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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부장제의 공격 무력화: 검열자의 시선 교란

고 있다. 다른 만화가들의 여성 캐릭터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소년만 화에서는 여성 캐릭터들의 가슴과 엉덩이를 강조하는 데 비해 순정만 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대개 마른 몸으로 표현되며, 신체의 굴곡을 보 여주더라도 입고 있는 의상을 돋보이게 하는 선에서 그친다. 즉 여성 은 성적으로 대상화하지 않고, 남성만 그렇게 하겠다는 의도이다.

상기 세 작품에서처럼 스토리상 남성이 성적 매력을 발산할 뚜렷한 이유가 없는데도 그들의 신체를 두드러지게 연출하는 경향이, 남성향 에는 없는 여성향 순정만화의 특징이다.

그렇다면 이 남성 캐릭터들은 누구를 위해 신체를 노출하는 것인 지에 대한 의문이 들게 된다. 물론 작품 밖의 독자를 위해서라는 즉 각적인 답이 나올 것이다. 그런데 작품 밖의 독자는 분명 작품 안의 여성 캐릭터에게 이입하고 있다. 스토리가 여성 캐릭터의 시점에서 진행되며, 특히 『신명기』의 타마라는 단일 주인공으로서, 억압당하 는 여성들을 대변하는 동시에 현실의 여성들을 대신해 체제를 파괴하 는 카타르시스를 안겨 줄 명백한 이입 대상이다. 하지만 타마라는 물 론 다수의 여성 캐릭터는 남성 캐릭터들을 성적 대상으로 보지 않는 다. 그렇다면 캐릭터에 이입한 여성 독자 역시 남자들을 성적으로 보 고 있지 않는 것이지 않은가? 하지만 남자 캐릭터들은 분명 여성에게 성적으로 보일 것을 염두에 두고 묘사되어 있다. 그들의 신체적 특징 은 분명 여성적 취향을 전적으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 안의 여성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작품 밖의 여성을 위해서일 텐데, 작품 밖 의 여성은 작품 안의 여성과 동일시되도록 구조가 짜여 있다.

이렇게 성적 시선의 주체를 찾으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안착하지 못하고 작품 밖과 안에서 도돌이표를 돌게 된다. 시선의 주체로서의

115) 일본에서는 순정만화의 범주 안에서 성애 위주의 내용을 다루는 “틴즈 러브 (teens’ love)”나 “레디코미(ladies’ comics)”라는 하위 장르가 있다. 김효진. 「여 성향 만화장르로서 틴즈 러브(Teens’ Love) 만화의 가능성-후유모리 유키코의 작품을 중심으로-」. 『일본연구』, 제 73 권,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2017.9, pp.33-59 참조.

한편, 한국에서도 1990년대 중반 성인들을 타겟으로 한 “레이디 코믹”이 시도 된 적이 있었으나 큰 반향을 이끌어내지는 못했다.

여성은 작품 안에서도 밖에서도 완전히 잡히지 않으며, 안팎을 오가 거나 동시에 분산해 있는 것이다. 이렇게 여성 캐릭터는 여성 독자의 이입처인 동시에 가림막이 된다. 멋진 용모의 남성들과 같은 세계에 지내는 듯한 체험을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남성을 성적으로 대상화 한다는 혐의가 가해질 경우 그런 적 없다고 반박할 수 있는 증거이기 도 하다. 물론 그 뒤에 숨어서 자유롭게 남성의 몸을 즐길 수 있게 하는 장치도 된다.

이처럼 순정만화는 여성을 단속하려는 시도로부터 여성 주체를 끊 임없이 숨겨 주는 구조를 만들어 내었다. 이러한 은둔을 통해 여성들 은 자신들의 성향과 욕망을 자유롭게 탐험하고 시각화하여 독특한 여 성향의 남성 신체를 구성할 수 있게 되었다.

작품 안에서 여성 주체를 포착하지 못하도록 하는 전략은 동성애 적 내용을 담은 팬픽션이나 만화에서 더욱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여 성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구성된 남성 신체는 결국 성적인 상황 을 위해 만들어졌음을 부인하기 어렵지만, 여성들이 성적 환상을 표 현하는 것에 대한 가부장제의 검열을 부담스러워 하는 것 역시 사실 이다. 외부에서 직접적인 비판이 가해지지 않더라도, 가부장적 사회에 서 나고 자란 이상 어느 정도 그 규범이 내면화되어 있기 마련이다.

여성들은 주체적인 욕망이 있다는 사실 자체에도 죄책감을 느낄 만큼 검열을 내면화하고 있다.

특히 팬픽션을 읽고 쓰는 10대 소녀들은 이러한 부담을 더 크게 느낀다. 자신들의 욕망이 과연 죄스러워야 할 일인지에 대해 면밀히 비판해 볼 기회가 없었을 뿐더러, 성애적 호기심이 없는 존재처럼 행 동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116) 이러한 상황에서 만약 팬픽션 안에

서 적극적으로 성적 관계를 주도하는 여성이 등장한다면, 그 캐릭터 는 바로 저자인 소녀 자신으로 지목될 것이다. 비록 익명의 온라인 공간에서 자신과 같은 몇몇 소녀팬들끼리만 돌려 보는 팬픽션이라 해 도, 작가인 소녀 자신의 성적 욕망이 투명하게 적발되는 것은 미성년 자에게는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다. 팬픽션 향유층을 인터뷰한 김민정 과 김훈순의 논문에서도 인터뷰이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민망하죠. 내가 이런 생각하는 게 티 날까봐….”117)

“…남자들끼리 나오는 소설은 아, 그런가 보다하고…… 내 입 장에서 상관시켜서 비교해 볼 필요가 없잖아요.”118)

결국 이들은 자신과 동일시될 리 없는 남자의 욕망으로 가장하여 표현하는 방법을 택하게 된다. 자신들이 쓰고 보는 소설임에도 자신 과 상관없는 “남의 일”이라고 발뺌할 수 있는 해법을 고안한 것이다.

인터뷰어들은 그 이유가 10대 소녀들이 성적으로 무지해야 한다는 사 회적 기대를 내면화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였다. 익명성 뒤에 숨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면화한 검열자를 여전히 의식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은 자신이 어디에 이입해 있는지 검열자가 찾을 수 없 도록 복잡한 형태로 은둔한다. 남성들이 주인공인 동성애 서사에서

116) 김민정, 김훈순. 앞의 글, p.332.

117) 김민정, 김훈순. 위의 글, p.344에서 인용.

118) 김민정, 김훈순. 위의 글, p.349에서 인용.

여성 주체는 어느 한 인물에 이입한 채로 머물지 않는다. 앞서 제 3 장의 제 3 절에서 살펴보았듯 두 남성 연인들 중 한 쪽에 이입해 있 기도 하고, 제 3자의(또는 전지적 작가 시점의) 자리에서 그 둘의 연 애를 관음하고 있기도 하다. 이 세 가지 시점을 돌아다니는가 하면, 동시에 세 시점에 분산되어 있기도 하다. 가부장적 검열자가 동성애 팬픽션이나 BL만화 속 성적 판타지를 음란하다고 단죄하려고 해도, 그 판타지의 주인인 여성이 정확히 어디 숨어 있는지는 늘 불확실하 다.

욕망의 주체를 정확히 포착할 수 없으면 공격 역시 불가능하다.

동성애 팬픽션과 BL은 여성 주체가 수시로 좌표를 바꾸거나 동시다 발적으로 혼재하는 식으로 숨을 수 있도록 함으로써, 여성의 욕구를 죄악시하는 가부장제로부터 효과적인 도피처를 제공하였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향 서브컬쳐의 이중 은둔이 검열 자를 끊임없이 교란시킨다는 사실은 두 가지 전복적인 의의를 지닌 다. 1)만약 그 검열자가 외부의 검열자일 경우 공격을 무력화함으로 써 가부장적 질서에 위배되는 컨텐츠의 생산과 유통을 지속할 수 있 게 한다는 점, 그리고 2)만약 그 검열자가 내면화된 검열자일 경우, 그것이 전지적이거나 불가항력의 것이 아니라 얼마든지 속이고 피하 고 골탕먹일 수 있는 존재로 다루어지도록 함으로써 그 권위를 실추 시킨다는 점이다. 이는 대안-현실이 현실의 질서를 놀잇감으로 전환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억압의 기제를 가벼운 것으로 다루게 함으로 써 결국에는 공격하고 타파할 수 있는 것으로까지 여길 수 있게 하는 효과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