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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近代 春香敍事의 脫歷史化

1) 신분제의 後景化

근대 춘향서사에서 근대이행기 사회의 신분제적 위계질서는 이전의 춘 향서사에서와는 상이한 양상으로 그려진다. 신분제에 바탕을 둔 위계가 현실의 질서로 작용하고 있던 1864년에 필사된 남원고사에서는 방자가 이도령을 조롱하거나 희화화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바,1) 이는 조선후기 신

분제의 동요 현상을 여실히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되어 왔다. 그러나 근대 춘향서사에서는 이도령이 방자에 의해 희화화되기 보다는 이도령에 의해 신분제적 위계가 허물어지는 양상이 나타난다. 이는 이도령이 광한루에 춘유(春遊)를 나가 방자 등의 관속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를 통해 살펴 볼 수 있다.

근대이행기 기생계 춘향서사의 전형적 텍스트로 1864년에 필사된 남 원고사에서 이도령은 하층의 관속에게 술을 나누어 주지 않고 혼자 술을 마시며 흥취를 즐기는데, 이 장면은 다음과 같이 서술된다.

호상(壺觴)을 자작(自酌)하여 수삼배 거후르고 배회고면하여 산천도 살 펴보고 음풍영월하여 옛 글귀도 생각하니.2)

이도령이 광한루에서 자작자음(自酌自飮)하는 장면은 남원고사와 상 당한 친연성을 보여주는 춘향서사인 동양문고본 춘향전과 최남선의  고본 춘향전에도 보인다.3) 해당 장면이 수록된 동양문고본 춘향전 권 1은 1909년에 필사되었고, 고본 춘향전은 1913년에 간행되었으나 남 원고사의 해당 장면은 개변되지 않았다. 근대이행기 비기생계 춘향서사 로 1906년에서 1911년 사이에 간행된 것으로 추정되는 완판 84장본 열 녀춘향수절가에서도 이도령은 먼저 술을 마신 뒤 방자 등에게 술상을 물 려준다.4) 이는 20세기 초반에 형성된 춘향서사라 할지라도 근대이행기 춘향서사로 분류되는 텍스트에는 신분제적 위계질서가 여전히 역사적 현 실로서 반영되고 있음을 보여준다.5)

1) “방자놈이 별안간에 하는 말이, ‘야반무례오 구색친구라 하니, 심심파적할 양으로 골치기나 하나씩 하며 가세.’ 이도령이 어이 없어 이르되 ‘방자야, 상하체통 외자 하고 벌써 통치 못한 것이 내가 손을 빠쳤구나.’ 방자놈 대답하되 ‘으라청청 이 맛 보게. 피차 편발 아이들이 야심 중 기롱하니 무엇이 망발이며 자네 뒤에 양반 두 자 써 붙였나. 말이 이러하니 체증일세.’”(남원고사, 31면)

2) 남원고사, 12면.

3) “옥호에 넣은 술을 인호상이자작하여 수삼배를 거후르고”(동양문고본 춘향전, 176면); “옥호(玉壺)에 넣은 술을 인호상이자작(引壺觴而自酌)하여 수삼배를 기우 리고”(고본 춘향전, 김진영 외 편, 춘향전 전집 15, 박이정, 2004, 352면) 4) “이 때 내아에서 잡술상이 나오거든 일배주 먹은 후에 통인 방자 물려주고”(완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304면)

5) 기생계 춘향서사인 이고본 춘향전에도 이도령과 방자가 광한루에서 연치대로

반면 근대 춘향서사인 옥중화에서 이도령은 광한루에서 춘유를 즐기 며 방자 등의 관속들과 신분제적 위계를 허물고 술을 마신다.

“방자야 술 올려라. 이 좌중에 나이 누가 많으냐?”

방자 여쭈오되

“저 후배사령(後陪使令)이 키는 조그마하고 얼굴은 노래도 나이 사십여 세로소이다.”

“얘 존장(尊長)이 바로 훨썩 넘고나. 후배사령 상좌(上座)로 앉히고 방 자 너도 올라오너라.”

“황송하오이다.”

“누른 송이 어떠하냐. 어서 올라 앉아라.”

술상을 들여 놓고 사령이 수배(首盃)하고 방자도 먹고 도령님도 잡순 후에 도령님 방자 불러

“이 애, 파탈(擺脫)하고 놀 때는 상하를 너무 차리면 정도 없고 녹록하 고 때가 묻어 못 쓰느니라. 향당은 막여치로 연치(年齒)차려 술을 먹었으 니 담배들도 먹어라.”6)

옥중화의 이도령은 봄놀이를 즐기며 ‘향당막여치’(鄕黨莫如齒)를 언급 하고 나이순으로 술을 마신다. 이에 이도령을 모시고 나왔던 관속 가운데 가장 나이가 많은 후배사령이 먼저 술을 마신다. 1932년에 간행된 도상 옥중화에도 상층 신분의 이도령이 하층 신분의 방자와 연치대로 술을 마 시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삽입되어 있다.

“자, 오늘은 파탈하고 놀자. 이런 놀이에 상하를 차리면 빽빽해서 못쓰 술을 마시는 장면이 삽입되어 있다. 그러나 이고본 춘향전에서는 방자의 주도로 신분제적 위계질서의 이완이 발생한다. 이는 방자에 의해 이도령이 조롱을 당하고 희화화되는 남원고사 등의 작품과 유사한 면모라 할 것이다. 이고본 춘향전의 해당 장면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방자야 술 들이라, 곡강춘주인인취라. 너도 먹고 나도 먹자.’ 방자놈 술 부어들고, ‘도련님, 우리 둘이 편발은 일반인 즉 연치 찾아 먹으면 어떠하오?’ ‘이 자식 네 나이 몇 살인고?’ ‘소인의 나이 열일곱 살 가 옷이오.’ ‘이 놈 가옷이라니?’ ‘유월이 생일이요.’ ‘그리하면 나보다 일 년 가옷이 맏이로구나. 지금은 차례로 먼저 먹으라.’”(이고본 춘향전, 156~157면)

6) 이해조, 옥중화, 보급서관, 1914, 5~6면. 옥중화는 1912년 매일신보(每日 申報)에 연재된 이후 단행본으로 수차례 간행되었다. 본고는 1914년 보급서관에 서 간행한 옥중화의 원문을 현대어 표기로 바꾸어 인용한다.

는 법이니라. 담배도 맘대로 먹거니와 향당은 막여치라, 연치대로 술을 먹 자.”7)

근대 춘향서사에서는 광한루에서의 봄놀이가 이도령의 주도로 신분의 경계를 허물고 상하동락을 넘어 파탈하여 노는 놀음으로 형상화된다. 광 한루에서의 봄놀이가 신분제적 위계질서의 파탈로 지칭되고 있는 점은 근 대 춘향서사에 신분제적 위계질서가 이완되어 있음을 시사한다.

1925년에 창작된 일설 춘향전에도 이도령과 방자가 연치대로 술을 나누어 마시는 장면이 다음과 같이 삽입되어 있다.

몽룡이 먼저 자리에 앉아

“여봐라, 너희들도 다들 올라앉아라. 우리 오늘은 상하의 별 다 걷어치 우고 친구가 되어서 트고 놀자. 자, 다들 올라앉아라.”

(…중략…)

몽룡은 손을 저어 자기에게 권하는 술잔을 막으며

“향당에는 막여치라니 좌중에 누가 제일 나이가 많으냐? 우리 나이 차례 로 순배를 하자.”

방자가 좌중을 휘둘러보더니,

“아마, 이 후배 놈이 제일 연장자일 듯하오. 보기에는 요렇게 땅딸보라 도 정녕 마흔 살은 넘었을 것이오.”

“어, 그러면 내게 존장은 넉넉하구나. 첫 잔은 후배에게도 돌려라.”

하고 몽룡이 손수 술잔을 들어 후배를 권한다. 본래 용렬한 후배는 도련 님의 손에서 술잔을 받는 것이 너무도 송구하여 잔 잡는 손이 벌벌 떨린 다.

“이놈아, 이것은 강신을 하느냐, 술은 왜 엎질러?”

하고 방자가 자기 옷에 떨어진 술 방울을 떨어버린다. 한 순배 두 순배 쉴 새 없이 돌아서 병의 술도 거의 다하고 안주 그릇도 하나씩 둘씩 비었 다. 안주라야 과일포, 암치, 문어 따위에 불과하건마는 그런 것을 좀처럼 얻어먹어보지 못하던 판이라 모두 접시 굽을 핥을 지경이었다.8)

7) 도상 옥중화(김진영 외 편, 춘향전 전집 17, 박이정, 2004), 289면.

8) 이광수, 일설 춘향전, 태학사, 2019, 20~21면. 이광수의 일설 춘향전은 동 아일보에 연재된 이후 수차례에 걸쳐 단행본으로 간행되었다. 본고는 이광수의 작품을 현대어 표기로 전환하여 최근 발간한 춘원 이광수 전집에 수록되어 있는  일설 춘향전의 원문을 인용한다.

일설 춘향전의 해당 장면에서도 이도령의 주도로 신분의 경계가 이완 되고 연치 순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는 양상이 나타난다. 그리고 일설 춘 향전에서 해당 장면은 옥중화보다 파탈의 정도가 큰 것으로 형상화된 다. 이는 이도령이 방자 및 사령들에게 상하의 구별을 잊고 “친구가 되어 서 트고 놀자”라고 말하는 데서 확인된다. 일설 춘향전에서 방자와 이 도령의 관계는 신분제적 위계질서가 강력히 작용하지 않는 관계로 설정된 다. 작품의 서두에서 방자는 이도령에게 학업을 권면하고 춘유를 경계하 였는데, 이는 이도령과 방자가 “서로 상하의 구별을 잊고 그만큼 친해진”

까닭으로 서술된다.9)

1936년에 연재된 「희곡 춘향전」에 이르면 신분제적 위계질서는 고리타 분한 구습으로 서술된다. 「희곡 춘향전」에서도 이도령과 방자 등의 관속 은 광한루에서 연치 순으로 술을 나누어 마시는데, 나이가 가장 어린 까 닭에 마지막 순서로 술을 마시게 된 이도령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렇게 파탈하고 노는 것을 나는 그중 좋아해. 여기서만 말이지마는 요 즘 꼬리답답한 양반 부스러기들이 너무 상하만 찾는 데는 나는 딱 질색이 다. 세상 이치를 따져보면 본시 만물이 날 때에 상하가 있는 것은 아니거 든.”10)

한편 춘향서사의 서사적 배경을 당대의 현실과는 다른 과거의 현실로 인식하는 면모는 1924년에 간행된 우리들전에 이미 나타난다. 우리들 전에서도 이도령은 방자에게 상하를 차리지 말고 파탈하여 놀자고 말하 며 술을 부어준다. 방자는 이에 이도령에게 “황송하외다”라고 말하는데, 방자의 말에 대해 평비자 정재경은 “나이 많은 늙은 것이 왜 황송이야”라 는 반응을 보인다. 정재경은 신분이 아니라 연치로 위계를 형성하는 근대 사회의 시각에서 이도령과 방자의 관계를 바라보는 것이다. 정재경의 반

9) “‘공부하시는 도련님이 공부나 하실 게지 좋은 경치는 찾아 무엇하시려오?’하고 바로 몽룡을 경계하는 어조다. 서로 상하의 구별을 잊고 그만큼 친해진 것이다.”(

일설 춘향전, 16~17면)

10) 유치진, 「희곡 춘향전」(3), 조선일보, 1936. 2.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