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묵의 주 재료인 지필묵(紙筆墨)은 중국 한(漢)대의 채륜, 진(秦) 대 몽염 등이 처음 발명한 시점부터 지금까지 그 형식에 거의 변화가 없이 사용되는 매체로, 긴 시간 동안 동양화의 특징적인 기법 및 미 의식의 중심에 있었다.131) 특히 사대부 사상을 반영한 예술인 문인화 는 채색이 아닌 수묵을 그 주 재료로 함으로써 타 문화권에는 존재하 지 않는 사의(寫意)적 회화라는 독특한 미술로 발전하였다. 송(宋)대
130) 정신영은 무라카미 다카시 등의 작가들은 서구 근대의 모더니즘에 대한 반발의 맥락에서 오타쿠 문화를 활용한다고 분석하였다. 정신영. 앞의 논문. p.291 참조.
131) 김병종. 『중국회화의 조형의식연구』. 서울:서울대학교출판부, 1989, pp.93-118 참조.
에 탄생하여 원(元)대에 완성된 사의 문인화—또는 남종화(南宗畵), 남화(南畵)—는 조선에도 유입되어 추사 김정희 등이 이를 구사하였 고, 일제 강점기의 화가이자 평론가였던 김용준(金瑢俊, 1904-1967)은 한국 미술의 원류가 남화 및 사군자, 서예에 있음을 주장함으로써 근 대를 거쳐 현대까지 한국 수묵화가 문인화적 성격을 유지하는 데 영 향을 미쳤다.132) 1960~70년대 수묵 추상을 통해 전통 수묵 기법의 현 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낸 묵림회 작가들의 작업 역시 이러한 맥 락에서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다.133)
이렇듯 수묵은 문인화와 주로 결부되는 재료 기법인데, 전통적 으로 문인은 사대부 남성이었으므로 “사의적(寫意的)” 예술에 옮겨진
“뜻(意)” 역시 엘리트 남성의 것이다. 본인은 이러한 역사를 지닌 수 묵 필선과 준(皴)을 순정만화적인 효과선 및 말풍선과 동류로 취급하 였다(【작품 6】, 【작품 7】, 【작품 8】, 【작품 9】, 【작품 10】,
【작품 28】). 인물의 몸과 의습 묘사에 사용된 묘법은 물론 산수화 에서 구사되던 피마준(披麻皴), 부벽준(斧劈皴)도 전유하였다. 문인화 의 대표적인 기법들이 여성들이 좋아하는 사소하고 하찮은 장면을 꾸 미는 데 동원되면서, 사대부 문화의 권위가 오염되는 동시에 여성향 하위문화의 위상이 격상된다.
132) 정형민. 『근현대 한국미술과 ‘동양’ 개념』. 서울: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1.
pp.91-92.
133) 정형민. 위의 책. pp.109-116 참조.
【작품 6】 <Virtue>, 65x193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작품 7】 <The Arrival>, 130x193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작품 8】 <抒情(Lyric)>, 145x90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작품 9】 <The Guardian>, 60x40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작품 10】 <The Lover on the Streets>, 45x38cm, 순지에
수묵 담채, 2017.
여성향 서브컬쳐가 남성 문화의 기표에 이상한 의미를 끼워넣었 듯, 본인은 남성 엘리트의 미술인 문인화의 핵심적인 재료기법을 “훔 쳐”왔다. 수묵을 정석적으로 구사했으므로 정통 문인화 기법으로 보 일 수도 있고, 만화적 기법으로 보일 수도 있다. “‘정당한’ 용도와 ‘부 당한’ 용도 양자 모두에 열려” 있도록 하고자 한 것이다.134) 수묵이 기존처럼 남성 엘리트 문화의 격조로 읽히는 과정에서 잡음이 일어나 며, 문인화에서 여성들의 문화가 배제되는 것이 “자연스럽게” 여겨지 도록 하던 규범화 과정이 방해된다. 지배 문화를 “자연스러운” 것으 로 만들던 의미화를 거스르는 것은, 헵디지에 의하면, “그 자체만으로 도 ‘침묵하는 다수’를 위반하고, 통일과 응집의 원칙에 도전하며, 합의 의 신화를 반박하는 대화를 향한 몸짓들이며 움직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