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대 문인들 사이에서는 남송대 미술의 사실주의적이고 감각적인 특징을 타락한 왕조의 유산으로 여겨 배격하는 경향이 있었다.29) 이 는 작가들로 하여금 남송 이전의 왕조를 참조하게 하는 동기가 되었 다. 전선의 <양귀비상마도권([도판 4])>은 그림의 내용부터 먼 과거 인 당대(唐代)를 가리키고 있다. 침략 왕조에게 나라를 뺏기기 이전의 부강했던 과거이다. 내용 뿐 아니라 형식에 있어서도 당대의 양식이 의식적으로 사용되었다. 배경이 묘사되지 않고 인물들이 가로로 길게 늘어서 있는 단순한 구도는, 깊은 공간감을 표현하는 방식이 개발되 기 이전의 고졸한 구성방식이다. 현종이 타고 있는 흰 말의 표현 역 시 같은 맥락에서 분석된다. 말을 후육(厚肉)하게 표현하기 위해 말의 앞모습을 그릴 때 사용되던 단축법은 송대부터 쓰이지 않았으므로, 이러한 표현은 당대의 고식을 인용하고 있다는 표기로 이해된다.30)
29) Cahill. 위의 책, p.21 참조.
30) Cahill. 위의 책, p.39.
[도판 4] 전선, <양귀비상마도권(楊貴妃上馬圖卷)>, 종이에 수묵 채색, 원대, 29.5x117cm, 미국 프리어 미술관.
전선은 산수화에서도 고식을 활용하였다. <왕희지관아도권([도판 5])>은 당대의 청록산수(靑綠山水)를 참조한 그림이다. 윤곽선을 먼저 그리고 그 안을 안료로 채워 넣는 초보적인 채색방식은 물론, 나무의 도식적 표현, 기러기와 지붕의 어색한 형태까지 그가 표방한 고졸함 을 잘 나타내고 있다. 캐힐은 그가 <부옥산거도권([참고도판 6])>에 서도 먼 과거에 이미 폐기된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고 분석하였다.31) 남송대에 완성된 산수화 기법은 안개와 음영을 사용해 공간의 깊이를 표현하지만, 전선은 그러한 발명이 있기 이전, 경물의 형상과 배치만 으로 공간을 표현하던 10세기 이전의 산수화를 따르고 있다는 것이 다. 전경(前景)이나 원경(遠景)이 없이 중경(中景)에 경물을 가로로 늘 어놓았고, 안개나 수평선도 표현되어 있지 않다. 도식적으로 그려진 산과 나무는 마치 공중에 떠있는 듯이 보인다. 캐힐은 전선과 친분이 있던 조맹부가 관직 생활을 하며 화북지방에서 모아 온 송대 이전의 그림들, 즉 동원(董源: ?-962)이나 거연(巨然: ?-?)의 그림이나 그 모
31) 동원·거연으로 대표되는 오대의 강남산수는, 웅장한 화북산수를 완성한 북송의 곽희(郭熙: 1023-1085)와 범관(范寬: 990-1030) 및 남송 원체화의 근간이 된 마원 (馬遠: 1160-1225)과 하규(夏珪: 1195-1224)의 화풍이 정착한 이래 거의 잊혀진 상태였다. Cahill, 위의 책. p.36.
본을 보고 이와 같은 작품을 제작하였을 것이라고 추측하였다.32)
[도판 5] 전선,
<왕희지관아도권(王羲之觀鵝圖卷)>, 종이에 수묵 채색, 원대, 23.2x92.7cm, 미국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도판 6] 전선, <부옥산거도권(浮玉山居圖卷)>, 종이에 수묵 채색, 원대, 29.5x117cm, 상해 미술관.
32) Cahill, 위의 책. pp.36-37 참조.
<부옥산거도권>은 전선이 은거하던 장소를 그린 그림이지만, 그 는 자연의 실제 모습을 그리려고 한 것이 아니다. 산수라는 소재는 도구일 뿐이며, 그림의 진정한 목적은 산수를 그림으로써 고식을 부 활하려는 것이었다. 그는 당대의 인물화와 청록산수, 그리고 남송대에 는 잊혀진 오대(五代)-북송대의 강남산수를 다양하게 참조하였다.33) 이와 같은 의고주의는, 전선과 같은 시대에 활동하고 더 풍부한 작업 세계를 펼친 조맹부의 작업에서도 본격적으로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