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정만화는 여성의 시각에서 연애 또는 다른 서사를 특유의 미형 (美形)의 그림체로 풀어 간 만화이다([도판 14]참조).52) 양식적 특징은 우선 가늘고 장식적인 선이 사용된다는 점이며, 인물을 만화적으로 변형할 때 뚜렷한 이목구비와 길고 날씬한 몸을 가진 형상으로 과장
51) 이러한 맥락에서 팬픽션을 쓰고 읽는 여성들을 “프로슈머”, 즉 제작과 소비를 동시에 하는 주체로 칭하기도 한다. 한유림. 「2∙30대 여성의 아이돌 팬픽 문화 를 통해 본 젠더 트러블」. 문학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대학원: 협동과정 여성 학 전공, 2008.2 참조.
52) 이미지 출처:
https://www.ebay.co.uk/itm/POSTER-LADY-OSCAR-FRANCOIS-DE-JARJAY ES-RIYOKO-IKEDA-ANDRE-MANGA-ANIME-ART-OF-5-/132596902585.
2019년 1월 21일 1시 41분.
한다는 점이다. 갸름한 얼굴형에 장식적으로 표현한 큰 눈, 긴 팔다리 등을 강조하므로 서구적인 미의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는 비 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실제로 [도판 14]참조의 오스칼은 스웨덴 배우 비욘 안드레센(Björn Andrésen: 1955~, [도판 15])을 모델로 하 여 제작되었다.53) 그러나 순정만화의 남자 캐릭터—소위 “꽃미남”—
이 서구적인 미의 기준에 정확히 부합하지는 않는다.54) 서구 문화에 서 이상적인 남성상인 고대 그리스 조각상과 비교해 볼 때, 꽃미남들 은 강인한 성인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으며 반대로 유약해보이기까지 할 정도로 마르고 섬세한 용모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 직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다.
이는 우선 순정만화의 주 소비층이 10대-20대 여성들이므로 같은 또래의 캐릭터를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본 논 문에서는 여성에게 위협을 가할 성인 남성으로서의 권위를 (아직은)
53) 비욘 안드레센의 이미지 출처:
https://carolkean.wordpress.com/2016/12/25/death-in-venice-bjorn-andresen/.
2019년 1월 20일 15시 52분.
54) 액션을 강조하는 소년만화의 근육질 남성 캐릭터들과 그들을 보조하는 과장된 육체의 여성 캐릭터들 역시 동아시아 시각문화에서는 없던 서구적 신체임은 마 찬가지이다. 모든 만화는 망상과 욕망을 반영하는 판타지를 제공하기 위해 과장 을 하고, 현실이 아닌 다른 세상—다른 나라나 다른 시대 또는 상상 속의 세계 등—을 구현함에도 불구, 순정만화에만 사대주의적이라는 비난이 왕왕 가해진다.
“여성들의 창작물”에 대한 편파적인 시각과 그러한 의견의 공론화·권력화는 비단 만화의 영역에서만 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한국의 여성문학을 연구한 심진경은
“전통적으로 창조력은 남성적 특성으로 간주되었다”며, 남성 작가와 비평가들은 여성들을 창조력이 부족한 존재라고 상정하였고, 여성의 창조력을 “기괴한 것으 로 제시”하거나 “의심”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남성중심적 문학계는 사적인 내용 을 주로 한 수필 등을 “여성적인 장르로 젠더화”하고, 그 협소한 영역에 머무를 때만 여성의 창조를 “‘문학적’ 평가의 대상”으로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마찬가지 로 여성들의 만화가 “사대주의적”이라는 비판은 여성 전체가 문제의식이 결여된 존재이며 맹목적으로 서구를 지향한다는 프레임에서 기인한 것으로, 예술계 내 여성의 역할을 규정지으려 하던 오랜 관습과 무관하지 않다. 심진경. 「여성문학 의 탄생, 그 원초적 장면: 여성·스캔들·소설의 삼각관계」. 권보드래 외. 오혜진 기획. 『문학을 부수는 문학들』. 서울: 민음사, 2018, pp.50, 64-65 참조.
갖지 않은 캐릭터가 고안된 것으로 보았다. 결국 서구적 신체를 모티 브로 하였지만 동아시아 여성의 취향에 맞는 특징들을 취사하여 편집 한 남성상이라고 할 수 있다. 순정만화적 남성상의 여성주의적 의의 에 대해서는 제 5 장의 제 1 절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도판 14] 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의 주인공 오스칼,
[도판 15] 배우 비욘 안드레센(Bjorn Andresen)
이 장에서는 순정만화가 “여성향”, 즉 여성들의 성향에 부합한다 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수용자 분석을 통해 순정만화의 특성 을 정의한 곽선영은 순정만화의 수용자인 젊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설 문조사 및 심층면접을 실행한 결과, 이들은 소년만화에서 보이는 폭 력성과 선정성 및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상에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
고, 반대로 순정만화의 섬세한 스토리라인과 장식적인 그림을 선호함 을 밝혔다.55) 곽선영은 특히 드라마나 영화에 비해 순정만화가 더욱 여성중심적이라고 주장하는데, 드라마나 영화의 경우 그 제작에 있어 대형 조직이 관여하므로 남성들이 제작의 주체가 되는 반면, 순정만 화는 그림과 이야기를 모두 여성 작가가 담당하기 때문이다.56) 제작 과정에서 남성중심적 가치관이 개입할 여지가 현저히 적은 순정만화 는 여성들의 취향을 정확히 파악하고 반영할 수 있다. 여성들이 이입 하기 쉬운 여성 캐릭터, 여성들이 좋아하는 성격과 용모의 남성 캐릭 터, 그리고 여성들이 좋아하는 서정적인 분위기와 심리 묘사 위주의 서사 전개가 순정만화의 여성향적 특징이다. 아울러 본 논문에서 집 중하고 있는 1990-2000년대의 순정만화는 현실의 여남간 권력차나 가 부장제적 가치관을 내면화하지 않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데, 이 역시 순정만화에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여성들의 의식이 고취되어도 영 화나 드라마 등 여타 대중문화상품은 여전히 여성을 기존의 성 역할 에 순응하도록 유도하는 점을 감안할 때, 수용자의 의식 변화를 억압 하지 않고 전적으로 반영한 순정만화는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그 의미 가 크다.
한국의 순정만화를 연구한 김혜주는 순정만화의 효시를1950년대 남성 작가들이 제작한 가족만화에서부터 찾는다.57) 이 중 소녀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서사를 이끈 만화들이 있었고, 이후 1960년대 중반 활동한 엄희자(?-)가 본격적으로 여성 작가가 그린 여성 독자를
55) 곽선영. 「여성장르로서의 순정만화의 특성에 관한 연구: 수용자 분석을 중심으 로」. 『만화애니메이션 연구』, 한국만화애니메이션학회, 2001.11, pp.237-269 참 조.
56) 곽선영. 위의 논문. p.265.
57) 김혜주. 앞의 글, p.227.
위한 소녀만화를 시작하였다.58) 엄희자의 만화는 이전 남성 만화가들 의 그림과는 달리, 현재까지도 순정만화적 그림체의 전형으로 분류되 는 큰 눈의 인물과 장식적인 선을 처음 선보였다고 한다.59)
1960년대를 거쳐 1970년대에는,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은 소녀만 화 『베르사이유의 장미』(1972), 『올훼스의 창』(1979) 등의 걸작들 이 해적판으로 유입되면서 한국의 만화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60) 근대 이전 유럽을 배경으로 한 스토리, 갸름한 얼굴과 큰 눈과 호리 호리한 몸매에 긴 머리칼을 강조하는 인체 표현, 장식적인 선 등 순 정만화의 전형적인 요소들이 이들에 의해 발전하고 정착하였으며, 말 풍선 밖에서도 대사를 표기함으로써 인물들의 심리를 표현하는 관습 역시 이들의 작품에서 비롯된 것이다.61)
1980년대 초까지도 일본 만화가 한국 만화를가장하여 해적판으로 유통되었으므로, 이 시기 한국의 만화가와 독자들은 일본 소녀만화를 한국 순정만화의 일부로 인식하였다고 한다.62) 『베르사이유의 장 미』는 물론, 이가라시 유미코(いがらし ゆみこ, 1950-)와 미즈키 쿄 코(水木 杏子, 1949-)의 합작 『캔디 캔디』(1975-1979)는 한국에서 순정만화를 향유하는 여성들에게도 중요한 작품으로 여겨진다. 이러
58) 김혜주. 위의 글, p.232.
59) 이는 일본 소녀만화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일본의 소녀만화 역시 데츠카 오사 무 등의 남성 작가들로부터 시작하였으나, 소녀 독자층이 형성되면서 여성들을 위한 그림체와 내용이 구체화되고 여성 작가들이 등단하여 활동하는 과정을 거 쳐 발전하였다. 한국의 순정만화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쳐 발전하였다. 김혜주.
위의 글, p.233 참조.
60) 각각 1970년대 등장한 하기오 모토(萩尾望都, 1949-), 이케다 리요코(池田 理代 子, 1947-)의 작품들이다. 이들을 포함하여 소위 “24년조”(1949년(쇼와(昭和) 24 년) 전후 출생)로 불리는 작가들은 수준 높은 작품을 발표하여 소녀만화의 전성 기를 이끌었으며, 만화의 역사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61) 김은미. 「세대별로 살펴본 순정만화의 페미니즘적 성취」. 『대중서사연구』, 제11권1호, 대중서사학회, 2005.6, p.44.
62) 정승화. 앞의 글, p.166 참조.
한 히트작의 위세 때문에 한국 만화가들은 일본 만화의 작풍을 답습 하거나 아예 모방본을 만들어 유통하는 사례도 많았지만, 1980년대 중반부터 두각을 나타낸 김동화(1950-), 한승원(1958-), 황미나(1961-) 등의 작품에서부터는 점차 독자적인 작가의식이 나타나기 시작하며 1980년대 후반 김진(1960-), 김혜린(1962-), 신일숙(1962-) 등의 만화 가들은 일본 소녀만화와는 다른 내용을 담아 한국 만화의 독자적인 노선을 개척하였다.63)
순정만화의 세대별 변화를 여성주의적 입장에서 연구한 김은미에 의하면, 이러한 변화의 이면에는 순정만화의 수용자인 여성들의 변화 가 있었다고 한다.64) 1980년대 여성의 대학 진학률이 상승하면서 젊 은 여성들의 사회참여에 대한 관심도 높아졌고, 순정만화에서도 역사 의식을 담은 대하 드라마의 형식이 증가하였다는 것이다. 한편, 여성 들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진 1990년대에는 여성들의 자아 실현과 현실 적인 고민들이 반영된 만화가 발전하게 된다.65)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은 한국 순정만화가 비약적으로 발전 한 시기로, “여성 중심의 만화”라는 큰 틀 안에서 여러 실험이 행해 지며 내용과 형식에 있어 다양한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이다. 본인 은 주로 이 시기의 만화의 적극적인 향유층이었으며, 작품에 활용하 는 순정만화의 특징 역시 이 시기의 작품들의 특징이다.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한국의 순정만화는 양적·질적 발전과 더불 어 두 가지 변화를 겪게 된다. 우선 순정 전문 잡지라는 정기간행물 형태를 통해 동시대 독자들과 정기적으로 소통하게 되었다는 점, 그
63) 김혜주. 앞의 글, p.234 참조.
64) 김은미. 앞의 글, p.42.
65) 김은미. 위의 글. pp.44-5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