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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와 역사를 서술하는 주체로서의 여성

[도판 20] 이진경, 『사춘기』 연재페이지 중 일부, 원본 재료 및 규격 미상, 1999, ⓒ이진경

이진경은 데뷔 초부터 여성주의 이론과 퀴어이론을 순정만화에 적 용한 작가였다. 그가 『피플』에서 이국적인 가상의 마을을 조성하여 탐험했던 주제들은『사춘기』(1999-)에서 한국의 역사·문화적 조건과 만나 구체화되었다. 제목은 『사춘기』이지만 주인공인 네 명의 여성 은 갓 성년이 된 대학생으로, 1990년대에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성인 으로서의 스스로를 자각해 가는 과정을 담은 만화이다. 단, 작가 본인 이 대학생이던 1990년대 초반을 배경으로 한 작품으로, 연재 시기인 1990년대 말-2000 년대 초반을 기준으로 볼 때는 과거의 이야기이다.

네 여성은 서로 연관이 없거나 느슨한 연결고리를 갖고 있으며, 이야

기는 한 명씩 순차적으로 진행되지 않고 섞여서 연재되었다.

이 중 「심통난 아이, 지영」의 에피소드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학교 2학년인 지영은 가고 싶지 않았던 조인트 MT에 참여하게 된 다. 그 곳에서 운동권(임을 표방하는) 고학번 남학생과 갈등을 빚는 다. 지영은 그를 “열사 취급”하기를 거부하며, 영웅담을 늘어놓거나 여학생들을 비하함으로써 자신이 우월하다고 착각하는 그의 비겁함을 꿰뚫어본다.

이 에피소드의 중심에는 대학 운동권 내에 만연하던 성차별 문제 의 직시와 폭로가 있다.99) 지영은 여자도 “형”으로 불러야 하는 남성 중심적 문화에 따르기를 거부한다. 선후배들이 만나는 자리에서도, 시 작부터 “누가 내 형이냐”며 면전에 대고 따진다([도판 20], [도판 21]

참조).100) “대의”를 위해 여성들도 남자들의 룰에 따르라고 강요하면 서도 정작 남자들과 동등하게 존중하지 않으며 역사의 주변부로 떠밀 던 한국 운동권의 모순적인 면을 지적한 것이다. 김은하에 의하면 1980년대의 혁명 세대는 여성들을 “형제애 공화국”에서 주변화하였 고, “여성성을 부르주아 문화의 징표로 프레임화”함으로써 여성들에 게 “무성”이 되기를 강요하였다.101) 즉 여성은 태생적으로 “열사”가 될 자격이 부족한 존재로 규정하고 배제한 것이다. 이렇듯 “역사적 기억 속에서 삭제”되었던 여성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로 1980년대를 회

99) 김은미는 90년대에 페미니즘 및 소수자이론이 대학가에 소개된 것이 새로운 주 제를 다룬 만화들의 창작 배경이었다고 분석한다. 특히 이미 급진적이던 대학가 의 운동 진영 내에서도 여성운동이 일어나며, 운동권 내의 가부장성과 여성차별 을 강하게 비판하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한다. 김은미. 앞의 글, pp.49-50 참조.

100) 이진경. 「사춘기」10화 조인트 MT ③. 『나인』, 통권 16호, 서울: 서울문화 사, 1999.4. 연재분 일부.

101) 1980년대를 운동권에서 보낸 여성들의 “증언 텍스트”로서의 문학에 대해서는 김은하. 「‘살아남은 자’의 드라마: 여성후일담의 이중적 자아 기획」. 권보드 래 외. 앞의 책, pp.310-339 참조.

고하는 소설이 1990년대에 등장하였고, 「사춘기」에도 공지영의 소 설에 대한 언급이 있으므로, 이진경 역시 이러한 텍스트들을 의식하 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소설들이 사라졌던 여성들을 보이게 했다면, 이진경의 만화는, 1990년대의 여성이 보기에 과거의 남성들이 얼마나 위선적이거나 무력한지를 구체적인 캐릭터들을 통해 가시화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지영의 지적에 선배들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너스레로 웃어넘 기려 해도 지영은 끝까지 대거리를 하고, 결국 그날 밤 체해서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아래는 잠을 못 이루고 고민하는 지영의 독백이다.

“……아마도 난….

수수방관자도, 철저히 내 이익을 챙기는 자도 못되는, 중간에 서 쩔쩔매는 사람 중 하나였을 테니 말야.

당신들의 방법론이 싫다. 하지만 방관할 수도 없다. 어쨌든 당 신들도 최선의 방법을 택했던 것일 테니 비난할 순 없겠지.

……주둥이 탁상공론이 아닌 진짜 물리적인 죽음의 싸움터에 뛰어나갈 용기를 지닌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말이다.

난 쟤들과 다르다며 강 넘어 불구경 하든 건방떨 생각도, 데 모 한 번 참가해놓고 운동가이기라도 했던 듯 떠들고 살 생각 도 없다.

그나마 다행이람 시대를 넘어 태어난 덕에……

……우리 앞에 떨어진 화두가 바뀌었단 점인가? 하지만 문제 거리가 뭐든 해결을 위한 ‘운동’은 언제나 존재하잖아.

……뻔히 보이는 문제점들을 모른 척 할 수 없다면…

스스로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집어내야겠지? 말을 해야겠지?

…바보되는 비참함을 느끼더라도

입을 열어야겠지? …이게 진정한 용기인 거겠지?

……나는 진.심.으.로. 비록 앞에 나서진 못할지라도 내가 믿는 것을 지지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의 지성인이 되고 싶은 거 다.

지금은 방구석에 처박혀 방법을 알지 못하는 혼란스러움에 빠 져 있을지라도…

‘…비겁한 자가 되고 싶지 않은 거야. 절.대.로.’”102)

김은미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해지던 1990년대의 분위기로 인해 만화 역시 개인의 심리 안으로 침잠하는 경향을 띤다고 진단하였으 나,103) 「심통난 아이, 지영」을 볼 때 그러한 “침잠”이 사회와의 연 결고리를 끊기 위한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보다는 사회 참 여에 있어 개인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인식하려는 방편으로 보인다.

지영은 누구보다도 자신이 속한 집단 내의 모순에 예민하며, 구세대 는 보지 못했거나 없는 듯 취급했던 문제를 예리하게 포착하고 심지 어 공개적으로 발언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이 남의 일이 아니라 자신 의 일임을 실감한다. 그는 투쟁 자체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 라, 지금 자신의 자리에서의 투쟁의 방식과 방향은 어떠해야 하는지

102) 이진경. 「사춘기」9화 조인트 MT ②. 『나인』. 서울: 서울문화사, 1999.3, pp.

192-194에서 발췌. 생략한 부분은 ……로 표기하였고, 그 외 문장 부호는 원전의 표기에 따랐다.

103) 김은미. 앞의 글, pp.50-52 참조.

를 주체적으로 고민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영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과정이다. 여성으로서, 약자로 서, 투쟁의 공을 독식하려는 남성들에게 배척당하는 타자로서, “시대 를 넘어 태어난 덕에” 혁명에 투신했던 선배들에게 부채의식을 지녀 야 하는 세대로서의 자각, 그리고 그 자리에서 “나는 과연 어느 쪽”

인지에 대한 끊임없는 고민이 그의 “사춘기”의 핵심이다. 이진경이 이 작품의 부제를 “네 여자 아이의 감정과 경험에 대한 회고록”이라 고 붙인 의미가 여기서 드러난다. 자신들이 처한 특정 시대와 상황이

“여자아이”의 입장에서 어떠했는지, 그 역사를 여성의 입장에서 기술 한 것이다.

또한, 자신들의 모순을 인정하지 못하는 남자 선배를 지영이 “별 주관없이 ‘대학문화’에 취해 살던 자”, “커플로 장구 쳐대는”,104) 나아 가 “병신새끼”라고 멸시한 것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남자 선배는 지 영의 공격에 처음에는 고압적인 어조로 맞받아치다가, 지영이 동요하 지 않으니 이내 태도를 바꾸어 진지하게 대응하지 않고 “똑똑한 언 니”, “맘에 든단 말야”라는 말로 너그러운 체 한다. 자신이 관용을 베 푸는 위치에 있고, 여성이고 어린 지영은 그의 관용을 구해야 하는 상황을 설정하여 이를 공식화하려 드는 것이다([도판 21]).

그러한 역할 지정에 전혀 협조할 생각이 없는 지영의 즉각적 반응 을 표기한 독백은, “이것 봐라?”이다. 이는 철저히 자신보다 아래에 있는 대상을 얕잡아 볼 때 하는 표현이다. 지영은 그를 자신과 대등

104) 지영과 갈등을 빚는 남자 선배는, 지영의 여자 선배 미숙의 짝사랑 상대이다.

그는 미숙의 관심을 즐기면서도 공개적으로 미숙을 타박하고 함부로 대함으로써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한다. 이에 미숙은 반발하기보다는 애교(말투는 투정조이지 만 문제제기가 아닌 애정을 갈구할 목적으로 행하므로)로 응수하여, 타인의 인간 적 호의를 이용해 남성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행태에 동조한다.

한 존재로조차 보고 있지 않으며, 더욱 중요한 점은, 처음에는 조심하 다가 나중에 멸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처음부터 자신의 아래에 놓 고 있었다는 점이다. 지영은 연장자나 남성에 대한 일말의 경외심도 내면화하지 않은 상태이다. 더구나 남자 선배의 도발에 겁먹기는커녕 더욱 찌푸리고, 마치 주제넘는 상대가 덤빈다는 투로 대응한다.

같은 부정적 감정이라도, 두려움이 아래에서 위를 향한다면 깔봄 은 위에서 아래를 향한다. 지영은 남자 선배와의 관계에서 시종일관 그를 깔보는 위치에 있음으로써 성별간 권력차를 내면화한 여성의 자 리로 이행하기를 거부하며, 나이 많은 사람을 자동적으로 존경하는 어린 사람의 자리도 동시에 거부하는 결과를 도출하였다. 동아시아 가부장제가 지영을 “어린 여자”로 호명하는 데 불복종한 것이다.

김혜린의 『북해의 별』(1983)의 여성 캐릭터가 “남자가 자신의 사상에 몸을 던질 때 여자는 그 그늘에서 불행해진다”라고 말한 지 10여년이 지났다.105) 이는 과거의 여성들이 남자 영웅의 들러리 역할 에 머물거나 본인의 욕구를 희생해야 하는 주변인으로서의 운명을 내 면화한 대사라면, 같은 상황에서 날카로운 자의식을 가진 1990년대의 여성 캐릭터는 허울좋은 명분 아래 약자의 고통을 체제 유지의 자양 분 삼는 남성중심적 문화의 민낯을 폭로하고, 나아가 그러한 영웅놀 이를 반성 없이 자행하는 남성들을 일갈한다. 자신을 억압하는 상대 는 물론 그 억압을 정당화하던 문화와 역사마저 통틀어 전부 깔보는 자세를 취하는 여성이 전면에서 서사를 이끈 만화, 나아가 그런 대중 예술 작품은 전례가 없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 여성이 기존 질서

105) 『북해의 별』의 대사는 김은미. 앞의 글, p. 47 에서 재인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