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서 살펴본 여성들이 남성중심적 가치관을 반영한 작품에서 등장 했다면 과연 그 모습 그대로 행복할 수 있었을까? 루다의 “행복”은 결국 몇 년 뒤 “남자들이 좋아하는” 용모와 언행을 내면화하여 “멀쩡 하게 시집 잘 간” 모습으로 표현되었을 것을 쉽게 예상할 수 있다.
타마라는 해모수의 구애를 받아들여 사랑의 기쁨을 알게 되고, 복수 로 가득했던 마음을 고쳐먹었을 것이다. 수민의 어머니는 문제아 자 식을 제대로 교육하지 못했으면서 경찰들 앞에서 큰 소리 치는 “진상 어머니”라는 핀잔을 받았을 것이다. 즉, 기존 질서에 의해 재단당하고 교정되는 과정을 거치거나, 그렇지 않을 경우 악역으로 제시되거나 비극적인 결말을 맞았을 것이다. 그 편이 “현실적인” 결말, 다시 말해
“현실의 상태와 비슷한 결말”이라는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향 창작물에서는 그와 같은 장면을 보여주지 않거나, 다른 결말을 제시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검열할 남성을 상정하지 않고 행동하는 여성들, 성녀/악녀의 프레임은 물론 여타 정형화된 여 성상을 위반하며 자신의 욕망과 의향대로 살아가는 여성들, 가부장제 가 지정한 여성의 자리로 이행하지 않는 여성들이, 작품 안에서 아무 런 단죄를 당하지 않는다.
이는 여성향 서브컬쳐를 향유하는 여성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사실이다. 현실에서 겪는 좌절을 작품 안에서는 되풀이하지 않아도 되며, 오히려 불가능해 보였던 성공을 간접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이 를 통해 가부장제의 요구에 순응하지 않고도 행복한 상태는 어떤 모
습인지를 구체적으로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지점이 순정만화 나 2차 창작물을 “비현실적이다”라는 평가를 듣게 하는 지점이다. 같 은 허구임에도 남성들의 판타지를 다룬 공상과학만화나 에로틱한 소 설에는 그러한 비난이 가해지지 않는데, 유독 여성향에는 “현실성”에 대한 엄격한 잣대가 적용된다. 그만큼 여성향의 “비현실성”은 가부장 제를 거스르는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현실적인” 작품은 가부장적 질서를 거스르는 여성을 좌절시키는 서사를 반복 재생산한다. 이러한 결과를 끊임없이 목격하는 경험은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도록 한다. 일견 자유분방해 보이는 영역인 대중문화 역시 그러한 여성 캐릭터를 처벌함으로써 소비자인 여성을 현 체제에 복속시킨다.
이러한 비극적 결말의 검열 효과는 팬픽션과 성적 판타지를 연구 한 김민정·김훈순의 논문에도 설명되어 있다. “여성이 사회의 기존 질 서에 반하는 욕망을 드러내면 가부장제는 기득권을 보호하기 위하여 여성을 처벌한다. 마녀사냥이 그 대표적인 것으로 대중 매체의 재현 물 역시 자신의 권리를 찾거나 주체적인 여성을 불행하게 만들어 버 림으로써 가부장제를 공고히 한다.”106) BL을 연구한 미조구치 역시 동성애자를 처벌하던 주류 대중문화를 같은 맥락에서 분석한다. 그는 영화의 예를 들어, 동성애자에게 악역을 배정하여 그를 처벌하는 것 이 정의구현처럼 보이게 하는 관습이라든지, 악역이 아니더라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현실 질서에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결 말을 맺던 관습 등을 꼽는다.107) 그는 이러한 전개 일변도에서 벗어
106) 김민정, 김훈순. 「팬픽의 생산과 소비를 통해 본 소녀들의 성 환타지와 정치적 함의」, 『한국언론학보』, 제 48권 3호, 2004.6, p.335.
107) 미조구치 아키코. 앞의 책, pp.277-294 참조.
나 성소수자도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그린 작품이 많아진 지금이 더 진화된 상태라고 평가한다. 이 연구자들은, 전복적인 인물들이 불행해 지는 서사를 단순히 예술적 표현이라고만 보기 어려우며, 관객을 기 존 질서에 순응하도록 하는 기제로서 활용되는 면이 분명 있다고 주 장한다.
그렇다면 전복적인 인물이 불행해지지 않는 전개, 즉 가부장제가
“비현실적”이라고 폄하하는 여성향의 전개는 그 반대의 효과가 있다 고 볼 수 있다. 현실이 어떠하기에 작품 밖에서는 그러한 인물이 행 복할 수 없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독자를 이끌 수 있고, 나아가 그러 한 인물, 가부장제의 질서를 위반하는 여성의 성공을 “비현실적”이라 규정하는 관습 또한 비판적으로 따져볼 수 있다. 여성이 실패하는 것 이 “현실적”이라면, 그러한 “현실”이 타당한 것인지 돌아보는 자리가 바로 이 “비현실”적인 은둔처이다.
이는 환상문학의 효과와도 비슷하다. 계몽주의 이후 사실주의 소 설의 반대편에서 제작되던 환상문학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접근으 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을 담은 세계를 그렸다. 이는 지배 이데 올로기가 그만큼 불완전하다는 증거가 되며, 현 체제에 안주하지 말 고 끊임없이 의심해야 함을 일깨워준다.108)
물론 만화나 팬픽션은 오락을 위해 창작된 것이므로 사회 계몽을 목적으로 설계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안에는 분명 현실에 대한 불 만과, 그 불만을 누그러뜨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표현되어 있기에 전 복적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순정만화에서 가장 비현실적이라고 일
108) 환상문학의 전복적 의의에 대해서는 Jackson, Rosemary. Fantasy: the Literature of Subversion. Methuen, 1981참조
컬어지는 부분, 즉 여성의 판타지를 완벽하게 채워 주는 남자가 완벽 한 사랑을 여성에게 주는 부분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이 가능하 다. 여성의 행복을 남성에게 사랑받는 데에 둔다는 점은 가부장제의 질서에 순응한 것이라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태어날 때부터 가부 장제로부터 완벽하게 자유로운 진공 상태로 존재해 본 적이 없는 젊 은 여성이 제도권 밖의 행복을 상상하기는 어려우며, 그러한 거시적 인 변화를 추구하기 전에 당장 직면하는 작은 불만들을 짚어 내었다 는 점에 의의를 두고자 한다.
순정만화 속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질서를 내면화하지 않았다면, 남성들은 여성 캐릭터를 교정하지 않는다. 이들은 가부장제의 대변인 역할을 하지 않는다. 2000년대에 우스갯소리처럼 회자되던 “순정만화 에서는 여자가 남자 뺨을 때리면 남자가 반하더라”라는 말은 순정만 화의 비현실성을 조롱하는 말이지만, 한편으로는 가부장적 질서에 순 응하지 않은 상태로도 행복(꽃미남의 헌신적인 사랑을 가짐)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순정만화의 서사에 대한 증언이기도 한다. 사회에서 지정한 역할을 수행하지 않고도 남들 못지 않게 행복하고 싶다는 바 람이 만화적으로 과장된 결과가 꽃미남—일반적인 남자도 아닌 꽃미 남에 심지어 재벌, 연예인, 왕자이기까지 한—과의 화려한 사랑으로 표현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