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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일민전(逸民傳)」이 은둔을 하나의 사회적 현상으로 규정 하고 그 역사를 처음 기술한 글이라고 소개하였다. 그 이전에도 출사 하지 않는 선택으로서의 은둔에 대한 개념은 있었으나, 이를 실천하 는 사람들이 급격히 많아진 것은 중국 전한(前漢)시대로, 「일민전」

이 다루는 부분 역시 이 시대이다. 전한 말 왕망(王莽, BC 45-AD 23)의 폭정이 이어지던 시기, 신변의 위협을 느끼며 무수히 많은 이들 이 관직을 버리고 도피하였다.11) 보신으로서의 은둔은 후한, 삼국시대 와 진(晉)대까지 이어지는 혼란기 내내 지속되었다. 이렇듯 사회의 격 변으로 인해 야기된 눈에 띄는 현상으로서의 은둔이 있은 후, 지식인

10) 유준영, 이종호, 윤진영 공저. 『권력과 은둔: 조선의 은둔문화와 김수증의 곡운 구곡』. 서울: 북코리아, 2010, p.59.

11) 오비 코이치. 앞의 책, pp.30~32.

들은 딱히 생명의 위협을 받지 않는데도 은둔을 처세로 선택하게 되 었다. 즉 정치적 입장을 표명할 선택지가 출사 외에 하나 더 마련된 것이다.

후한대 이전에도 정치계로부터 은둔한 인물들은 있었다. 백이(伯 夷)·숙제(叔夷)와 허유(許由)·소부(巢父)등이다. 특히 군주에 대한 충 절을 지키고자 속세를 등지고 산야에서 생을 마친 백이·숙제는 유가 적 가치를 실천한 인물로, 사회 참여를 지식인의 의무로 여긴 공자도 그들은 칭송하였다.12) 그러나 이러한 인물들은 소수였고, 그들의 은둔 은 일신의 안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생명에 위협이 되는 상황 에 처하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기 위함이었다.

반면 「일민전」은 평화로운 시기에도 속세와 떨어져 지낸 허유·

소부까지 기록에 포함시킨다. 오비는 범엽이 살던 시대에는 지식인들 사이에 노장사상을 바탕으로 한 은둔사상이 스며들고 있었다고 하며, 범엽 역시 그러한 맥락에서 후한대 대거 등장한 은자들을 통해 도가 적 생활태도로서의 은둔을 설정하려 시도했다고 한다.13) 즉 불의 뿐 아니라 인위적인 속세 자체를 멀리하려는 노장사상의 가치를 은둔에 추가한 것이다. 변성규 역시 「일민전」이 허유·소부를 백이·숙제와 동급으로 칭송하는 점에 주목한다.14) 허유·소부는 권력 자체를 혐오 하는 인물들로, 유가적 관점에서 보자면 지식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 을 방기하였다. 그런데도 「일민전」은 이들이 유가적 일민과 동등함

12) 공자는 “일민(逸民)”과 “은자(隱者)”에 구분을 두어, 전자는 자신의 도를 지키기 위해 숨어 사는 괴로움을 마다 않는 지식인으로 칭송하였고, 후자는 일신의 안전 만을 꾀하며 사회를 방기한 인물들로 낮게 평가한다. 공자가 지식인의 처세로서 인정한 은일은, 뜻을 펼칠 환경이 회복될 때까지 수양하며 지내는 “유보적이고 한시적인 은일”이다. 변성규. 앞의 글, pp.83-84.

13) 오비 코이치. 앞의 책, pp.33-34 참조.

14) 변성규. 앞의 글, pp.91-92.

을 공식화함으로써, 이제 유가나 노장을 가리지 않고 은둔이 지식인 이 취할 수 있는 태도 중의 하나로 중국 문화의 체제에 자리잡았음을 증명했다는 것이다.

은둔은 도가적 관점에서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형태였다. 장자는 현실의 물질적·육체적 욕망과 편벽된 지식이 인간의 정신을 구속한다 고 보았으며,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대도(大道)와 일체가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5) 물아일체(物我一體)의 경지에 들면 생사는 물론이고 시공의 제약까지 초월할 수 있다는 노장사상에 경도된 인물들이 불로 장생을 추구하는 모습은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유가적 은둔이 일단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물러나 결국 다시 나 갈 준비를 위한 처세였다면, 도가에서 추구한 은둔은 속세를 완전히 초탈하는 것이었다.16)

도가적 은둔을 실천한 대표적인 인물로는 흔히 죽림칠현(竹林七 賢)이 거론된다. 위(魏)·진(晉)시대에 속세를 떠나 대나무 숲에 모여 거문고와 술과 청담(淸談)을 즐겼다고 알려진 완적(阮籍), 혜강(嵆康), 산도(山濤), 상수(向秀), 유령(劉伶), 완함(阮咸), 왕융(王戎) 7인이 그 들이다. 그러나 이들의 행적을 살펴보면, 결코 속세를 완전히 떠나지 도 못했고 편안한 전원생활을 하지도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산도와 왕융은 당시 사마씨 정권에 출사하였고, 완적과 혜강은 결국 정쟁에 희생되었다. 이들의 은둔은 그들이 표방했던 도가적 삶의 방식이 되 지 못했다. 일부러 유가적 규율을 위반하는 기행을 일삼음으로써 제 도권의 견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였던 처세술이었다.17)

15) 한흥섭. 『장자의 예술 정신』. 서울: 서광사, 1999, pp.100, 178, 182 참조.

16) 심우영. 「죽림칠현의 은일관 연구 1- 완적편」. 『어문학연구』, 제 3 권, 상명 대학교 어문학연구소, 1995.2, p.419 참조.

당대에 이르러서는 초기부터 말기까지 전반적으로 은일을 숭상하 며, 은자(隱者)를 고상한 사람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18) 다 만 은둔을 택하는 현실적인 계기가, 당 초기에는 일시적인 위안을 얻 기 위해서, 또는 고상한 인품의 소유자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고, 성당시기에는 쉽게 관직에 오르기 위한 것이었다.19) 중당시기에는 안 사의 난 등 사회적 혼란을 피해 은둔하거나, 백거이(白居易, 772-846) 를 따라 반관반은(半官半隱), 즉 관직에 있으면서 은둔하는 절충적인 중은(中隱), 이은(吏隱)이 유행하였고, 만당에 이르러서는 정치적으로 부패한 환경에서 벗어나기 위한 현실적 처세로서의 은둔이 행해졌다.

물론 시대적 상황과 관계없이 개인적인 이유에 의해 정치생활을 하기 곤란해졌을 때 은둔을 택하는 일도 후한대 이후로 자리잡혀 있 었다. 변성규는 동아시아의 정치인들이 공직에서 좌절을 겪을 때 은 둔, 특히 도가적 가치를 좇는 은둔은 패배감을 위로해주는 기제라고 하며, 이들은 출사와 동시에 은일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20)

특히 출사한 상태에서 은둔하는 개념은 동아시아 특유의 것이다.

속세와 떨어지지 않고도 마음으로 은자의 태도를 유지하는 것으로, 오히려 몸이 속세에 있는 상태에서 은일하는 것이 더욱 어렵고 바람 직한 것으로 여겨졌다. 육조시대부터 은자의 종류를 대은(大隱), 중은

17) 죽림칠현의 은일에 대해서는 심우영. 「죽림칠현의 은일관 연구 2- 혜강 및 기 타 5인편」. 『어문학연구연구』, 제 4 권, 상명대학교 어문학연구소, 1996, pp.765-766 참조.

18) 당대 은일의 시기별 양상에 관해서는 최우석. 「문학과 문화: 만당 시가(晩唐 詩 歌)속의 은일 특색 고찰」. 『동양문화연구』, 제 19집, 2014, pp.245-250 참조.

19) “종남첩경(終南捷徑—종남산에 들어가 은자 노릇을 하는 것이 벼슬을 얻는 첩경 이다)”이라는 표현에서처럼, 성당시기부터 은일생활을 통해 인품과 능력에 대한 명성을 얻어 등용되고자 하는 양상이 있었다. “당말 기간 중에 은둔의 경험을 가 지고 있는 시인은 총 36명이 있으며, 이 가운데…… 26명은 관직에 나아가기 전 에 은일을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밝히고 있다.” 최우석. 위의 글, p.247 참조.

20) 변성규. 앞의 글, pp.81-82.

(中隱), 소은(小隱)으로 나누어, 관직에 있으면서도 그 뜻은 은일하듯 멀리 고고한 곳에 두는 은사를 대은 또는 조은(朝隱)이나 관은(官隱), 시장에서 장사를 하며 지내는 은사를 중은 또는 시은(市隱), 산야에 숨어 사는 은사를 소은(小隱)이라 한 분류가 있었다. 앞서 언급한 백 거이의 중은 역시 이러한 개념을 반영한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은둔은 항상 현실에의 개입을 전제 로 하고 행해졌다. 속세와의 연결을 완전히 끊고 인간 사회에서 잊혀 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은둔을 통해 현실에 대한 불만이나 의견을 표 현하고 전달할 목적 하에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