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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I. 近代移行期 妓生系 春香敍事의 확립과 변모

3) 신분에 대한 부정의 축소

일부 근대이행기 기생계 춘향서사에서는 기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부정 적 의미가 축소되고, 춘향이 자신의 신분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는 변

149) 신학균 소장 39장본 별춘향가, 481면.

150) 소혜왕후 지음, 이경하 주해, 내훈(內訓), 한길사, 2011, 151~154면 참조.

151) 신학균 소장 39장본 별춘향가의 월매는 방자와 도령이 처음 찾아왔을 때, 자 신의 집은 손님을 보는 집이 아니며 술을 파는 집도 아니라고 말한다. 이는 월매 가 춘향을 애초에 일반적인 기생으로 여기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가 나타난다. 춘향의 문제적 개인으로서의 형상이 전면화된 남원고사

및 경판 춘향전의 춘향은 기생이라는 신분을 부정하면서 자기 정체성을 확고히 하였다. 또한 관습적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는 기생인 월매와 대립 하며 일반적인 기생 계층과 갈등을 겪는 면모를 보여주었다. 남원고사

의 춘향이 동류의식(同類意識)을 가졌던 기생은 두 사람뿐이다. 춘향은 신관 사또에게 항거하며 계섬월(桂蟾月)과 홍불기(紅拂妓)를 열녀로 지칭 하고 자신의 열행을 이들의 절개에 빗댄다.

“자고로 열녀하대무지(烈女何代無之)리오? 양구조어(羊裘釣魚) 엄자릉도 간의태후 마다하고 자릉대에 피우하고, 수절의사(守節義士) 백이숙제 불식 주속하려 하고 수양산에 채미가를 노래하고 (…중략…) 대순이비(大舜二 妃) 아황여영 혈루류황 따라 있고, 유한림(劉翰林)의 사부인도 수월암에 엄적하고, 낙양의녀(洛陽義女) 계섬월도 천진루에 글을 읊어 평생 수절하 였다가 양소유를 따라 가고, 태원 땅 홍불기도 난세에 뜻을 세워 만리장정 종군하여 이정을 따랐으니 몸은 비록 천하오나 절개는 막는 법이 없사오 니 물 밑에 비친 달은 잡아내어 보려니와 소녀의 정한 뜻은 차생(此生)에 앗지 못하오리이다.”152)

남원고사의 춘향은 노류장화(路柳墻花)는 인개가절(人皆可折)이므로 기생에게 수절이란 당치 않다는 신관 사또의 말에 대해 위와 같이 항변한 다. 춘향은 자신의 이도령에 대한 열행을 고결한 은사(隱士)인 엄자릉이 나 백이숙제의 고절(孤節)에 빗대기도 하고 아황과 여영, 사부인의 열행 에 빗대기도 한다. 더불어 춘향은 구운몽에 등장하는 기생 계섬월의 수 절과 규염객전(虯髥客傳)에 등장하는 기생 홍불기의 절개에 자신의 열 행을 견준다. 남원고사의 춘향이 열녀로서 동류의식을 가졌던 기생은 문학작품 속에 등장하는 계섬월과 홍불기 뿐이다. 계섬월과 홍불기는 허 구의 인물이므로, 남원고사의 춘향은 현실에 실재하는 기생에게는 동류 의식을 보이지 않을 만큼 기생이라는 신분을 부정하고 있었다고 생각된 다.

남원고사에서와 달리 기생계 춘향서사의 일부 텍스트에서는 춘향이

152) 남원고사, 88~89면.

역사 속에 실재한 것으로 전해지는 기생의 절개에 자신의 열행을 견준다.

춘향이 기생의 절개를 근거로 신관 사또에게 항거하는 면모가 나타나는 기생계 춘향서사에는 신학균 소장 39장본 별춘향가, 김동욱 소장 낙장 51장본 춘향전, 박순호 소장 49장본 춘향전이 있다. 신학균 소장 별 춘향가에서 신관 사또는 춘향에게 “기생 열녀 정문(旌門) 선 것 못 보았 다”고 말하며, 기생에게 열행이란 있을 수 없으니 수청을 들라고 명한다.

이에 춘향은 다음과 같이 항변한다.

“진주 기생 의암(義巖)이는 촉석루 높은 집에 칼 빼들고 대무(對舞) 추 다 왜장(倭將) 청정(淸正) 목을 안고 난간에 뚝 떨어져 강수(江水) 고혼 (孤魂)되었으니 그 아니 충절(忠節)이며, 평양 기생 월선이는 왜장의 평수 길(平秀吉)이 감홍로 독한 술을 장진취로 대취시켜 영광전에 잠들이고 김 응서와 함영하며 왜장을 죽였으니 근덜 아니 충절이요. 그런 일로 보올진 대 기생인들 열녀 없다 하오리까.”153)

김동욱 소장 낙장 51장본 춘향전의 신관 사또 역시 ‘노류장화는 인개 가절’이므로 기생에게 절행이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이에 춘향은 다음 과 같이 항변한다.

“여보 사또 듣조시오. 어찌하여 기생인들 쓸 데가 없고 절행이 없으리 까. 임진왜란 분분 시에 왜장 청정 평수길이 군사 삼조 팔억을 거느리고 임진 삼월 십오일에 동래부에 침범하여 팔도가 어육될 때, 진주 기생 의암 이는 촉석루 높은 집에 대연을 배설하고 갖은 풍류 세별곡에 왜장과 대무 하다 허리 질끈 부여안고 촉석루 높은 아래 그 중에 뚝 떨어져 남강수에 풍덩 빠져 대장충절을 전하였고, 평양기생 월선이는 조섭이란 장수 고이 달래어 감홍로 독한 술 장진주로 대취시켜 연광정에 잠들이고 김응서와 공역하여 청룡검을 품에 품고 은근히 들어가 조섭의 목을 뎅겅 찍어 대장 충절 세웠으니 어찌 기생인들 쓸 데가 없사오며, 절행으로 이를진대 연왕 의 홍불기는 이정을 따라갔사오니 절행인들 없다하오리까. 자고로 기생이 큰일은 다 하옵디다. 그런 분부 어이 하오.”154)

153) 신학균 소장 39장본 별춘향가, 492~493면.

154) 김동욱 소장 낙장 51장본 춘향전, 176~177면.

신학균 소장 별춘향가와 김동욱 소장 낙장 51장본 춘향전의 춘향 은 모두 자신의 절개를 임진왜란의 와중에 기생이 국가를 위해 보인 충절 (忠節)에 빗댄다. 춘향은 진주 기생 의암과 평양 기생 월선이 나라를 위 해 왜군 장수의 목숨을 빼앗은 일에 자신의 열행을 견주며 이들에 대해 동류의식을 가지고 있음을 표하고 있다.

춘향의 발화에 등장한 진주 기생 의암은 논개(論介)를 가리키며, 평양 기생 월선은 계월향(桂月香)을 가리킨다. 장지연(張志淵, 1864~1921)이 편찬한 일사유사(逸士遺士)에 두 기생의 충절에 대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일사유사에 따르면 논개는 현감(縣監) 황진(黃進)의 총애를 받았 는데 임진왜란 때 황진이 순국하자 그를 따라 죽고자 하였다. 이에 논개 는 왜군 장수를 유인하여 끌어안고 바위 위에서 몸을 던졌다. 이후 논개 가 뛰어내린 바위를 의암(義巖)이라 하고, 사당을 세워 제(祭)를 지내며 논개의 충절을 기린다고 하였다. 또 일사유사에 수록된 계월향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임진왜란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부장 (副將)이 계월향의 미색을 보고 총애하였으나 계월향은 마음에 불평을 느 꼈다. 이에 계월향은 조선군 장수 김응서(金應瑞)와 왜장의 목숨을 빼앗 고자 내통하였고, 김응서는 왜장과 계월향을 모두 칼로 찔러 죽이게 된 다. 이후 조정에서는 계월향의 의(義)를 가상히 여겨 의열사(義烈祠)에 배향하였다.155)

논개와 계월향의 충절에 대한 일화는 기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 지가 허구인지 불분명하다. 그러나 장지연이 중인(中人) 이하 계층의 전 기(傳記)를 모은 일사유사를 편찬하며 논개와 계월향의 일화를 수록한 것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이들 의기(義妓)에 대한 일화가 역사 적 사실로 인식되고 또 광범위하게 회자되었음을 시사한다. 그리하여 의 기들의 충절에 대한 일화가 ‘기생의 절개’라는 점을 매개로 하여 춘향서 사에 삽입된 것이다. 그리고 신학균 소장 별춘향가와 김동욱 소장 낙장 51장본 춘향전의 춘향이 자신의 열행을 의기 논개와 계월향의 충절에

155) 장지연, 일사유사 권1, 회동서관, 1922, 31~32면.

비견하며 이들에 대해 동류의식을 표하는 것은, 논개와 계월향이 기생임 에도 불구하고 그 신분으로 말미암아 부정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 를 통해 일부 기생계 춘향서사에서 기생이라는 신분에 대한 부정성이 축 소되는 양상이 나타남을 확인할 수 있다.156)

한편 박순호 소장 49장본 춘향전의 춘향은 춘천 기생 계심(桂心)에 대해 동류의식을 표한다.

“사또 분부 내에 기생 열녀 없다하니 소인이 말하리다. 우리나라 위국충 심(爲國忠心) 만고 일부종사로 말할 땐 춘천 기생 계심이는 김문(金門)에 절(節)을 지켜 장안호걸 여러 발길 몇 날이 못 지내어 청춘혼백 원통하여 문소각 한성 밖에 계심충열묘라 천재백년(千載百年) 유전하니 기생 열녀 아니리까.”157)

신관 사또는 춘향을 창녀로 지칭하며 관령(官令)을 따를 것을 명하나, 춘향은 신관 사또의 수청 명령에 대해 위와 같이 항변한다. 춘천 기생 계 심은 춘천 부사의 소실이 되어 부사의 아이를 잉태하였다. 부사가 체직되 어 떠난 뒤 겁탈을 당해 뱃속의 아이가 죽자 계심은 자결하였다. 1796년 에 강원도 순찰사는 계심이 부사에 대한 정절을 지켰다 하여 열녀 정문을 세워주었고, 춘천의 선비들은 계심의 무덤에 ‘춘기계심순절지분’(春妓桂心 殉節之墳)이라는 묘비를 세워 주었다고 한다. 계심의 일화 역시 어디까지 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구인지는 불분명하다. 그러나 20세기 초까지 계심은 한 남성에 대한 절개를 지킨 기생으로 회자되며 실재한 인물로 인 식되었다. 개벽(開闢)이나 별건곤(別乾坤)같은 잡지에 계심의 정절에 대한 언급이 나타나는 까닭이다.158) 특히 1924년 6월에 간행된 개벽

48호에는 「경성의 화류계(花柳界)」라는 기사가 실려 있는데, 이 글의 필 자는 ‘남원의 춘향, 춘천의 계심이 같은 정절도 볼 수 없다’고 탄식하였 다.159) 20세기 초에 춘향과 계심은 정절을 지킨 기생으로 병칭되고 있었

156) 춘향이 자신의 열행을 의기의 충절에 비견하는 장면은 비기생계 춘향서사인 완 판 84장본 열녀춘향수절가 등에도 삽입되어 있다.

157) 박순호 소장 49장본 춘향전(춘향전 전집 10), 97면.

158) 이종묵, 「춘천 기생 계심(桂心)의 노래」, 문헌과 해석 84권 1호, 태학사, 2019, 64~72면 참조.