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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예리의『네 멋대로 해라』(1997)의 주인공인 네 명의 고등학생 중 수민은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사망 이후 실의에 빠진 어머니와 살

97) 이 문단의 인용과 요약은 유시진. 「神明記 vs. Cool Hot 등장인물 비교?」.

『나인』, 통권 11호, 서울: 서울문화사, 1998.10. p. 332 참조. 생략한 부분은

……로 표기하였고, 나머지 문장 부호 및 제목 표기는 원본을 따랐다.

고 있다. 자존심 강한 수민은 이러한 사연을 누구에게도 공개하지 않 고, 외부와의 소통을 최소화한 채 부정적인 태도로 학교생활에 임하 며 이런저런 일탈(수업시간에 몰래 옥상에 올라가 담배를 피우는 정 도)을 한다. 그러던 와중 다른 주인공들인 진원과 호수, 다나를 만나 조금씩 마음을 열게 된다. 수민은 친구들 덕분에 서서히 고통에서 벗 어나다가도, 집에 돌아오면 여전히 망연자실한 어머니 때문에 괴로워 한다. 그러다 결국은 엄마에게 “술 좀 그만 마시고, 예전처럼 예쁘게 하고 앉아서 남들에게 당당하게 말하란 말이야!”라고 소리를 지른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멍한 표정을 한 모습 으로 그 장면이 끝난다.

수민이 간절히 바라던 어머니의 “예쁘고 당당한” 모습은 결국 돌 아오지만, 그 순간은 의외의 상황에서 찾아온다. 어머니가 새로운 배 우자감을 만나게 되어서도 아니고, 종교에 마음을 의탁하여 안정을 찾아서도 아니다. 수민이 의도치 않게 사고에 말려들어 친구들과 경 찰서에 간 날, 서의 연락을 받고 보호자로서 어머니가 찾아왔을 때이 다.

이전의 넋 나간 사람 같은 모습은 흔적도 없이 품위있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등장한 어머니의 언행은 더욱 의외이다. 자식이 문제에 휘 말려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을 받은 어머니를 표현한 전형적인 장면은 대개 황망해하며 경찰들 앞에 읍소하듯 선처를 비는 모습일 것이다.

그러나 수민의 어머니는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듯한 태도는 전혀 보 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딸을 무턱대고 나무라지도 않는다. 대신, 경찰 들을 향해, 어린 학생들이 곤란에 처한 자초지종을 들어보려 하지도 않고 문제아로 낙인찍고 처벌부터 하려는 어른들의 권위주의적인 태

도에 대해 엄중하게 비판한다.

이는 남성중심적 대중문화에서 반복하는 어머니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가부장제는 부모, 특히 여성인 어머니라면 자기 자신의 존 엄을 내팽개칠수록 헌신적이라는 환상을 지속적으로 홍보해 왔다. 자 식의 허물에 대한 죗값은 어머니가 치르고, 자식의 영광을 위해 자아 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 바람직한 어머니상이라고 추켜세웠다. 비슷한 시기 큰 인기를 얻었던 가수 GOD의 히트곡 <어머님께>(1999)의 가 사와 뮤직비디오가 그 전형을 보여준다. 어머니는 음식도 아들에게 양보하고, 아들이 하지도 않은 잘못에 대한 용서를 대신 구하며 빈다.

당시에도 시대착오적이고 신파적이라는 인상을 주던 내용인데, 놀랍 게도 2018년 현재까지도 그 어머니상은 똑같이 반복되고 있다. 남성 작가가 그린 인기 만화 『외모지상주의』(박태준, 2014년부터 네이 버에서 웹툰 형식으로 연재중)에는 그러한 스테레오타입이 더욱 과장 되어 있다. 어머니는 아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다 못해 학대하다시 피 하는 모습이다. 아무거나 먹고 아무거나 입는다. 그리고 그렇게 희 생한 모습은 추한 외모로 표현되어 있다. 남성에게 여성은 성적 대상 이 되거나, 아니면 남성을 위해 스스로를 망가뜨리며 헌신해야만 존 재 가치가 있다는 가부장적 가치관이 반영된 결과이며, 남성 관객들 은 어머니가 비참해질수록 열광하며 그 고통을 소비한다. 그 극에 다 다른 것이 『외모지상주의』에서 만화적 과장까지 곁들여 비천하게 격하된 어머니의 용모이다.

『네 멋대로 해라』는 상기 두 여성상 중 어느 범주에도 들지 않 는 어머니상을 제시하였다. 아름답지만 성적 대상이 아니며, 어머니이 지만 자아를 잃은 용모가 아니다. 그가 “예쁘고 당당할” 필요가 전혀

없는 상황에서 아름답고 권위 있게 등장했다는 사실이 그 증거이다.

자식을 공권력의 그늘에서 빼내려면 예쁜 모습보다는 예전의 넋 나간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더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남자들에게 불쌍한 약자를 구제할 힘이 자신들에게 있다는 듯한 착각을 일으키며 여남간 권력차를 확인시켜 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수민의 어머니는 남자들 앞에서 전혀 저자세를 취하지도 않고, 공권력을 비판하는 장면에서는 마치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꾸지람을 하듯 자못 위엄있기까지 하다.

위엄있는 어머니상이 남성중심적 대중문화에도 없지는 않으나, 대 부분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고압적인 어머니가 아들의 내면을 병들게 하는 식이다.98) 이렇게 아들(남자)보다 강한 권위를 지닌 어머니(여 자)가 그 권위를 악용하는 모습만을 반복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여성 인 어머니에게 권위 자체가 주어지면 안 된다는 인식을 주입시킨다.

이는 비참한 어머니상을 21세기까지 고집스럽게 이어가는 현상과 같 은 맥락에 있다. 표면적으로는 어머니의 고통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 려는 듯 보이지만, 만약 이러한 어머니상을 벗어나려 할 경우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리라는 협박과 짝을 이루어 지속적으로 송출된다.

수민의 어머니는 그러한 인식을 정면으로 위배한 인물이다. 그는 희생하지 않음으로써, 또 스스로를 낮추지 않음으로써 좋은 어머니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그 바탕인 높은 자존감을 드러내는 품위있는 미모는, 남자 경찰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를 보고 있을 딸을 위한 것이다. 결국 수민이 엄마에게 “예쁘게 하고 있으라”던 호

98) 일례로 매튜 본(Matthew Bourne: 1960-)의 현대 발레극 『백조의 호수(Swan Lake)』(1995)를 들 수 있다. 주인공의 어머니는 여왕으로서 아들에게 지나치게 높은 기대를 충족시키도록 강요하며, 아들은 스트레스에 짓눌려 환상으로 도피하 나 결국 비극적인 최후을 맞는다.

소는, 어서 꾸밈노동에 열중하여 남성들의 성적 대상으로 회귀하라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의 심신을 방기하고 학대하는 형태로 표현되던 자아상실 상태에서 벗어나라는 의미였음을 알 수 있다.

그 호소에 응하여, 어머니는 가부장제의 권력에 기생하기 위해서 가 아니라 맞서기 위해 “예쁜” 모습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는 약자 (청소년)의 유무죄 여부를 강자(남자 경찰)가 결정한다는 상황 설정에 도 동조하지 않는다. 이는 여남간 권력차를 내면화하지 않은 모습이 다. 수민의 어머니는 자신의 위엄을 자식을 억압하는 데 쓰지 않고 약자를 보호하고 변호하는 데 사용한다. 이러한 어머니가 딸과 형성 하는 관계는 서로 죄책감을 느끼는 관계가 아니라 동료로서 연대할 수 있는 관계일 것이다.

이 장면은 만화 전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자신의 존엄을 포기하지 않고 가부장적 관습을 내면화하지 않은 어머 니상을 제시함으로써, 기존 대중예술작품이 보여주지 않은 대안적인 어머니상과 모녀관계를 구체적으로 시각화하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 다. 미디어의 주입으로 인해 여성들에겐 오로지 두 가지 역할, 즉 성 적 대상 아니면 비참하게 헌신하는 어머니밖에 없는 줄 알았던 소녀 들에게 새로운 대안이 제시되었다. 이러한 대안은, 주류 문화의 관습 으로부터 자유로운 여성향 만화만의 독자적인 영역이 있었기에 가능 한 결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