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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여성향 서브컬쳐에서 전복적 요소의 회화적 적용

이 장에서는, 여성향 서브컬쳐가 이중 은둔을 통해 구축한 전복성 의 대표적인 요소들을 발췌하여 작업에 적용한 바를 설명한다. 조형 요소와 대안-현실 만들기의 전략을 전통 미술의 요소와 혼용한 과정 을 밝힌다.

제 1 절 여성향 서브컬쳐가 보전한 여성 주체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여성향 서브컬쳐는 가부장제가 지정한 성 역할을 내면화하지 않을 젠더화 유예의 공간을 마련하였고, 검열자의 시선으로부터 도피하여 자유로운 망상을 펼칠 환경을 제공하였다. 본 인의 작품에서 설정하고 있는 여성 주체, 즉 작품을 제작하는 작가 및 작가와 동조할 관람자는 이렇게 가부장제가 “여성”으로 호명하는 데 순응하지 않기 위해 수시로 도피하려는 여성 주체이다.

험을 지니고 있다. 따라서 고급문화에서 당연히 여성의 시선에 봉사 하는 남성 신체가 있을 것을 기대하고 있다.

물론 그러한 기대는 미술사를 살펴보는 순간 좌절된다. 본인 역시 학부 시절 미술사를 공부하면서 남성 신체가 여성 신체와는 다르게 재현되어 왔음을 확인하였다. 왜 그러한 차이가 있는지, 그리고 그러 한 차이를 확인할 때마다 본인이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정확히 무 엇 때문인지 아직 정확히 진단할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었고, 따라서 그러한 현상을 야기한 여러 복잡한 사회문화적인 배경을 심도 있게 탐구하지도 못했다. 다만 여전히 이러한 현상을 당연한 것으로 수긍 하지는 못하였다. 여성향 서브컬쳐의 적극적 향유 주체로 지낸 경험 으로 인해, 어딘가에는 여성이 보고 싶어하는 남성의 모습이 분명 있 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미술사의 여성상은 분명 남성의 시선에 봉 사할 것을 염두에 두고 제작되었다. 그러므로 반대로 여성의 시선에 봉사할 남성 신체도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이다. 따라 서 이러한 남성상은 원래부터 없었던 것이 아니라 일시적으로 사라졌 다고 생각하였으며, 본인이 찾아올 수 있다는 상상력이 일었다.

그러나 그러한 선례를 미술사에서는 발견할 수 없었다. 적어도 미 술사 강의를 4년제 대학에서 10회 이상 수강한 학생이 상식적으로 거 론할 만한 주요 작품들 안에서는 없었다. 심지어 동아시아 미술사의 명작이라고 배운 예찬의 회화에서는 남성의 육신이 아예 소거된 상태 로 표현되었다([도판 2]참조). 앙상한 나무나 빈 정자로 미루어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작가의 정신 뿐이다. 작가—및 그와 동조하던 문인 들—의 심경이 어떠했는지, 무슨 신념 때문에 저런 기분이 들었는지 는 알아볼 수 있으나, 그래서 “그 남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저런

정신을 갖게 만든 삶을 살게 한 저 남자의 몸은 어떤 모습인지는 알 려주지 않았다.

물론 예찬의 작품이 지니는 예술성은 인물을 효과적으로 배제한 데에 기인한 바가 크다. 그러나 여성을 육체 없는 정신만으로 표현한 예는 찾을 수 없었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여성의 영웅적인 행적을 기 록한 그림을 간혹 접할 수 있었으나, 이러한 경우에도 그 여성의 신 체가 꼭 두드러지게 그려져 있었으며, 나아가 관객이 이를 구경거리 로 삼고 성적으로 대상화할 빌미가 있었다. 반면, 명작 속 남성은 작 품 안에 재현되더라도 그를 대상화하기 어렵도록 하는 여러 장치를 동원하고 있었다.122) 고대 그리스의 누드 조각상의 우아함과 아름다 움에는 “정신의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이라는 해석이 수반되었다. 이 후 등장하는 남자 누드(백인 청년기 남성의 누드)도 인간 일반을 대 표하는 이미지로 다루어졌으며,123) 남성의 지위나 능력을 지시하는 의복이나 소품, 그리고 고압적인 표정이나 제스처 등이 그를 성적 대 상으로 보는 것을 방해하였다.

동아시아 전통 회화 속 남성은 성적인 존재와 더욱 거리가 멀었 다. 원대 화가 유관도(劉貫道: 1258~1336)의 소하도 ([도판 28])에서 보이다시피, 그림 속 선비의 신체는 매력적이거나 아름답게 묘사되어 있지 않다. 연령대도 높고, 자세도 구부정하며, 왜소한 체격의 소유자 이다. 오른쪽의 두 여인은 젊고 우아하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의 용 모가 누군가에게 아름다워 보일 것을 목표로 그려지지 않았음은 더욱 분명해진다. 그림 속 주인공은 가슴과 복부를 노출하고 있지만, 이를

122) MacKinnon, Kenneth. Uneasy Pleasure: the Male as Erotic Object. London:

Cygous Arts, 1997, p. 49.

123) MacKinnon. 위의 책, p.47.

보고 그가 저 두 여인을 유혹하려는 장면이라고 이해하는 사람은 없 을 것이다.

“여성을” “유혹하는” “아름다운” 남자의 몸은 어디로 갔는가? 여 성향 서브컬쳐에서는 수없이 만날 수 있었던 모습인데, 서브컬쳐보다 훨씬 역사도 길고 범위도 방대한 고급미술에서는 눈에 띄지 않았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여러 방해기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신체를 성적으로 대상화할 여지가 아주 없지는 않았다. 젊고 아름다운 몸이 표현되었기 때문이다. 아울러 남성 동성애자 작가들이 자신의 성향을 작품에 종종 반영하였기에, 남성을 유혹하는 남성 신체라도 등장한다.

그러나 동아시아 미술사에서는 누구에게도 성적 매력을 발산하려는 남성의 몸은 없었다. 본인이 찾아올 남성상은 이제 “동아시아 미술에 서” 여성을 유혹하는 남자의 아름다운 몸으로 구체화되었다.

정신이 아닌 신체의 매력만으로 유혹하려는 남성의 모습을 찾는 것은, 곧 여성 주체에게 자리를 주는 일과 같았다. 젊고 아름다운 남 성의 모습을 표현하기는커녕 아예 육신을 화면에서 지워버린 미술사 를 공부하는 내내, ‘여성 관객이 무엇을 보고싶어 하는지는 전혀 고려 되지 않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도판 28]을 다 시 한 번 볼 때, 그림 속 남성은 두 여인을 유혹하려 하지 않는 것임 은 물론이고 아예 그들을 의식조차 하지 않고 있다. 마치 주변에 아 무도 없는 듯 편안한 옷차림과 자세이다. 그들은 그가 몸가짐을 가다 듬을 필요가 없는, 어렵지 않은 존재들이며, 따라서 그가 연령에서 뿐 아니라 지위에서도 그들보다 우위에 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자 신보다 아랫사람들이니, 그들이 자신의 모습을 보고 추하다고 여기든 또는 어떤 평가를 내리든 그에게는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124) 이렇듯

그림 속 여성들은 남성 주인공에게는 무시되고, 그림 밖 관객에게는 그림 전체를 돋보이게 하는 소품으로 소비되도록 그려졌다. 그림 밖 관객이 여성이라면 1)그림 속 여성들에 이입하여 장식품의 자리에 있 거나, 2)그림 속 남성에 이입하여—남성 관객들이 그러하듯이— 여성 인물들을 무시하여야 한다.

그렇다면, 여성이 무시되지 않는 장면을 만들려면, 반대로 여성을 지극히 의식하고 있는 남성을 그리면 된다고 상상하였다. 여성의 시 선을 의식하지 않으니 여성에게 매력적이지 않은 신체만이 재현되거 나 또는 아예 그려지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러한 육신의 부재로 표현되던 가치들—고매한 정신이나 용맹함, 충정 등—은 모두 남성, 그 중에서도 사대부 계층에게만 허락된 가치들이었다. 여성과 하층민을 배제해 왔고, 결국 차별과 억압을 정당화하는 허울로 이용 되었다.

본인의 그림 속 남성은 늘 여성의 시선을 전제하고 있다. 그를 바 라보는 여성의 취향과 미적 기준에 부합하고자 하며, 그의 신체는 여 성들에게 시각적 쾌락을 선사하기 위하여 존재한다. 여성에게는 허락 되지 않았던 권위나 지성이나 무력으로 여성을 가르치거나 지배하려 드는 대상이 아니라, 오로지 여성이 자신을 매력적인 성적 대상으로 인정해 주기를 바라는 상태로 그려진다. 본인은 (이성애자) 여성의 욕 구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남자의 몸을 찾아옴으로써, 없는 것으로 취 급되던 여성 주체의 존재 역시 가시화하고자 하였다.125) 그 주체는

124) 그림 속 두 여인은 시종들로 해석되고 있다. Wu, Hung. The Double Screen:

Medium and Representation in Chinese Painting. University of Chicago Press, 1996, p. 108 참조.

125) 그 몸을 찾아온 곳은 여성향 서브컬쳐였다는 사실, 그리고 여성 주체의 모습을 재현하지 않은 이유는 앞서 기술하였다.

자신이 보고싶어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며, 그것을 제공받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살아오던, 여성향 서브컬쳐가 보전해 온 시 선의 주인로서의 여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