을 전유한 그림이며, <抒情(Lyric)(【작 품 8】)>은 어초문답도(漁樵問答圖)의 도상을 바탕으로 한 그림이다.
【작품 28】 <群仙圖(The March of the Immortals)>, 162x650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위반의 집』을 쓰던 시기에 그렸던 남성들의 경우, 자신들의 자 리가 아닌 곳으로 불려나와 불편해 하는 모습이었다면, 이번 시리즈 의 남성들은 여전히 자신들의 자리가 아닌 곳에 있지만, 이를 불편해 하기보다는, 주어지지 않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행동의 의미를 알고, 그 역할 놀이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모습으로 그렸다. 그들을 군자 나 문인 “처럼” 그리지 않고, 그렇게 “분장”한 모습으로 그린 이유이 다. <群仙圖(【작품 28】)>는 마치 가장행렬, 그 중에서도 여장 남자 동성애자들의 드랙 퍼레이드(drag parade)와 같은 분위기가 나도록 연출하였다. 성 소수자의 하위문화와 자주 연관되는 소품들, 즉 과장 된 깃털 장식이나 하네스(harness)등을 참조하였고, 아울러 전통 회화 의 신선도에 자주 등장하는 소품들도 퀴어(queer) 문화에서 온 것처 럼 읽히도록 변형하였다<(【작품 28】의 세부 이미지 【작품 25-2】,
【작품 25-3】, 【작품 25-4】참조). 한편, <情人(The Lover on the Streets)(【작품 10】)>은 여장한 남성 신체를 그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