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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향 서브컬쳐가 남성 문화의 기표에 이상한 의미를 끼워넣었 듯, 본인은 남성 엘리트의 미술인 문인화의 핵심적인 재료기법을 “훔 쳐”왔다. 수묵을 정석적으로 구사했으므로 정통 문인화 기법으로 보 일 수도 있고, 만화적 기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정당한’ 용도와 ‘부 당한’ 용도 양자 모두에 열려”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134) 수묵이 기존처럼 남성 엘리트 문화의 격조로 읽히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 며, 문인화에서 여성들의 문화가 배제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 도록 하던 규범화 과정이 방해된다. 지배 문화를 “자연스러운” 것으 로 만들던 의미화를 거스르는 것은, 헵디지에 의하면, “그 자체만으로 도 ‘침묵하는 다수’를 위반하고, 통일과 응집의 원칙에 도전하며, 합의 의 신화를 반박하는 대화를 향한 몸짓들이며 움직임이다.”

작업이 과연 여성의 시각적 쾌락이나 성적 욕망에 전적으로 부응하기 위해 그려진 것인지는 확언할 수 없다.

[도판 24] 실비아 슬레이, <터키탕(The Turkish Bath)>, 1973.

파커(Rozsika Parker)와 폴록(Griselda Pollock)은 슬레이의 작품을 거론하며, 성 역할을 전환한다고 하여 자동적으로 여성이 시선의 주 체가 되고 남성이 여성의 시선이 되지는 않는다고 하였다.136) 이러한 작품 역시 결국 남성중심적 사회 안에서 감상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 클린(Linda Nochlin) 또한 슬레이의 그림 속 인물이 구체적인 개인의 특성을 포착한 초상화에 가깝기 때문에, 그 몸을 비인격적인 성적 대 상으로 정형화되기 어렵다고 진단한 바 있다.137) 따라서 슬레이는 여

135) Chadwick, Whitney. Women, Art, and Society. Thames and Hudson, 1996, p. 370 참조.

136) 로지카 파커, 그리젤다 폴록. 이영철, 목천균 역. 『여성·미술·이데올로기』.

서울: 시각과 언어, 1995, pp.162-164 참조.

137) Nochlin, Linda. Women, Art and Power and Other Essays. New York:

Harper & Row, 1988, pp.105-106.

성의 성향을 반영한 성적 대상으로서의 남성상을 구성했다기보다는, 남성중심적 명작의 “비현실적인” 여성 신체가 있던 자리를 매우 “현 실적인” 남성의 몸으로 대체함으로써, 남성중심적인 시각문화의 편향 성을 드러내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파커와 폴록 또한 남자 누 드를 그리는 여성 작가들이 “종래의 힘의 관계를 역전시키고, 수동적 이면서 감수성이 예민한 남성과 더불어 예술적으로나 성적으로 능력 있는 여성을 보여주는” 이유가 “남녀의 역할을 바꾸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 누드에 표현된 전통적인 성의 역학관계를 비판하는 데 있다”고 분석하였다.138)

한편, 20여년 뒤에 등장한 엘리자베스 페이튼(Elizabeth Peyton:

1965-)은 남성중심적 시각문화 관습을 비판하보다는 여성향의 탐구에 좀더 집중한 작품을 제작하고 있다. 그는 연예인이나 유명인사, 또는 데이빗 호크니 등 잘 알려진 예술가들까지 미화하여 그린 그림으로 유명하다([도판 25]참조).139) 물론 주변 인물도 그린다. 남자만 그리는 작가는 아니며, 남자 여자 모두 그림의 소재로 삼는다. 그러나 본 논 문에서는 페이튼이 남성을 그리는 방식에 주목하고자 한다. 유명인을 그리든 일반인을 그리든 대개 작가와 매우 친밀한 관계 하에 단 둘이 사적인 공간에 있는 듯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다음과 같은 효과를 창 출한다. 1) 그림 속 남성을 바라보는 여성이 존재하며, 2) 그 여성이 그림 속 남성의 의미를 정의내리는 주체적 위치에 있음을 공고히 하 는 것이다. 즉 저 남자가 “이 여성에게” 어떤 존재인지, “이 여성은”

그를 어떻게 보고 있는지가 전제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그림이

138) 로지카 파커, 그리젤다 폴록. 위의 책, p.164.

139) [도판 25]의 “자비스”는 1990년대말부터 2000년대까지 전성기를 구가하였던 영 국의 인기 가수 자비스 카커(Jarvis Cocker: 1963-)이다.

다.

“이 여성”, 즉 페이튼에게 의미있는 남성은 다음과 같은 모습을 하 고 있다. 젊고 아름다우며, 감각적인 패션으로 신체를 장식할 줄 알 며, 섬세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듯 창백한 얼굴에 사색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 몸매와 자세 역시 유약해 보인다. 이는 남성중심적 시각문화에서 이상적이라고 여기는 건장하고 힘찬 신체가 아니고, 당 시 페이튼을 비롯한 젊은 여성들의 취향이 반영된 바이다. 또한 그들 에 대해 품고 있는 애정의 성격 역시 연예인을 향한 10대 소녀의 선 망과 비슷한 점이 있다. 즉 여성들 특유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는 것 이다.

여성의 취향에 부합하는 남성상을 여성적인 시선으로 보고 다룬다 는 점에서, 페이튼의 작업은 여성향적이라고 볼 수 있다. 비평가 솔츠 (Jerry Saltz)가 그의 그림을 일컬어 “소녀 취향(girlie)”이라 한 것은 정확한 표현이다.140) 유치하고 사소하다고 폄하되던 “소녀 취향”을 페 이튼은 적극적으로 긍정하였고, 나아가 완성도 높은 작품을 제작하는 기반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였다.

여성들의 성향을 멸시할 목적으로 활용되던 어휘가 새로운 맥락으 로 사용될 수 있도록 그 의미를 확장하는 계기도 마련되었다. 흑인과 성적 소수자들이 주류가 자신들을 모욕하고자 만든 용어인 “니거 (nigger)”, “퀴어(queer)”를 오히려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끌어들임으로 써 주류의 억압에 저항하는 용어로 그 의미를 바꾸었듯이,141) “소녀

140) Saltz, Jerry. Seeing Out Loud: The Voice Art Columns: Fall 1998 - Winter 2003. Berkeley: The Figures, 2003, pp. 367-368 참조.

141) 양효실, 『권력에 맞선 상상력, 문화운동 연대기: 차이를 넘어 금기를 깨트린 감각의 목소리와 문화다원주의』. 서울: 시대의창, 2017, p.11 참조.

취향”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의미를 확장하게 된 것이다.

[도판 25] 엘리자베스 페이튼, <자비스(Jarvis)>, 1996.

[도판 26] 엘리자베스 페이튼,

<누드(토니)(Nude(Tony))>, 2001.

또한, 남성 유명인사들을 여성적 취미생활의 대상으로 표현했다는 점 역시 괄목할 만 하다. 페이튼에 의해 남성 영웅들은 “우러러보는”

대상이 아니라 “예뻐해 줄” 대상이 됨으로써 원래의 지위에서 격하되 고, 여성인 작가는 그들보다 열등한 존재의 자리에서 벗어나 동등한, 또는 우월한 자리에 서게 된다.

슬레이의 그림에서 불완전하게 일어났던 여남간 권력 위계의 전복 은, 페이튼의 여성향적 특징에 의해 보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페이튼 은 구체적인 남성을 초상을 그림에도 불구, 그림의 주인공은 그림 속 남성이 아니라 그의 이미지를 여성향적으로 재구성한 여성 작가임이 드러난다. 이는 여성들이 대중문화에서 남성의 이미지를 소비해 온 역사가 쌓인 결과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본인의 작업에서 과거 명 작을 차용할 때 역시, 여남간 역할 전복 그 자체보다는, 남성적 시점 에서 구성되었던 화면을 여성향적으로 변형한다는 맥락에서 이루어진 다. 남성중심적 문화의 성취를 빼앗아 여성들의 즐길 거리로 용도를 변경하려는 취지에서이다. 구체적으로 어떤 작품들을 활용하였는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작품 도판과 함께 설명한다.

이 장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향 서브컬쳐를 통해 보전된 시 선의 주체로서의 여성은 가부장적 규범을 상대적으로 덜 내면화한 여 성이다. 서브컬쳐를 통해 대안적인 서사를 경험하였으므로, 여성을 주 변화하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성향과 욕구에 부합하는 남성상이 당연히 존재해야 할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이를 부정해 오던 고급미술이 불완전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본인의 작업은 그러한 남성상을 여성향에서 찾아와 제시하는 것은 물론, 기존 미술사의 요소들을 다른 맥락에서 활용함으로써 주류에서 지정한 맥락대로 읽히는 것을 방해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들의 하위 문화와 남성중심적 고급예술 간의 위계 구분에도 잡음이 발생하게 된 다.

제 6 장 구성방식에 의한 작품 분류

이 장에서는 앞에서 살펴 본 여성향 서브컬쳐의 이중 은둔의 전복 적 성취들을 내포하는 요소들이 작품 안에서 구현되는 과정을 살펴본 다. 작품의 내용을 구성하는 방식과, 사용한 기법에 따라 분류하였다.

제 1 절 명작의 직접적 참조

초기 작품에서는 잘 알려진 고전 명작의 성 역할을 전복하는 시도 를 하였고, 장지 인물화 기법을 주로 사용하였다. 그 과정을 예시와 함께 설명하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